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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Nov 17. 2022

1989!

이야기의 시작


하늘이 눈이 부시게 시리던 1989년 초여름이었다. 나는 신촌역에서 연세대학교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 속에 빠져 사느라 길거리 한 번 돌아보지 않던 성격이었는데 그런 나도 그날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학생들로 북적이던 거리는 한산했고 전경들도 아닌 군인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홍익문고를 거쳐 독수리다방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저기요.”

고개를 들어보니 군인이었다. 말끔한 군인의 얼굴보다는 그 어깨 너머 길게 솟아있던 총구가 눈에 들어왔다.

“여긴 왜 오셨습니까?”

'여긴 왜? 길을 가고 있는데? 대학교 앞의 큰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왜라고요?'

물론 나는 그렇게 묻지 못했다.

1989년. 또래보다 시대조류에 둔한 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지만 1987년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치과 가는데요.”

나는 보기 싫어서 꾹 다물고 다니던 입을 벌려 치아 위의 철테가 잘 보이도록 말을 했다.

나는 치아 교정을 하고 있었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부정교합이었다. 지금은 일반 병원에서도 교정을 하지만 그 당시에 치아 교정이란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대학병원에서나 할 수 있다고 해서 나는 연대 세브란스 치과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세상 고민 다 지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학교 운동권 선배들에게 나는 투명인간이었고 시대의 즐거움을 쫓는 동기들에게 나는 고리타분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나는 한없이 약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던 친구 하나가 운동권의 수뇌부였다. 하루는 그 친구가 걱정돼 물었었다.

"혹시 네가 잡혀가면 내가 뭘 해줘야 해?"

"난 잡혀가도 금방 풀려날 거야. 신경 쓸 거 없어. 문제는 내 입에서 나오는 사람들이겠지. 그래서 어쨌든 나도 잡혀가면 안 돼."

그 당시에 대학생들 사이에서 몰래 전해지던 비디오가 있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비디오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필름이었다. 궁금해서 보여달라고 했더니 친구가 말했다.

"소려야. 넌 감당 못해. 보지 마. 너 그대로 무너질 거야. 누가 보여준다고 해도 보지 마."

같은 부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친구의 염려와는 달리 그 누구도 나에게 그 비디오를 보여주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마흔 살이 넘어서야 그 장면들을 보게 되었다. 그날 나는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고 몇 날을 악몽에 시달렸다.


그렇게 나는 내 속에 빠져 살고 있었고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뿜어내고 있었다. 내가 영화 '1987'의 김태리는 아니었지만 수십 명의 전경들 사이를 걸어 다녀도 누구 하나 나를 검문하겠다고 나선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젊은 군인이 향하는 시선을 따라가는 순간 그 답을 알게 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군인은 내 가슴팍을 보고 있었다.

가슴 가운데에는 큰 그림 하나가 있었다. 그 그림에는 깃발 하나가 그려져 있었고 그 깃발에는 대동제라는 글씨가 빨갛게 적혀 있었다.

학교 학생회에서 팔던 티셔츠였다. 회색 티셔츠에 박힌 그림이 예뻐서 샀다. 그림에는 20 명쯤의 젊은이들이 각자의 고뇌를 얼굴에 담고 있었다. 첫눈에 봐도 모든 청춘들의 개성이 잘 표현된 잘 그린 그림이었다. 그들 손에 펄럭이는 깃발은 생동감이 넘쳤고 대동제라는 글씨는 내 가슴에 콕 박혀 있었던 것이다.


 또래로 보이는 군인의 얼굴에 갈등이 스쳤다. 톡 치면  나가떨어질  같은 여학생과  여학생이 입은 티셔츠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같았다.


"아니, 이 보세요. 군인 양반. 내가 아무리 미련해도 저기 학생들 모임에 간다면 벌써부터 이 티셔츠를 입고 가겠습니까? 가서 갈아입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난 입을 벙긋할 수도 없었다. 더 미련해서 이런 날 이 티셔츠를 입고 병원에 간다고 나섰으니까.


(라떼 한 잔 코너! 그 당시에 대동제, 대학교 축제 끝에는 학생들이 나와서 행진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산 그 티셔츠는 주로 운동권 학생들이 입고 다니던 분위기의 옷이었고요. 운동이란 걸 모르고 살던 제 친구들 4 명 중에 그 티셔츠를 산 사람은 저 하나였습니다.)


같이 가시죠.”

군인은 티셔츠로 마음을 굳혔다. 나는 덜덜 떨면서 수백 번 그 길을 지나다니면서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골목으로 끌려 들어갔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군인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한 사람이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옛날 포졸들에게 끌려 사또 앞에 가는 양민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곤장 치는 형틀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른쪽 골목 너머로 학생들이 닭장이라고 부르던 전경차가 보였다. 그 속으로 끌려 들어가면 전경들 말투부터 달라진다고 했는데…, 그곳에 들어가면 무엇을 조심해야 한다고 오빠가 말했었는데….

축제 때 자신의 대학교에 엄마와 나를 불러놓고 자신은 데모하는 학생들 앞에 서느라 사라졌던 오빠의 말을 되새겨보았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귀 담아 둘 걸, 내가 그곳에 갈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터라 귀 기울여 듣지 않았었다. '오빠, 나 무서워' 하려다 괜히 오빠까지 곤란해지겠다 싶어져서 마음속 소리까지 지워버렸다.


여전히 다리를 꼰 군인이 삐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보다 나이가 기껏 3, 4 살이나 많을까 싶은 군인이 말은 50대 아저씨처럼 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그 군인은 아마 육사를 갓 제대한 소위나 중위쯤 되었을 것이다. 눈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 장교는 나를 끌고 갔던 군인이 내 병원 카드를 보여주며 뭐라 중얼거릴 때에도 그 칼날을 나에게 겨누고 있었다. 그러다 소위나 중위였을 그 군인의 눈이 갑자기 닭장 쪽과 나 사이를 오고 갔다.





너무 긴 것 같아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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