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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수 Feb 08. 2022

실패했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잖아

창업은 실패했지만 인생은 계속되니까


<56세. 여자. 미혼. 공학박사. 대학에서 조교 포함 강사 등 경력 10년. 관련 사업 벤처 창업 후 3년 만에 폐업. 현재 신용회복위원회 관리 대상>


열심히 살아왔을 그녀가 어떻게 일을 했고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무튼 취업을 하기 위해 우리 기관의 문을 두드렸다.


국민취업지원제도 참여자 중 고스펙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정부의 취업지원은 학벌이나 스펙은 상관없이 현재의 생활수준과 나이만 본다.


만 69세만 넘지 않으면 고령의 취업 희망자에게도 취업지원은 한다. 그 실효성 여부를 떠나서.


고용노동부와 보건복지부의 연령 기준은 약간 차이가 있는데 고용노동부에서는 고령자는 만 55세 이상, 준고령자는 50~55세 미만을 말한다.

자주는 아니지만 재산, 소득 기준 지원대상에는 소위 SKY 대학 출신, 심지어 해외 유학파들도 제법 있다.


노후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달리다가 덜컥 어느 날 노인으로 데려다 놓는다.


급여생활자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최대로 잡아 30년. 그동안에 수입 없이 살아야 하는 노후 30년을 준비해야 한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교육시키면서.


그래서 일하면서 사업도 생각해보고 재테크도 열심히 기웃거린다.


사업이 실패해도 재테크가 잘 안 돼도 50이 넘기 전이라면 재도전할 기회나 용기가 남아있겠지만 50이 넘어가면 그마저도 어렵다. 취업은 더 어렵다.


나이는 많은데 일을 해야 하는 경우는 자기 삶의 많은 부분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학벌이 아무리 좋아도 나이 앞에선 무용지물에 가깝다. 은퇴 전 대기업 임원이었어도 준비가 안된 노후는 건설 현장 막노동자와 동급이 된다.


고령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신체 능력은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반해 직업은 육체적인 노동과 더 가까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남자들은 지게차나 포클레인, 타일, 벽지, 건설 기능 훈련소로 몰려가고

여자들은 요양보호사, 조리사, 양장 학원으로 달려간다.

미용도 나이가 많으면 입직이 힘들다. 본인이 직접 운영을 하려고 하더라도 일정 기간 수습이 필요한데 그런 곳을 찾기가 어렵다.


고스펙의 참여자들에게 저런 사실을 알려주고 현실의 어려움을 말해주면 그 자신이 이미 알고 왔음에도 허탈한 웃음을 보인다.


"그것 외엔 안 되나요ᆢ"


위에 적힌 참여자도 그랬다. 차라리 창업 컨설턴트나 강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쪽으로 모든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해서 도전해보라고 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이제 그쪽은 쳐다보기도 싫습니다"였다.


오죽하겠나 싶었다.

사업이 안되기 시작할 때부터 폐업의 결심이 선 날까지의 심적 고통을 누가 알겠는가.

그래도 버텨보겠다고 안간힘을 썼을 테고 그 와중에 인간에 대해 실망하고 차디찬 배신감을 목구멍으로 삼켜야 하는 순간이 왜 없었겠는가.

자기 손으로 일구었던 희망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려야 했던 날에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끝이 안 날 것 같은 부채의 짐.

횡령이나 배임도 없이 직원보다 적게 급여를 받아가며 모든 걸 쏟아부었는데 뭘 그리 나쁜 짓을 했다고 이렇게 벌을 받나 싶은 생각에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창업에 실패해도 재도전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뒷받침이 있지만 당연히 그 혜택을 모두가 누릴 수는 없다.


실패 과정이 길어질수록 창업자의 정신적 손상은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지고 때로는 삶의 의욕과 의지를 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살아있는 고통이 죽는 고통보다 더 하다고 느끼는 순간 안타까운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도 저도 싫다는 그분에게 취미는 있으시냐 물었다.

커피를 좋아하신다며 어느 날 시판 커피처럼 손수 만든 드립 커피를 갖다 주기도 했다. 그분이 현실적으로 취업이 가능한 분야는 본인이 싫다시니 남은 건 자기 취미를 업으로 살리는 방법밖엔 없다.

상담과정에서 한 그분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제가 사업을 실패하고 여기까지 오는데 이런 상담을 받아본 적이 없고 내 얘기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동안 사무실을 어떻게 정리하고 부채는 어떻게 갚아나갈 것인가 하는 책임과 의무, 이런 것만 상담했지. 그 속에서 나라는 사람만 놓고 어떻게 살 것인지 상담해본 적이 없거든요."


실패한 사람을 '능력과 실력이 모자란' 사람처럼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냉정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야말로 버팀목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시스템 아니던가.


단 한 번의 도전이 실패로 돌아가면 재기불능이 되어버리는 것은 정말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안의 사람들이 가진 실력,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그것이 사회적 자원이 되고 발전의 동력이 될 것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한 번 실패해본 사람이 처음 하는 사람보다 잘할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과거엔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한 직장에 오래 근무하는 것을 최고라 생각했지만 요즘엔 그랬다간 노후에 안정을 기대하기 어렵다. 공부하고 일하면서도 부지런히 한 눈을 팔고, 열심히 다녀보고, 놀아도 봐야 한다.


요즘은 개인 콘텐츠의 시대 아닌가. 나이 들어 나의 뭔가를 팔아 돈을 벌려면 우선은 내가 풍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평범한 주부가 살림과 요리, 육아로 돈을 버는 시대다. 직장에 다니면서 배운 취미가 더 큰 부수입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지금 당장은 아웃풋이(취업률)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직업훈련지원이 일부로 집중되는 것도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요즘은 내가 사는 사회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커진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였으면

노후가 무섭지 않은 사회였으면


사업에 실패하고 오롯이 홀로 그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친구가 알려준 노래가 있다.

영화 첨밀밀의 ost였던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텅 비고 차가운 겨울 밤공기를 가르던 대리기사의 벨소리였다고 한다.

노래 가사와는 별 상관없는 그의 실패 스토리 때문인지 난 저 노래만 들으면 친구가 서 있던 그 겨울 밤거리의 쓸쓸함이 떠오른다. 전하지 못한 말이지만 하고 싶은 말은 고작 이것밖에 없다.

'실패해도 여기서 멈출 순 없잖아. 삶은 계속되니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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