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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Nov 15. 2022

화곡동에서 청담동으로

이사가게 된 사연

"엄마, 나 이제 못 다니겠어."

가방을 책상에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이번엔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란 걸 아셨는지 엄마가 옆에 앉으셨다.


나는 작은 신문사에 다니고 있었다. 사무실은 고속터미널 근처에 있었다. 그 당시 집은 화곡동이었고 때는 거슬러 올라가 1993년이었다.

신문사는 그냥 내 글을 쓰고 싶다고 선택한 직장이었다. 과학 관련 전문지라서 내 전공과도 맞았다. 거기에 엄마의 조건과도 부합했다. 직장 상사들이 점잖다는 것이었다.

"회사 나가면 별꼴 다 보는데 너희 신문사는 그런 사람들이 없잖아."

내가 전해드린 말이 전부였는데 엄마의 믿음은 어디서부터 형성된 것일까? 다른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엄마 말씀이 옳긴 옳았다. 거기에 내 직업 특성상 만나는 사람들이 교수니 의사니 기자들이란 것도 한몫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 당시에는 화곡동에 전철도 없었다. 조금만 늦잠을 자도 길에서 오고 가지 못하고 서 있어야 했다. 오목교역에서 그것도 만원 버스 손잡이 하나에 매달려 한 시간을 서 있을 때에는 버스에서 뛰어내려 오목교 확장 작업을 위해 한 삽이라도 흙을 퍼 나르고 싶었다.


거기에 내 출입처가 환경처였는데 환경처가 환경부로 격상되면서 잠실에서 과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화곡동에서 출발해서 두 시간여만에 회사에 도착하고 일주에 두 번 정도 과천으로 가는 날에는 길에서만 반나절 이상을 보내야 했다. 취재지는 서울 곳곳, 고려대를 거쳐 여의도 중소기업진흥청까지, 서울 대학병원에서 강남 르네상스 호텔까지. 기사를 쓴 시간보다 길에서 흘린 시간이 더 많았다.


"엄마, 나 그냥 그 출판사 팀장님한테 전화할래. 팀장님이 올 생각 있으면 전화하라고 했어."

신문사에 가기 전에 집에서 가까운 합정동 한 출판사에서 면접을 보았었다. 지금도 들으면 알만한 출판사였는데 급여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출판사에 가면 남의 글만 교정을 보게 될 것 같았다. 신문사에 가면 내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했다. 수습기자는 허구한 날 남이 쓴 기사를 교정하고 보도자료 옮겨 적기 바쁘단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 그러자. 그럼!"

엄마가 눈을 반짝이며 무릎을 탁 치셨다.

"응, 엄마. 내일 출판사에 전화하고 신문사 정리할게."

"아니, 네가 신문사를 관둘게 아니다. 이사를 가자."

넹?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의 눈에서 뿜어 나오던 불꽃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아니, 엄마. 그게 아니고."

엄마는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굳은 발걸음을 옮기셨다.

"저기요? 엄마? 김여사~. 김여사 님."

내 부름은 공허했다.


다음날 엄마는 회사 앞으로 찾아오셨고 우리는 집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다음 날 계약을 하고 2주 만에 이사를 했다. 살던 집보다 평수를 10평 줄여야 했고 엄마 용돈 창구였던 작은 상가를 팔아야 했다.

엄마가 이사까지 감행하며 지켜주려 했던 신문사를 나는 3년을 채우지 못한 채 관둬야 했다. 결혼을 하고 입덧이 심해 다닐 수가 없었다. 남편이 그 당시에 공부를 하고 있어서 학위를 받고 직장을 구할 때까지 시댁에 살았는데 시댁은 홍은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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