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놀러 왔다. 내 속 전부를 드러내고 나 글 쓴다고 말한 친구다. 즐겁게 저녁을 먹고 내 방에 앉았다.
"소려야, 그림 그리니?"
"응, 머리 아플 때 잠깐씩."
"이거 잘 그렸다."
"유튜브 보면서 따라 그린 거야."
"이 것도?"
"그건 **이가 포르투갈에서 사 온 냉장고 자석 보고 그린 거고."
"잘 그렸는데."
"그냥 시작했다가 일주일 꼬박 걸렸지, 아마."
"소려야. 너 그림 그려라."
"뭘. 그냥 베끼는 수준인데."
칭찬을 잘하는 친구였다. 내가 무엇을 해도 잘한다 잘한다 해주는 친구였다. 그런데...
"소려야. 글 쓰지 말고 차라리 그림을 그려."
친구의 말에 세상이 달라 보였다면 '난 아직은 어린가 봐, 그런가 봐' 라는 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나는 씩 웃으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소설이 정말 별로였나 보다."
친구에게 내 소설을 보여주기까진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10여 년을 준비하고 겨우 써내고 수정에 수정을 거치다가 브런치에 내놓았던 '인생사냥꾼'이었다. 몇 안 되는 친구분들의 '잘 썼다' 응원에 뿌듯했던 글이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잘 썼다 보다는 더 잘 쓰라는 격려라는 것을. 하지만 친구의 말은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냥. 넌 글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 같아."
내가 피카소도 아니고 반 고흐도 아니고 끄적대며 옮겨 그린 그림이 내가 써 온 글보다 낫다니. 그건 칭찬이 아니었다. 그건 나도 알고 친구도 알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런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서도...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난 이젠 연륜이란 것이 있는데. 아무리 친한 친구의 진실 어린 조언일지라도 내가 그리 쉽사리 글을 놓겠는가. 난 상처 따위는 안 받아, 난 글을 쓸 거야.'
겨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열심히 써야겠는데."
"그냥 그림 그려. 그림은 너 정말 잘 그린다."
'이걸 콱 그냥.'
서둘러 침대를 정리하고 자리에 누웠다. 남편이 자리를 내준 옆자리에서 친구는 가늘게 코를 골았다. 그 소리가 밤새 '너 글 쓰지 마' 로 들렸다.
친구가 돌아가고 쓰고 있던 소설을 탈고했다. 내가 다른 세상을 만들어냈다는 뿌듯함에 잠시 행복했다. 잘했다고 난 그럴 자격이 있다고. 혼자 앉아 나를 축하하고 내 기분에 흠뻑 취했다. 잠시 그래도 된다고 머릿속으로 파티를 하고 축배를 들었다. 나를 쓰다듬어주었다.
"잘했다. 소려야."
그러다 예정되어 있던 친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소려야, 글 쓰지 마."
그 말은 돌멩이가 아니었다. 잔잔한 물결의 파문이 아니었다. 칼날이었다. 보이지도 않게 잘게 쪼개진 쇳조각들이 온몸에 뿌려진 것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저그럭 저그럭 쇳조각들이 발바닥을 파고들었다. 온몸에서는 보이지 않는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하얀 어둠. 눈조차 뜰 수 없는 찬란한 어둠.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프다고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어리광이나 부리는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글 쓰는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적어도 곱게 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마저 놓아버리면 난 사람이 아닐 것 같았다. 심통 많은 늙은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투덜거릴 것 같았다. 세상이 나를 못 알아본다고 원망만 하다가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마지막 끈을 붙잡았다. 하지만 하얀 어둠. 그 속에서 나는 몸부림치고 있다. 제대로 된 작가가 되어서 친구에게 멋진 '복수'를 해야지 다짐도 했다. 하지만 하얀 어둠.
써 놨던 글들을 돌아봤다. '아! 이래서 글 쓰지 말라고 했구나.' 내가 글을 쓰면 안 되는 수만 가지 이유가 내 글 속에 있었다. 컴퓨터 자판을 누를 때마다 손가락이 아파왔다. 저그럭 저그럭. 칼날들이 살 속을 휘젓고 다녔다.
하하하. 적고 보니 난 아무래도 괴기소설을 써야 하나보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이야기를 알고 있지.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 이야기... '
어른이라면 희망을 이야기해야 할까? 인생은 그런 거야, 하면서 다시 일터로 나가야 할까? 난 희망을 노래하면서 일터로 향하는 어른은 못 될 것 같다. 사회가 만들고 사회의 틀에 가둬버린 어른 따위는 되고 싶지 않다. 그럼 어쩌지? 피카소를 꿈꾸며 그림을 그릴까? 세상을 원망하면서.
저그럭거리면서 몸을 일으켜 본다. 궁금해졌다. 어떤 어른이 어른일까? 곱게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나란 인생, 어떻게 굴러갈지. 온몸에 칼날이 쑤셔대지만 웃어본다.
"야, 내가 네 말 한마디에..."
다 접어버리자. 써야겠다. 궁금해서 써야겠다. 나란 인생,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어떻게 하고 살아갈지 궁금해서...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