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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수 Feb 19. 2022

여수(如水)

물처럼

자려고 누운 밤 친구로부터 톡이 왔다.

통화하고 싶은데 전화해도 되냐고.

알코올끼가 다분히 느껴지는 친구 목소리.


혀가 꼬여 발음이 뭉개지는데도 부득부득 별로 안 마셨다고 한다.

간간이 한숨 섞인 한탄을 내뱉으며 '이놈의 일.. 그만두고 싶다'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만 두면 먹고 살 일이 막막하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오직 버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친구는 백화점에서 물건을 파는 일을 하는데 사람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자주 힘들어했다.

사람이 주는 스트레스는 맞을수록 내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상이 깊어지는 것만 같다.




어떤 일이든 사람을 상대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은 없다.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교류하면서 나의 생활이 유지되므로.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경우는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들 말고는 보지 못했다.


사람에게 시달리는 감정 소모가 어디 일하는 과정에서만 생길까.

부모 형제 사이에도 있고 친구,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늘 감정의 부침은 있다.

다만, 일 속에서 만나는 사람과는 주로 위력에 의한 일방적인 주종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저 꾹꾹 참는 수밖에 없으니 문제다.


결국 인내의 끝은 그 모든 관계로부터의 탈피를 꿈꾸게 한다.

조용히, 반려동물이나 식물과 함께, 전원에서, 내 시간을 맘껏 쓰면서 누구의 간섭이나 감시 없는 무한의 자유시간을 동경한다.


그러나 그런 셀프 왕따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사람이 많지 않다. 빨리 파이족이 되고 싶지만 경제적 자유의 '그날'이 올 때까지 타협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받는 돈은 이 지긋지긋한 인간관계를 버틴 보상이야!'


내가 받는 돈이 그 스트레스를 충분히 보상한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견디는 힘이 좀 더 생기고

'이 돈 받으면서 이런 인간들한테 이런 대접을 내가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 당장 일에 대한 회의감에 빠져든다.


개인마다 '충분한 보상'의 정도는 다를 것이다. 돈을 더 준다고 해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기도 하고 돈 때문에 정신과 상담을 받아가며 버티기도 한다.


나는 어릴 때도 그랬지만 나이가 든 지금도 에 대한 현실감이 없는 편이다. 면밀하게 필요한 돈을 계산하고 그것을 만들기 위한 피땀 눈물을 기꺼이 흘릴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없다.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해방된 상태'라는 막연한 삶의 지표를 가지고 살다 보니 돈이든 사회적 지위든 일이든 사람이든 모든 것에 대해 딱히 절실한 애착이 없다.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취하고 버리고를 반복해왔던 것 같다.


남들이 보면 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치 부지런히 도토리를 주워 땅속에 숨기고 어느새 또 그것을 잊어버리는 다람쥐처럼 열심히 살긴 했는데 그다지 크게 남은 것이 없을 뿐이다.   


닥치는 대로 사는 것 같은 나의 삶에 대한 태도가 어디서 기인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기질이 그렇게 타고난 것 같다. 직업심리검사를 해보면 아무리 의도성을 가지고 검사를 해봐도 나의 '현실성'은 거의 제로(0)에 가깝게 나오는데 그걸 보며 참으로 과학적인 검사도구라고 생각한다.


노자가 말했나 장자가 말했나 모르지만 물과 같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릇이 생긴 모양에 따라 자기 모양을 바꿀 수도 있고 바위가 막아서면 그것을 피해 돌아가기도 하며

큰 물을 만나서는 무섭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그런 사람. 여수(如水)라는 내 필명은 여기서 빌려왔다.


불교에서는 인연법에 의해 주어지는 조건과 상황에 따라 어떤 일이든 받아들여 성심을 다해 그 일을 하라고 한다. 애초에 '나'라는 것이 없음에도 아상(我相)에 사로잡혀 이것저것 분별하지 말라고 한다.


기독교는 하느님이 가리키는 천국을 가기 위한 삶을 살라고 한다.

어찌 보면 목표와 계획이 있는 삶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살고 싶은 삶은 부자나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가 아니라 집착이 생기지 않을 정도의 생활인데 평범하게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니 이런 모순이 있나 싶다.


탐욕스럽지 않고 구차하지 않고 비겁하지 않고 차갑지 않은 삶을 갖추기 위해서는 치열한 쌓음과 비움이 있어야 어느 정도의 기초가 마련되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탐욕도 있어야 하고 구차하거나 비겁할 수밖에 없다.


먹을 것이 부족한 곳에 사는 다람쥐는 먹이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곳의 다람쥐보다 생존을 위해 기억력이 조금 더 좋지 않을까란 엉뚱한 생각 해본다.


상황과 조건에 맞게 자기를 바꿀 수 있는 유연함이 존재를 이어갈 수 있는 열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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