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앤 셜리, 'Anne with an E'의 앤 셜리
그린 게이블즈의 앤, 초록지붕의 앤, 빨강머리 앤.
앤 셜리(Anne Shirley)라는 이름을 듣지 않고 학창 시절을 보내기도 쉽지 않다. 책이나 영화, 애니메이션을 통해 줄거리를 완벽히 알고 있진 않더라도, 붉은 머리카락에 마르고 주근깨가 가득한 창백한 얼굴을 보면 '앤'이라는 이름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상상의 여지를 발휘하기 좋다는 이유를 들어 대합실이 아닌 기차역에서 매튜 커스버트(Matthew Cuthbert)를 기다리고, 2층 방만큼 높게 자란 흰 벚나무를 '눈의 여왕'이라고 불러주던 그 사랑스러운 꼬마 앤이 넷플릭스의 드라마로 돌아와 있었다.
(스포일러가 무척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앤 이야기의 매체는 책이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단어들로 가득 찬 '빨간 머리 앤', '에이번리의 앤', '레드먼드의 앤'까지, 세 편의 앤 시리즈는 나의 10대 시절을 앤의 화관만큼이나 다채로운 색깔로 덧칠해 주었다. 방향을 모르고 폭발하던 어린 감수성은 앤과 함께 섬세하고 다정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을 띄는 모습으로 발달했고, 앤의 표현을 통해 다가온 자연의 아름다움과 앤의 우정관에 빠르게 공명했다. 순수하게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좇고 갈망하는 앤은 과하고 순수하고 폭발적인 모습으로 나와 내 친구들의 우정을 물들였었다.
10년도 더 지난 그때의 꼬마 앤이 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민들레와 보라색의 이름 모를 들꽃을 머리에 꽂은 채로 넷플릭스에 나타나다니, 무료하게 채널을 돌리던 중 정말 홀린 듯이 에피소드 1을 눌렀다. 원작의 앤과 99% 일치하는 앤 셜리. 상상과 달랐던 단 하나의 요소는 목소리였지만, 그건 모든 사람들의 앤이 다를 테니까 차치하기로 했다.
0. 제목에 관하여-----------------------------------------------------------------------------------------------------
등장인물, 줄거리, 각색된 내용에 대한 얘기보다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건 제목이었다.
'Anne with an E'
이렇게 적절한 제목이라니! 원작에 충실한 디테일이 감동적이다. 앤이 마릴라 커스버트(Marilla Cuthbert)를 처음 만날 때, Ann이 아니라 끝에 E가 붙어 있는 Anne으로 불러달라고 당부하는 부분이 있다. 사실 Ann이나 Anne이나 한글로 표기하면 '앤'이니 차이점이 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실제로 Ann보다는 Anne을 발음할 때 부드러움과 세련된 느낌을 받는 게 사실이다. 앤은 아마 그 작은 차이점에 집중해 보다 고상하고 세련된, 앤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왕 같은' 느낌을 받았을 테고, 그 사소한 차이까지 느끼는 특별한 앤을 잘 이해한 제작진이 이런 제목을 지었을 것이다. 무척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요소.
1. 등장인물에 관하여
앤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내가 생각하는 앤의 모습 그대로였다. 너무 마른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날씬한 몸매에, 주근깨와 붉은 양갈래 머리, 창백한 피부.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앤을 완벽하게 그린 건 에이미베스의 눈동자였다. 앤이 열정적으로 말을 할 때마다 반짝이는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얼마나 완벽한지.
반면 길버트 블라이드(Gilbert Blythe)는 조금 과하게 잘생긴 면이 없지 않지만, 앤과 말을 섞어 보려고 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모습이나 앤을 위해 스펠링비 (spelling bee: 철자 맞추기 대회)에서 철자를 틀리는 모습이 너무 적절하고 애틋해서 호감을 이끌어 냈다. 앞으로 시즌이 진행될 때마다 한 뼘씩 자랄 앤과 호흡이 얼마나 잘 맞을지 기대되는 등장인물 중 하나. 진지한 눈빛이 길버트의 인물 설정과 잘 어울린다.
사실 아역이 중요한 작품이긴 하지만, 아역과 함께 하는 중년 배우들의 캐스팅이 엄청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마릴라 커스버트와 매튜 커스버트 남매, 그리고 레이첼 린드(Rachel Lynde) 부인까지. 실제로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존재할 것만 같은 예쁜 에이번리(Avonlea)와 함께, 그린 게이블즈를 잘 완성해 주었다.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다이애나 배리(Diana Barry). 앤과 함께 자라나면서 많은 걸 함께 하고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은 막역한 친구인 다이애나는 흑단 같이 검은 머리카락과 장밋빛 뺨을 가졌다고 묘사되어 있었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궁금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번 앤과 함께 나온 이번 다이애나는 사랑을 잔뜩 받은 아이로 잘 그려졌다. 앤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진 소녀로, 퍼프 소매가 예쁜 원피스를 여러 벌 가지고 있으며 흐트러짐 없이 리본으로 묶인 머리카락까지 완벽하다.
2. 주목할 만한 사건들, 그리고 각색에 관하여
그린 게이블즈의 앤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전반적으로 잘 다뤄져 있다. 각색과 생략이 예상보다 많아 아쉽기도, 놀라기도 했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인 요소를 넣고자 한 의도가 보여 전반적으로 감상하기에 즐거웠다. 섬세하게 잘 다뤄져 놀란 부분과 아쉬웠던 부분을 얘기해 볼까 한다.
1) 그린 게이블즈에 도착한 앤
책으로 접할 때보다 앤의 감정이 잘 그려졌다. 에이미베스가 표현을 잘 한 것도 있겠지만, 원작에 충실하게 대사를 하나하나 전달했고 기차역과 벚나무, 앤이 입은 옷과 앤의 낡은 가방까지. 흠잡을 데 없이 예쁜 묘사였다. 앤과 대화하기가 버겁지만 그 수다에 점점 매료되는 매튜를 보는 것도, 극적으로 실망하는 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분명 앤은 그만큼 과장스럽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소녀였을 것 같다. 어렸을 때 상상했던 그대로 앤이 쓰다듬던 벚나무, 지나간 호수도 신기할 정도로 예쁘고 반짝거렸다.
2) 브로치를 훔쳤다는 누명을 쓴 앤
개연성을 위해 한 각색이 두드러진 사건으로, 개인적으로는 불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원작에서 앤은 마릴라가 아끼는 자수정 브로치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마릴라는 앤에게 단정적인 태도로 잘못을 고백하라고 다그친다. 훔치지 않았지만 고백을 멋지게 해내고(!) 싶어진 앤은 브로치를 한 채로 다이애나와 시냇물에서 놀다가 물속에 빠뜨렸다고 거짓 고백을 하고, 마릴라는 그 벌로 앤을 소풍에 가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브로치를 본인이 어디에 놓았는지 깨달은 마릴라가 브로치를 찾고 앤을 소풍에 보내주는 걸로 사건이 일단락된다.
특이하다고 생각한 이번 각색은 거짓 고백의 내용과 고백 후 마릴라와 매튜가 앤을 고아원으로 돌려보내는(!) 부분, 그리고 그 후 브로치를 찾은 마릴라가 매튜를 보내 여러 곳을 헤매고 페리를 타려고 페리 삯을 벌고 있는 앤을 데려오는 부분이었다. 원작의 열렬한 팬인 나는 각색 자체를 부담스럽게 본 것 같지만, 원작을 떠나 드라마 자체의 개연성은 이번 각색을 통해 보다 완벽해졌다. 덕분에 매튜가 페리 터미널에서 앤을 두고 '내 딸입니다'라고 말해버리는 장면이라던가, 마릴라가 앤에게 차근차근 사과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으니까.
3) 커스버트의 성을 이름에 넣는 앤
개연성과 몰입을 위해 새로 추가한 장면이었다. 위의 브로치 사건을 계기로 마릴라와 매튜가 앤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앤에게 인지시켜 주기 위해 가족 성경 (Family Bible: 가족 내에서 대대로 전하는 성경책으로 주로 가족 구성원의 생일, 기일, 세례일, 결혼기념일 등을 적어 보관함)에 앤의 이름을 적도록 한 사건.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불호가 심했던 부분이었다. 앤의 이름이 앤 셜리에서 앤 셜리 커스버트 (Anne Shirley Cuthbert)로 변하다니. 입양을 공식화했다는 설명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커스버트가 아닌 앤 셜리가 십여 년 동안 마릴라, 매튜 커스버트와 살면서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가 된다는 설정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었다는 생각이 든다.
4) 앤과 길버트의 만남, 싸움
가장 특이하게 예쁘고 아쉬운 부분이었다.
앤을 괴롭히는 빌리 앤드루스(Billy Andrews)로부터 앤을 구하는 길버트. 굉장히 낭만적이고 현대적인 설정이 아닌가. 길버트가 앤을 처음부터 관심 있게 바라본 건 사실이지만, 이런 극적인 설정이라니. 나는 이번 길버트의 팬이 된 고로 반가운 장면이었지만, 특이한 각색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앤과 길버트가 학교에 들어와서 처음 한 대화는 귀여웠고 사랑스러웠다.
앤과 길버트 간의 불화가 시작된 부분도 특이한 계기가 추가되었다. 길버트를 3년간 짝사랑했다는 루비 길리스 (Ruby Gillis) 때문에 앤이 길버트와 쳐다보거나 말을 섞지도 않아야 한다고 경고하는 조시 파이 (Josie Pie) 무리, 그리고 그 말에 휘둘리는 앤까지. 솔직히 말하면 앤의 캐릭터를 약화시키는 부분이라 좀 아쉽다고 생각했다. 석판을 깨뜨려서 길버트를 후려치는 장면과 사과를 위한 길버트의 빨간 사과가 등장한 건 만족스러웠다. 조금 더 길게 경쟁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길버트가 이미 앤을 너무 좋아해 버린 게 눈에 띄어서 포기.
아, 한 가지 추가했으면 좋았을 사건은 친구들과 연극을 준비하던 앤이 오필리아 역할을 맡아 물에 떠내려가던 중 길버트가 앤을 구해준 뒤 친구가 되는 장면이었다. 위험에 빠진 앤을 구하는 건 빌리 앤드루스로부터가 아니라 강물로부터였으면 좋았을 걸.
5) 앤과 다이애나의 영원한 맹세
완벽하게 예뻤다. 어색한 첫 만남에 다이애나를 좋아하게 되어 버린 앤이 영원한 우정의 맹세를 해 줄 수 있냐는 질문을 하는 장면, 맹세라는 개념에 질겁하는 다이애나, 그리고 살짝 지는 햇빛이 내리는 정원에서 민들레 씨를 들고 맹세하는 앤과 다이애나까지. 아기자기하고 푸르른 이미지가 사랑스러운 두 사람의 우정의 시작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다이애나의 화려한 원피스와 마릴라가 만들어준 앤의 수수한 갈색 원피스. 시간과 공간과 대사까지 모두 완벽한 장면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앤과 다이애나가 진심을 다해 맹세하는 장면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6) 마릴라가 담근 와인을 딸기주스로 착각해 마시고 취하는 앤과 다이애나
또 다른 완벽한 장면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접시와 찻잔 세트, 앤이 꾸민 감각적인 식탁, 오랫동안 상상했던 앤과 다이애나가 취한 모습까지 귀엽고 사랑스럽고 어설픈 소녀들의 모습이 좋았다. 앤과 다이애나가 취한 상황부터 흐릿하게 비치는 화면도 그림 같았다. 어렸을 땐 어른이 되고 싶어 어른 흉내를 내곤 했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앤과 다이애나도 그랬었다. 숙녀인 듯 꾸민 채로 서로 안부를 묻고, 우아하게 찻잔에 차를 마시며 다과를 즐기는 앤과 다이애나. 그림같이 예쁘고 상상했던 것처럼 완벽했다. 이후에 다이애나와 앤이 만나는 걸 금지하는 배리 부인과 그 문제의 해결점인 미니 메이(Minnie May Barry) 후두염 사건도 잘 그려졌다.
7) 앤의 초경
제일 충격적이었던 각색 중 하나였다. 1908년 발간된 소설을 현대화시키기 위한 여러 노력 중 하나인 듯했는데, 앤이 처음으로 생리를 하게 된 날 놀라는 모습과 그 변화에 대해 친구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생리에 대해 얘기를 큰 소리로 하면 안 된다고 말리는 조시 파이와 반박하는 앤. 숨길 게 아니라 생명을 만들어내는 일이 얼마나 대단하냐고 되묻는 앤을 보고 있자니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점을 반영하고자 한 의도가 보여 좋았다. 같은 맥락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부녀회 모임까지. 앤의 세상에 우리 세상이 많이 녹아있었다.
8) 앤의 퍼프소매 원피스와 매튜의 젊은 시절
앤의 패션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점을 찾아낸 매튜가 여성복 매장에 가서 앤의 옷을 사려고 하는 장면은 정말 명장면이었다. 수줍어 여자들과 말을 하기 어려운 매튜가 여성복 매장에서 앤의 옷을 주문하다니. 앤을 향한 매튜의 애정이 얼마나 커졌는지, 그 애정으로 앤을 얼마나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는지 볼 수 있는 예쁜 장면이었다. 책에서 읽었을 때도 설렜는데, 영화에서 보니 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고 느꼈다.
신기했던 각색은, 매튜가 여성 점원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을 때 가게 주인이자 젊은 날의 연모의 대상이었던 지니 (Jeannie)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는 점이었다. 우아하게 나이가 든 지니를 보면서 옛날을 회상하는 매튜와, 지니에게 앤의 드레스를 주문하며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소매의 모양이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애정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나중에 드레스가 도착했을 때, 앤이 입어보고 즐거워하는 모습까지. 상상 속의 앤이 뛸 듯이 좋아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9) 길버트 아버지의 죽음
사실상 말도 안 되는 각색이다. 앤과 길버트의 약혼, 결혼까지 이어지지 않을 시즌이라면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 최악의 각색임이 분명하다.
길버트의 아버지인 존 블라이드(John Blythe)는 병세가 악화되어 오래 앓긴 하지만, 앤과 길버트의 약혼과 결혼, 손주들을 만날 시점까지 살아 있다. 갑작스럽게 드라마에서 길버트가 부친상을 당한 걸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개연성 부여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단순히 극적인 요소로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 안타까웠다.
10) 그린 게이블즈를 노리는 2인조 사기꾼/강도의 등장
9번과 마찬가지로 엉뚱한 각색이라고 생각한다. 시즌 2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어 미정인 채로 남고 논할 내용이 부족하지만, 시즌 1을 마치는 방법 치고는 원작과의 싱크로 0, 개연성의 부족, 새롭게 생성된 등장인물이라는 세 가지 짐을 짊어진 아주 위험한 설정이었다. 2018년이 오고 해당 내용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지켜보고 싶은 생각은 들게 만들었지만, 줄거리를 너무 극적으로 바꾸거나 영향을 주진 않았으면 싶다.
3. 감상을 마치며
그린 게이블즈의 앤은 Anne with an E와 다르고 또 다르다. 레딧(Reddit)을 비롯해서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 작품에 대한 혹평과 찬사가 이어지지만, 분명 수많은 앤 팬들의 마음속에 있는 앤과 겹치는 부분도, 전혀 다른 부분도 많다는 점은 확실하다.
사랑하는 앤이 책에서 나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부분 부분 이질적이고 이상하고 어색하긴 하지만, 그만큼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디테일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단점을 상쇄하는 장점이 많아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고, 시즌 2가 무척 기대된다. 바라건대 시즌 2에서는 에이번리의 앤에 등장하는 학교생활, 앤이 자라 선생님이 되는 모습과 앤을 위해 희생하는 길버트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지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