자전거를 거꾸로 탔다

집단상담 2회 차, 화요일

by 호단

30분 내외의 가까운 거리는 따릉이를 이용한다. 버스비 아낄 겸, 사회적 거리두기 할 겸. 오늘의 목적지는 상담센터. 저번 주부터 인간관계를 주제로 총 5회 집단상담을 받게 되었다. 매주 화요일마다 만나니, 오늘이 두 번째 시간. 10분 더 일찍 출발했는데 이게 웬걸. 고장 난 따릉이었다. 잠금장치가 풀리지 않아 포기하고 살짝 고민했다. 더 멀리 가서 따릉이를 탈지, 지하주차장에 박아둔 내 거지만 낯선 자전거를 탈지. 늦을 것 같아서 후자를 택했다.

너무 오랜만에 타서인가? 자전거가 이상했다. 앞으로 잘 나가지도 않고, 균형도 못 잡겠고. 마음이 급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 느지막이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 도로에 들어가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자전거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끼릭끼릭 소리며, 체인 헛도는 소리며 안 그래도 자전거가 길들여지지 않았는데 소리까지 신경에 거슬렸다. 사고 나는 거 아닐까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잘 도착했다. 물론, 지각이었다.

이번 집단상담은 저번과 진행방식이 달랐다. 저번에는 프로그램 위주로 시간에 맞춰 진행했다면, 이번에는 대화가 우선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해서 프로그램 시간을 줄이거나 아예 안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지난 한 주를 어떻게 보냈는지 공유하고, 상담사 분이 포스트잇과 매직, 사인펜 등을 테이블에 펼쳤다. 각자 마음에 드는 포스트잇을 골라 '나를 힘들게 하던 사람의 특징'을 네다섯 개 적기로 했다. 그리고 하얀 전지에 각자의 것을 늘어뜨려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도 경청자였다. 듣고, 웃고, 끄덕이고, 눈을 맞추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까지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니. 나는 저번 주도 말을 거의 안 했는데 오늘도 그러겠네, 생각하면서.

집단상담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상담사 분도 처음에 '익명성'을 강조하셨다. 아는 얼굴 하나 없이, 게다가 마스크까지 낀 상태라 자신의 겉모습을 덜 드러내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고. 그래도 된다고. 각자의 아픔이 대화로 오갔다. 스트레스, 상처, 고통,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다. 대상은 가족이기도, 선생님이기도, 친구이기도 했다. 옆에 있던 다른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컥했다. 눈에 맺힌 눈물은 공감의 표시였다. 그리고 상담사 분은 자연스레 나에게 대화의 바통을 넘겼다.

말이 안 나왔다. 말을 하면 눈물이 쏟아질 거니까, 할 수 없었다. 습관처럼 꾹 누르며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말했다.


저는 제 얘기를 잘 안 하고 살아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불편해하고. 그래서 제 얘기를 꺼내려고 하면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와요.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의 사람.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습관도, 그 무엇도 모르는 타인 5명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 가장 최근에 느낀 상실과 중2 때 겪은 은따 등. 나를 괴롭게 했던 혹은 하는 존재에 대해.





센터를 나와 자전거가 있는 곳까지 걸었다. 이렇게 먼 곳에 놔뒀나 싶었다. 센터로 갈 땐 길이 아주 짧아보였는데.

누가 그새 훔쳐간 거 아니야? 자물쇠로 묶어두었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훔쳐갔어도 별 상관없었을 거다. 버스 타고 갈 좋은 핑계가 생기는 거니까.

당연하게도 자전거는 제자리에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제대로 메고 출발하려는데 자전거가 앞으로 안 나갔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자전거 몸체를 살폈으나 본다고 해서 뭘 알 리가 없다. 괜히 기어를 조절했다. 아마 십 분은 그러고 있었을 거다. 높은 턱을 지지대 삼아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체중을 앞으로 실어 페달을 밟았다. 끼릭, 끼릭, 끽. 자전거가 움직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아까보다 자세가 편했다. 뭐가 달라졌는고 하니 브레이크가 손목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손잡이 앞쪽, 원래 위치로 돌아가 있었다.


누가 몰래 고쳐뒀나? 뭐지? 누구지?


혼자 탐정처럼 추리하다가 슬쩍 아래를 내려봤다. 앞바퀴랑 부딪히던 발이, 핸들에 부딪히던 무릎이 지금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덕에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와, 아까 자전거를 거꾸로 탔구나. 처음 알았다.

자전거를 거꾸로 탈 수도 있네.

아까보다 더 힘들었다. 집에는 빨리 가고 싶은데 자전거는 느리고(제대로 탄다고 해서 체인이 멀쩡 해지는 건 아니니까), 배고프고, 힘도 안 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앞만 보고 달렸다. 기진맥진해서 현관문을 열고 바로 뜨거운 샤워 했다. 내가 좋아하는 맥주 향 나는 샴푸로. 그리고 간장게장을 먹었다. 이것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제육볶음도 먹었다. 곰취인 줄 알고 맛있게 먹은 풀의 정체는 당귀였다. 오래간만에 만족스러운 한 끼 식사를 마쳤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무력하게 누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 요즘이었다. 오늘은 눈에서도 물을 빼고, 몸에서도 물을 빼서인지 몸 안의 노폐물이 싹 빠져나간 기분이 든다. 개운하다. 좋다. 일찍 나왔는데도 자전거 때문에 늦었던 때엔 생각지도 못한 하루의 마무리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이 떠오른다. '슬픔'이라서 내쳐 둔 기억을 자세히 살펴보니, '기쁨'으로 변하던. 파랗고 노란 기억. 오늘 내 구슬 색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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