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열등감은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우리 인간은 사회라고 불리는 보이지 않는 틀 안에서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산다. 언제부터 그래왔을까. 시작점을 정확히 짚기는 어렵다. 대략적인 가늠만 가능할 뿐이다. 하나는 확실하다. 인간은 모여 살면서 더욱 강해졌다. 몸집이 크고 강한 동물을 상대했고, 서로 약점을 보완해서 위기를 대처했고, 함께 머리를 맞대며 문제를 해결했다. 사회적 동물이라 불리는 인간은, 이렇듯 상생의 관계로 자라온 것 같다.
그러나 서로의 존재가 각자를 괴롭히기도 한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본질은 같다. 생존의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생존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죽지 않고 살아남는 서바이벌이었다. 공부도, 취업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내가 오늘 머물 안전한 공간을 찾지 못하면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데 그 밖의 것에 관심을 둘 이유가 있겠는가?
물론 지금 같은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당시엔 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발전'이라는 말을 잠시 살펴보자. 발전한 것과 발전하지 못한 것. 우리는 흔히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못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발전이 꼭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라 말하긴 어렵다.
'나아졌다'는 것은 이전에 부족한 면이 있다고 인지했을 때 성립되는 말이다. 앞의 이야기로 예를 들자면, 석기 시대에 살던 우리 조상에게 와이파이와 스마트폰의 탄생은 발전이 아니다. 그들의 삶, 그들의 생존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뗀석기와 빗살무늬 토기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개인에서 씨족으로, 씨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사회로. 교류의 장이 커질수록 인간에게 생존은 목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인간들은 변혁을 만들고, 그 결과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새로움에 모두가 익숙해졌을 쯤 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일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문제는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는 것이다. 몇 세기에 한 번, 몇 십년에 한 번 일어나던 이벤트가 이제는 몇 년, 몇 달만에 펼쳐졌다. 스티브 잡스가 처음 아이폰을 발표했던 2007년과 5G 상용화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G 시대를 준비하는 2020년. 지금의 변혁은 강박적인 완벽주의처럼 부족한 점을 자꾸 찾는다. 가끔은 헷갈리기도 한다. 이게 불편한 것이었나, 이게 보완이 필요한 문제였나 싶은 사소함마저 발전이라는 이름 앞에서 굴복한다.
이러한 발전을 무수히 거듭한 결과,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끊임없이 경쟁한다. 더 정확하고, 빠르고, 많고, 훌륭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교내 정보를 위해 에브리타임을, 친구들 소식을 위해 인스타그램을, 빠른 서칭을 위해 트위터를, 그밖의 뭐가 됐든 어쨌든 정보를 위해 다음 카페, 웹사이트, 커뮤니티에 들어선다. 속기 좋은 모양새다. 나의 발전을 위한 노력으로 느껴지니 말이다.
경쟁은 나와 타인(들)의 관계이다. 단순한 수다와 잡담 게시판을 훑는다고 해서 이 경쟁에 참여하지 않은 게 아니다. 오히려 더 깊게 빠져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남이 하는 고민, 남이 먹는 밥, 남이 모시는 반려동물, 남이 만난 사람 등 나의 하루가 타인의 이야기로 가득찬 셈이다. 이럴 때, 우리는 손쉽게 나의 중심을 타인에게 내어준다. 그러나 자신은 자신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무방비 상태에 놓인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감정을 만든다. 자기 비하의 일종, 열등감.
사회에 녹아든 우리는 비교하는 행위에 익숙하다. 이 음식보다 저 음식이 낫고, 이 영화보다 저 영화가 낫고, 이 옷보다 저 옷이 낫고. 기호를 가르는 비교는 괜찮다. 자신의 취향을 형성하는 과정이니까. 그러나 자기 자신과 타인을 비교선상에 두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쟤 이번에 공모전 입상했네?
나는 집에서 지원 하나도 못 받는데, 쟤는 아직도 용돈 타서 쓰네?
쟨 성격 좋아서 주위에 사람도 많네.
열등감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에게 없는 것이 타인에게 있다고 느낄 때. 게다가 그 '없음'이 나의 흠이라고 여길 때. 그 흠을 없애면, 어쨌든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고 믿을 때.
―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