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한 편을 탈고했다. 원고지로 307 쪽. A4 용지로 43 쪽.
숫자 같은 거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런 숫자에는 나를 칭찬해 주기로 한다.
"썼다. 장하다."
나를 하루라도 온전히 토닥이고 싶었다.
글의 시작. 초안을 쓰고 다시 시점을 바꿔서 플롯을 바꿨다. 초안을 두 번 쓴 글이었다. 나에 대한 의심은 이때 가장 심하다. 외줄에 나를 올려놓고 소리치는 것 같다.
"버텨. 버티라고."
퉁퉁, 출렁이는 줄에 하루에도 수십 번 뛰어내리고 싶다. 머릿속에서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앉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느 날은 웃어대기만 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은 울기만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옮겨 적고 때로는 그들과 같이 울고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딱 '미친~'이다. 그렇게 초안을 마치고 나면 온갖 자괴감을 끌어안아야 할 시간이다.
첫 번째 교정. 어느 코미디언의 '인간이 아니무니다'가 서라운드 스피커로 들린다. 머릿속 사람들의 원성도 심하다.
"내가 그렇게 좋은 이야기를 해줬는데 이게 뭐냐?"
"네. 죄송합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눈을 질끈 감고(어떻게 눈을 감고 글을 읽지 싶지만 질끈 감아야 한다. 어쩔 때는 글을 보면서 정말 눈을 감고 있다.) 끝까지 글을 읽어 내려간다.
손대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라고 어느 작법 서에서 그랬는데 나는 그렇게 못한다. 자판 위에 손은 올라가 있고 중얼대는 머릿속 사람들 성화에 글을 덧대고 칼을 댄다. 인심 좋은 사장님처럼 몰래 숨겨놨던 특수부위를 꺼내주기도 하고 비계 덩어리를 뭉텅 잘라내기도 한다. 잘라낼 때는 아직 어설퍼서 두렵다. 맛있는 살이 섞여 있을까 봐 버리지도 못하고 통을 하나 옆에 놓고 다듬는다. 이 통에 있는 글들은 나중에 보면 정말 가관(可觀)이다. 숨겨놓고 나만 보기로 한다.
여기까지 하고 나면 글이 형태를 갖추는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있으면 버려둔다. 숙성의 시간을 갖는다. 여행을 가기도 한다. 티브이를 종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책은 읽지 않는다. 긴 글을 쓰면서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분들의 생각이나 문체가 내 글에 스며들까 염려스러워서다.
둘째. '글을 쓰려면 이 정도는 써야지, 내 글은 글도 아니다'라는 절망에 빠지기 싫어서다.
(글벗분들이 책을 내셨는데 아직 못 읽었습니다. 간직해 놓았으니 이제 읽으려고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출간하신 거 축하드려요.)
그렇게 놀다 보면 어느 순간 부족한 부분들이나 중요한 부분들이 생각난다. 그때는 달려가 컴퓨터를 켠다. 화면에 불이 켜지고 비밀번호를 쳐야 하는 시간이 나무늘보 숨쉬기 같다.
3차 교정에 들어간다. 어떨 때는 구조가 흔들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다시 초안을 쓰는 것 같다. 방안 구조를 바꾸듯 모든 가구를 꺼내고 잡동사니들은 한 귀퉁이에 쌓아둔다. 가구 같은 큰 덩어리들을 다시 배치하고 나서 자잘한 일화들을 배치한다. 걸리적거리지 않게 동선을 잘 배치해야 한다. 반복되는 글귀들은 잘라버리고 귀하고 특이한 글귀들은 잘 보이게 배치해야 한다.
다시 숙성의 시간. 가볍게 차를 마시던가 방 안을 걷는다. 빙글빙글 돌다 보면 원심력으로 튕겨 나오는 글귀들이 있다. 잘라내던가 보안을 해야 한다. 다시 빙글빙글 돌고 돈다. 그렇게 4차 교정을 두세 번 본다. 그러고 나면 전체적인 흐름이 부드러워진다.
이제 5차 교정. 여기서부터는 조사나 글의 흐름만을 본다. 여기서 플롯을 바꾼다면 이 글은 포기하게 된다. 내 서랍에 쌓인 많은 글들이 여기서 뒤죽박죽이 돼버린 글들이다. 여기까지 왔다면 끝을 맺는데 집중해야 한다. 머릿속 사람들이 달려와도 내쫓는다.
"일단 끝을 봅시다." 다독인다.
6차 교정. 정말 오타만 본다.
7차 교정. 욕지기가 난다. 신물이 난다. 말이 7 차지, 중간중간 정리한 것까지 치면 70번은 봤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게 그렇게 본 글인데도 슬플 땐 슬프고 기쁠 땐 기쁘다.
자, 탈고. 이제 그들의 세상이 완성되었다. 이 미숙한 손을 빌려 태어났지만 형체도 띠고 나름 감동이 있다. 뿌듯하다.
"장하다. 소려야. 하하하!"
이렇게 끝나면 좋을 텐데. 뭔가 찜찜하다.
'사실 확인이 부족한 게 아닌가? 정말 그 사람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내 글투가 이런 소재하고는 안 어울리지?'
밤새 내리는 빗소리에 잠을 설쳤다. 천둥번개가 치고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 잠을 털고 앉아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더듬는다.
"이제 그들은 내 곁을 떠났다. 그들의 세상을 의심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