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이 함께 쓰는 육아서'는 두 딸을 키우며 수십 권의 육아서를 탐독한 50대 엄마와 심리학을 전공하고 교육계에서 일하고 있는 20대 딸이 함께 쓰는 시리즈입니다. 양육자로서 부모의 시선만으로 쓰인 육아서를 넘어, 그 육아의 대상자였던 자녀의 후기까지 담아보려 합니다.
필자가 두 명인 만큼, 헷갈리지 않도록 엄마는 ♣, 딸은 ♬로 표기합니다.
성적보다 중요한 것
♣: 아이들을 키우며 도를 닦듯 수없이 되뇌었던 말은 '믿고 기다리면 스스로 하게 된다'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등교 준비를 마치고 현관에서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면 항상 "즐거운 시간 보내.", 혹은 "재미있는 시간 보내."라고 말하곤 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라든지, 발표 잘하고 오라는 같은 당부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서 엄마가 한 말 잊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느낌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아이 스스로 주체적인 시간을 보내고 와 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아무것도 미리 공부시키지 않았고, "학교 가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해"라는 말도 절대 하지 않았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의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염려해야 하는 일은 성적 그 자체가 아니라, 엄마가 자신의 성적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아이가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아이는 성적에 대한 엄마의 욕심을 처음 확인하게 되고 그때부터 '공부' 그 자체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 초등학생 시절을 돌이켜보면 온통 펑펑 논 기억뿐이다. 특히 하교 후에는 오직 친구들과 어떻게 놀지, 그것 하나만 골똘히 궁리했다. 다만 성적은 늘 우수하게 유지했는데, 그건 학교 수업을 정말 열심히 들었기 때문이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원 없이 놀 수 있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는 언제나 공부에 집중했다. 반면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는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고 미련 없이 놀았다. 짬을 내어 숙제를 해야겠다든지, 방과 후에 할 공부를 미리 해야겠다든지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학교는 늘 즐거운 곳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나의 단짝 친구는 나와 놀아주지 않고 매일 칼같이 하교했다. 엄마의 혹독한 감시 하에 매일 문제집을 한 권씩 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반면 평소 학교에서는 수업에 그리 집중하지 못했다. 애초에 초등학생의 집중력이 그리 길 수 없을뿐더러, 학교는 엄마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곳이라는 안도감 탓도 있었을 것이다.
강제로 공부한 탓인지 성적은 늘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낮았다. 아주머니는 딸이 왜 전교 1등을 하지 못하는지 늘 답답해했고, 그럴 때마다 문제집을 더 추가했다. 하루에 3권의 문제집을 다 풀 때까지 잠들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래서 그 애는 정말 끔찍하게도 공부를 싫어했다. 내가 공부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공부해!" 금지구역
♣: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건 정말 힘들다. 특히 사춘기인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면 정말 도를 닦는듯한 인내가 필요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기다림 끝에 아이가 알아서 공부하는 날이 오긴 할지 모르겠다는 불안함을 수없이 다스려야 한다.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속에서부터 입 안까지 하고픈 말들이 가득 채워지고, 그 말들을 쏟아내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입안 가득 채워진 말들을 돌아서서 억지로 삼키고, 밝게 웃는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것. 그게 내가 유지해 온 '믿고 기다리기'의 기본값이었다. 어쩔 땐 그게 너무 힘이 들어서 정말로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고, 소화가 되지 않아 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가 힘겹게 삼켜버린 말들을 아이를 향해 쏟아놓았다고 생각해 보면, 아이는 나 이상으로 상처받고 힘들어했을 것이다. 부모의 잔소리 양만큼 공부와 아이 사이에 담이 쌓인다는 생각을 했다.
결정적으로 아이들을 그냥 두었던 이유는, 공부는 누가 시켜서 억지로 6년 하는 것보다 스스로 1년 하는 것이 훨씬 능률이 좋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아서 하도록 두면, 결국은 스스로 한다. 그저 기다림의 문제일 따름이다.
정말 힘이 들 때는 아이의 심신 건강이 최우선이고, 그다음으로는 아이와 부모의 우호적 관계가 중요하다는 걸 끊임없이 되새겼다. 성적은 절대 우선이 될 수 없다. 부모와 자주 대화하고 관계가 좋은 아이는, 언젠가는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달을 수 있는 법이니까. 부모와의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하는 때는 대체로 사춘기 시절이다. 이 시기에 '믿고 기다리겠다'는 의사표현을 끊임없이 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는 큰 힘이 된다.
♬: 나는 부모님의 속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팽팽 놀았다. 얼마나 뛰어놀았는지, 타고난 피부가 하얀 편인데도 초등학생 시절 사진을 보면 죄다 태닝이라도 한 듯 까맣게 탄 피부의 어린이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공부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험기간이 되면 언니와 함께 앉아 교과서를 읽던 기억이 있으니까. 하지만 시험 직전 며칠 책을 들여다보는 게 전부였다. 비록 학습량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공부를 싫어하지 않는 아이로 자랐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이 되었다.
공부를 정말 많이 하고 잘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대학 진학 직전 나에게 전화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스무 살 되면 이런 지옥 같은 생활에서 벗어날 줄 알았는데, 공부 잘해서 얻을 수 있는 직업은 전부 평생 공부해야 하는 일이야.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니 정말 끔찍해." 공부는 어른이 되어도 끝나지 않는다. 평생을 거듭해야 할 일을 싫어하는 건 지옥에서 사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어쩌면 학창 시절에 이뤄야 할 가장 중대한 목표는 높은 성적이 아니라, 즐겁게 공부하는 법을 익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부는 함께하는 것
♣: 아이들이 거실에 모여 앉아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을 때면 남편과 나도 그 옆에서 함께 동참했다. 특히 아이가 수학문제를 풀다가 잘 모르겠다며 질문을 하면 나도 집안일하던 걸 멈추고 곁에 앉아서 문제를 풀어보곤 했다. 어른이니까 대신 풀어준다는 느낌보다는 함께 고민한다는 의미로, 각자 문제에 집중하고 먼저 푼 사람이 설명해 주는 방식이었다.
엄마는 뭐든지 다 알아야 하는 사람도 아니고 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공부하는 걸 좋아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결국 무엇이든 알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아이가 알길 바랐다. 오랜만에 수학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머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그 모습까지도 아이에게는 배울 거리라고 생각했다.
또 컴퓨터는 방이 아닌 거실 한편에 놓았다. 아이들과 한 공간에 있으니 나 역시 쓸데없는 인터넷서핑을 하지 않게 되었고, 아빠 혼자 컴퓨터를 쓴다며 방으로 쏙 들어가는 상황도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뭘 하든 온 가족이 거실에서 북적북적거렸다. 어려서부터 컴퓨터가 거실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감시의 차원이 아니라, TV가 가족 공용의 것인 것처럼 컴퓨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 거실에 책상을 두라는 일명 '거실 공부법'은 아주 유명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책상의 위치가 아니라, 공부에 관한 아이의 인식이다. 공부하는 시간이 벽을 바라보고 있는 책상 앞에서 홀로 버텨야만 하는 고독한 과제로 느껴지는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일과의 한 부분으로써 가족과 교류하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라고 느껴지는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차이는 매우 크다.
방안에 책상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언제나 주방에 있는 식탁이나 거실에서 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언니도 엄마도 모두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가끔은 세 살 터울의 언니에게 모르는 문제를 질문했다가 넌 이것도 모르냐는 핀잔을 듣곤 했는데, 그마저도 즐거웠다. 공부는 내가 알아서 할 일이면서도 나 혼자서만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공부하는 게 벼슬이 아니다
♣: 아이가 공부할 때는 다른 가족들이 조용히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모토는 정반대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집중할 수 있어야 하며, 공부에 대한 집중은 순전히 본인의 몫'이라는 게 가족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공부하는 게 무슨 벼슬인 것처럼 대우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부모로부터 공부를 강요받다 보면 아이는 어느새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 주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러나 공부는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며, 옆에 있는 사람이 덩달아 불편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런 가족 우선주의가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로 키우는 데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 공부해야 한다는 이유로 가족의 일에서 빠지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심지어 시험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공부해야 하니까 외식에서 빠질래, 이번 주말에 할머니댁에 안 갈래 같은 발언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가족과의 시간은 미리 정해진 선약이고 공부는 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의 할 일이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공부 스케줄을 조정하는 게 당연했다.
물론 한창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책상 앞을 떠나게 되면 공부의 흐름이 탁 깨진다. 그러나 당장 1시간 더 집중하는 것보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시 앉아서 집중하는 힘'을 기르는 게 더 효과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는 나의 수많은 할 일 중 하나이지 내 전부가 아니고, 내가 알아서 잘 조율하고 집중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 공부는 물론 중요하다. 공부에도 때가 있다는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그러나 공부하라는 말 이전에, 부모가 아이에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나의 경우 세상 사는 이야기, 지인들의 소식, 뉴스에 나온 각종 소식들을 들려주면서 아이가 자연스레 세상만사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공부의 목적은 결국 세상에서 잘 살아가기 위한 것이니까.
내 아이가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고, 가능하다면 리더로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소망일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을 위해서 아이를 억지로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가야 할 방향을 깨달을 수 있도록 뒤에서 기다려주고, 받쳐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돌이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