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에 갇힌 글쓰기와 출판이라는 지적 '패션(fashion)'
독서 인구가 계속해서 줄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조사 자료에 의하면 1년간 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 비율이 2011년 약 75%에서 2021년 기준 약 45%라고 한다. 성인 절반 이상이 1년 간 단 한권의 책도 읽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 놀라운 사실도 아닌 게, 각종 스마트 기기와 OTT서비스가 활성화된 이후로 독서 인구 저하는 계속해서 문제시되어왔다. 콘텐츠 자체가 지면과 텍스트에서부터 스마트 기기와 이미지, 영상으로 확장되고 있으니 자연스러운 흐름일 수밖에. 그 자체 문제적 특성을 지니는 현상이라기보다는 기술이 인간 존재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사회에서 피해 갈 수 없는 변화라는 것이다. 천천히 가는 것들에 쉽게 분개하는 저조한 인내심,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집중력은 기술의 편리함과 동시에 현대 사회가 떠맡은 부수적 문제들이다. 온순한 생각일 수 있겠다만, 인류가 발전해 온 양상을 보아 이러한 문제들은 차차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보다 문제적 성격을 갖는 것은 저조한 독서 인구 비율에도 불구하고 신간은 계속해서 늘고 있다는 기이한 현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엔 주변에 저자들을 찾아보기가 참 쉬워졌다. ‘~해도 괜찮아’, ‘OO의 연애 참견-n만 구독자 유튜버가 전하는 연애에 대한 쓴 소리’, ‘n만 조회수를 부르는 SNS 글쓰기.’ ‘삼형제의 창업 비결-치킨집에서 대기업까지’, ‘SKY선배들의 공부 테라피’ 등등. 주로 위로나 조언을 전하는 에세이로 심리, 교육, 사회, 경제, 경영 등등 분야도 다양하다.
‘누구나 책 쓰는 게 뭐가 어때서? 오히려 출판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아졌으니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게 아닌가?’
맞다. 정당한 분석이다. 다만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렇다면 당신은 책과 글의 본질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책과 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찰스 벡스터(2007/김영지 역, 2016: 136-137)는 『서브텍스트 읽기』에서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현대인들의 글쓰기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에 서점을 가보면 글쓰기 책과 자기계발 책이 같은 섹션으로 합쳐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격려나 위로의 말을 포함한 일부 글쓰기 책, 또 일부 자기계발 책은 글쓰기를 자신을 발전시키는 활동으로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소설 쓰기에 평생을 바치는 일이 누군가를 어떤 식으로라도 치유했는지 의문이 든다. 키이츠(Keats)는 작가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들이 병자인지, 의사인지 알아내는 데 할애한다고 말했다.
위 문단에서 찰스 벡스터는 글쓰기와 자기계발이 연결되는 현상을 언급하며 작가들의 글쓰기는 자기계발이나 ‘치유’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찰스 벡스터의 이러한 비판이 ‘과잉 출판’의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책과 글쓰기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반문할 지점을 명확히 짚어 준다고 생각한다. 지금 쏟아지고 있는 글들은 타인을 위한 글인가 자신을 위한 글인가? 진실을 위한 글인가 ‘출판’을 목적으로 하는 글인가? 저자가 익명이라도 상관없는 글인가, 아니면 본인의 약력에 기재되기 위한 글인가? 주장이나 의미 전달을 위한 글인가 자기계발을 위한 글인가?
물론 모든 글쓰기 과정이 과거 작가들처럼 각고의 수련을 수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분명 가치 있는 행위이며, 특히 출판까지 해냈다는 것은 더더욱 대단한 성과이다. 찰스 벡스터도 이야기하듯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물질이 아닌 정신에 전념하는 일은 적지 않은 에너지와 강한 의지가 필요”(Ibid)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바로 그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해?”라는 등의 걱정 섞인 우려와 질문들은 이들이 지닌 의지의 단단함에 대한 모종의 보증표가 된다는 것이다. 예술과 기예로 말미암아 “쓸모”가 가져다주는 정신적 허탈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이들이 지닌 목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가난이나 실직을 경험해보았을 확률은 적다(Ibid). (이토록 중산적인 글쓰기라니!)
어느 순간부터 책보다는 출판이라는 '성과'가, 듣기와 읽기보다는 말하기와 쓰기가 더 권위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출판은 엠블럼이 아니고, 글쓰기는 자기계발이 아니며, 책은 패션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책마저도 자본(능력주의)과 유행의 구조로 끌고 들어오고 있다. 공들여 탐구한 진실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책을 썼다’는 개인적 결과 값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저자들은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내 책이 어느 진열대에 위치해 있는지, 모바일 yes24 랭킹에 내 책이 몇 위의 성과를 내고 있는지 확인하기 급급하다. 독자들은 오피니언과 비평에 대한 활발한 토의보다 책을 샀다는 인증에 더 열의를 보인다. 브론테 자매는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글을 쓴다”라고 이야기한 바가 있다. 지금의 저자들은 어떠한가?
더 많이 읽고 더 적게 써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는 자의 열정은 격려받아 마땅하며, 읽지 않을 자유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존중받아 마땅하다. 내 요청은, 진실된 대화와 의미는 자리를 잃어 가는 와중, 정제된 의미와 진리를 읽어 나가는 독서는 줄어들고 자기계발을 위한 글쓰기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멈춰 서서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글은, 특히 출판되는 책들은 결코 쉬운 다짐, 개인적 욕망이나 명예에서 비롯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 지나치게 보수적인 걸까. 책이 가진 권위가 이토록 쉽고 빠르게 무너지기에는 역사적으로 책과 글을 통해서 우리가 이루고 나눠온 것들이 너무 많다.
*본 글은 동아일보 오피니언 ‘2030세상’ 「독서 인구는 주는데, 신간은 느는 사회」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원글 출처: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21206/116862473/1
사진출처: https://m.khan.co.kr/opinion/yeojeok/article/202011022033005(필자가 생각하는 공적인 글의 힘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기에 가지고 왔습니다.)
**Katherine Hayles(2007)는 『How we think』에서 현대의 디지털 미디어에 의한 집중력의 변화를 깊은 주의력(Deep attenion)에서 과잉 주의력(Hyper attention)으로의 이전이라고 지칭한 바가 있다. 그녀에게 집중력 변화는 집중력의 손실이나 결함(deficit)이 아니라 세대적 변화이다. 물론 헤일즈의 이러한 정의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들도 존재하나(Stiegler 등), 그들마저도 대부분의 경우 디지털 미디어 기술로 인한 변화들이 비가역적이라는 점에는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일기 등의 개인적 글쓰기가 그러하다. 일기나 감상문 등의 개인적 글쓰기는 기록과 기억을 통한 반성이다. 개인적 글쓰기와 공적 출판물은 다르다. 즉 개인적 반성과 공적 주장, 설명, 연설, 출판을 전제로 하는 수필 등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신간’은 후자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