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는 글: 자기고백, 도서 '설이'와 함께
재능이나 능력과 관련한 열등감은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느껴진다. 관심사를 찾고, 나를 발전시키고, 능력을 개발하면 변화할 수 있지 않은가. 전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내던져지기 전부터 정해진 가족, 생활 수준, 재정 상태 등은 개인이 바꿀 수 없다. ‘당신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변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껏 좌절하세요’를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불평등은 대물림되고, 격차는 점점 더 가파르게 벌어진다. 이때, 방향을 잘못 잡으면 만물을 탓하며 그 자리에서 땅굴 팔지도 모른다. 지하수까지 뚫으려는 땅굴 파기와 긍정의 바람에 힘입어 땅굴 벗어나기를 반복했던 사람으로서 최근, 인생 첫 좌우명을 만들게 도와준 도서 설이 이야기로 시작하고자 한다.
책 제목이 주인공 이름이다. 한국에 살아가는 열 세 살짜리 설이는 엄마도, 아빠도, 자매나 형제도 아닌 ‘이모’와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이모는 혈육 관계에서 나온 호칭이 아니라 위탁모를 친숙하게 부르는 호칭이다. 보육원에 버려져 쭉 그곳에서 살다가 두 번의 파양을 겪고 다시 이모 집에 돌아온 상태였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던 설이의 삶은 첫 번째 전환점을 맞이한다.
중학교 진학 전 마지막 6학년 2학기를 자신과 정반대인 학교에서 보내게 되었다. 원래 다니던 온곡초등학교와 달리 그곳의 아이들은 가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엄마와 아빠, 널찍한 집, 근사한 식사, 사방에서 쏟아지는 물질적 지원. 그들의 세상에서 부족함은 존재해서는 안 됐다. 벽에 아주 작은 구멍이라도 생기면 남들이 경탄할 만한 좋은 재료와 솜씨로 덮어야 하는 것처럼. 아니, 그런 일이 아예 생기지 않도록 매일 강박적으로 시멘트 칠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처음, 이 상황에 놓인 설이는 아마 당혹감, 약간의 짜증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에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강한 본능도 불탔다.
지지 않겠노라는 다짐은 망나니 같은 짝꿍 시현이,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고 따르는 곽은태 선생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더욱 커졌다. 설이는 시현을 미친 듯이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 부러움이 설이를 좀먹지는 않았다. 시현을 부러워하는 것과 별개로 설이는 자신은 묵묵히 자신 앞에 놓인 일들을 마주하고, 때로는 힘들어서 도망가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성장했다. 설이는 왜 모든 것을 다 가진 시현을 탓하지 않을까. 자신의 환경을 왜 미워하지 않을까.
답은 간단했다. 설이는 현재 자신이 놓인 상황과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그래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가며 참여할 수 있는 대회엔 모조리 나가서 상과 상금을 휩쓸고, 미친 듯이 쏟아지는 숙제를 어떻게든 다 해내려고 노력하고, 매일매일에 집중했다. 공부뿐 아니라 자신과 함께 살던 강아지 아코를 찾아가는 등 여러 사건을 유도리 있게 다루었다. 13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성숙하고 중심이 잘 잡혀 있는 아이였다, 설이는.
저 때의 나는 어떻게 살아왔더라.
나의 열등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집이다. 어렸을 때 집을 그리면 그 나이대 아이들이 그러하듯 네모난 몸통에 창문 두어 개와 그리고, 그 위에 세모 지붕과 굴뚝을 얹었다. 우리 집과는 너무 거리가 먼 모양새라서 상상화라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우리 집은 단일주택도 아니었고, 굴뚝이나 세모난 지붕도 없었고, 무엇보다 지상에 있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다 지상에 사는데 나만 반지하에 살았다. 눈치가 빨라서일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느꼈다. 가난은 내게 창피한 것이었다. 싫었다. 우리 집도, 우리 엄마도.
분노의 화살이 왜 엄마를 향한 것은 아마 가장 쉽다고 느꼈기 때문일 거다. 엄마는 항상 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급식 배급도 돕고, 뒤 청소도 하고, 불편한 모임도 나에게 도움 될 정보를 얻기 위해 나가고, 일하던 중에 나온 거라 눈치가 보이면서도 꼭 짬을 만들어 담임 선생님과 상담할 시간을 만들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처럼 눈치가 빨랐다. 그런데 시야가 무척 좁았다.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보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며 없는 것은 왜 없는지 억울해했다. 생각은 그대로인데 몸은 자라났다. 성인이 되고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계기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느꼈다. 내가 괜한 화풀이를 했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충분히 자란 줄 알았다. 아니었다. 정말 오랜만에, 강한 열등감을 느꼈다.
어느새 20대의 중간 지점, 스물다섯에 선 나. 아직 대학교 졸업을 안 했다. 스무 살 때 처음 들어갔던 대학은 두어 달쯤 다니다 관뒀다. 성에 차지 않았다. 나는 더 잘난 사람일 텐데. 수능을 다시 보는 데 1년, 휴학 1년, 총 2년이 늦춰져 아직 학부생 신분이다. 두 번째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다 재수생이었다. 재수학원 이야기를 꺼내는데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학원비며 식비며 한 달에 드는 비용이 백만 원. 반년을 다니면 육백. 물론 내가 하고 싶다면 어떻게든 집에서 도와줄 것을 알았다. 하지만 혼자 하겠다고 했다. 돈 걱정하며 뱉을 한숨 소리를, 돈 들인 값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늦게 학교에 들어와 이제 2학년인 친구가 반수를 고민했다. 그러더니 하겠다고 결정 내렸다. 고민을 거듭한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친구에게 돈은 전혀 걸림돌이 아니었다. 집에서 금전적 지원과 따뜻한 지지를 잔뜩 보내줄 테니까. 실제로 그러했다. 친구는 딱, 자기 자신만 잘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삶이 너무 쉬워 보였다. 나는 스무 살 때도 한참을 참다가 말한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여전히 흠을 잡는데, 졸업할 나이가 되어서 다시 학교에 간다는데도 군소리 없이 오히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지원해준다니.
괴로웠다. 힘듦은 누구나 겪는 게 아니라고 느꼈다. 누구의 삶은 너무 쉽고, 누구의 삶은 너무 어렵다. 이때, 우연히 읽고 있던 책이 설이였다. 당시 내가 했던 생각을 똑같이, 곽은태 선생도 했었다.
"나는 시현이를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그 아이를 이해할 수는 없었어. 자꾸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 시현이에게 겹쳐 보였거든. 내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고 어머니는 허드렛일하며 나를 키웠지.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내 학비를 내 손으로 벌면서 살았어. 나는 시현이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론 참을 수 없이 답답한 거야. 저 아이는 좋은 학교에 다니고 과외 선생님까지 있는데 이렇게 쉬운 수학 문제를 틀리다니. 제 방 가득히 책이 있는데 읽지 않는다니. 외국에서 온 원어민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우는데 영어가 싫다니. 나는 그 모든 걸 혼자 힘으로 다해냈는데, 이 아이는 이렇게 서투르다니!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단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났고, 그 아이가 점점 미워졌던 거야. 그래,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미워했단다."
몇 시간 동안 이 페이지를 뒤로 넘기지 못했다. 생각이 자꾸만 이어졌다. 세상은 태초부터 불평등하다. 나는 왜 불리한 환경에서 태어났을까. 쟤는 아닌데 왜 나는. 내가 저런 환경이면, 쟤가 나 같은 환경이면 상황이 아주 달랐을 텐데. 내가 쟤라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미 하고 있을 텐데. 내가 쟤라면. 나였다면.
괴로운 생각은 이어졌지만, 해결 방법을 몰랐다. 나와 비슷한 인물이 나오는 이 책의 결말이 나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책을 꾸역꾸역 읽어냈다. 설이의 독백. 여기서 다시 한번 손을 멈추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의미 없는 덧셈과 뺄셈을 무한히 반복하곤 했다. 나에게 부모가 있었다면, 나에게 곽은태 선생님처럼 훌륭한 부모가 있었다면, 나에게 기부금이 없었다면, 나에게 그 음식물 쓰레기통이 없었다면. 가능하지도 않은 덧셈뺄셈에 병자처럼 집착해, 날마다 셈이 달랐다. 어떤 날은 어차피 부모도 없는데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가 어떤 날은 부모가 없으니 다른 건 하나도 밑질 수 없다고 발악했다. 셈이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날은 크게 밑지고 어떤 날은 적게 밑졌다.
이 의미 없는 덧셈뺄셈을 나는, 왜 하게 되었을까.
그런 말을 본 적 있다. 열등감은 내가 아닌 타인에게 집중했을 때 생기는 감정이라고. 나는 왜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어려울까?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 나는 평소 상상을 많이 하는 터라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를 자주 떠올리는데, 이 모습은 현재의 내가 만들 미래라고 보기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현재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이상으로 가기 위해선 지금의 문제, 즉 현실의 벽을 부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벽은 내가 만들거나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라서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게서 찾을 수 없던 원인이라서, 화살의 방향은 외부로 향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문제라고.
분노로 꽁꽁 싸맨 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리숙하고 솔직한 감정이 보인다. 나를 사랑하고, 아끼고, 잘 되었으면 하고, 좋은 것을 얻길 바라는 마음. 그렇다. 나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기 때문에 바람은 클 수밖에 없고, 지금 이것을 현실로 가져오기엔 내가 터무니없이 미약하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집중이다. 지금, 당장 내가 시작할 일 찾아보기. 목표를 낮추라는 의미가 아니다. 상상은 거대하고 비현실적이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실제 상황으로 만들기 위해서 현실의 나를 갈고 닦자는 제안이다.
생각은 쉽다. 할 일을 찾아서 하는 것보다 이미 충분히 가진 것처럼 보이는 자를 욕하기는 더욱더 쉽다. 그런데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정작 내가 중요시하는 나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내 길을 걷지 않고 타인의 길에 침범해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격이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길이 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길과 맞닿아 동행할 수도 있고, 그러다가 그 길이 둘로 나뉠 수도 있고, 방향을 잃을 수도 있고, 샛길을 만들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길은 자유롭지만 하나의 원칙이 있다. 나의 길에는 내가 있어야 한다. 당신도 자기 스스로 멋진 사람이 되길 누구보다 바라왔을 것이다. 이제는 그 열망을 인지하고 당신의 길을 걸어 보자.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등감은 더 당신을 괴롭히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일종의 신호탄이다. '당신, 지금 다른 사람을 당신 길에다가 끌어다 놨어. 가장 소중한 당신을 왜 내팽개쳤어. 제자리로 돌려놔.' 따끔하게, 당신의 현재 상태를 일러주는.
여기까지, 오래도록 나를 괴롭혀 온 케케묵은 덩어리 하나를 뱉어냈다. 극복이라는 표현은 쓰지 못하겠다. 때로 이 덩어리는 무얼 하기도 전에 나를 집어 삼키고 마니까. 그러나 인지하고, 인정하고, 뱉은 것에 위안을 얻었다. 시작한 이상 시작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순 없다. 앞으로 나아가다가 뒷걸음질 쳐도, 결국 출발점이다. 출발점 이전은 없다. '아무리 뒤로 걸어도 출발점'이라는 안전장치 덕분에 나는 오늘도 걸어보련다. 고정관념이 된 신념을 이리저리 건드려 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