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이 함께 쓰는 육아서'는 두 딸을 키우며 수십 권의 육아서를 탐독한 50대 엄마와 심리학을 전공하고 교육계에서 일하고 있는 20대 딸이 함께 쓰는 시리즈입니다. 양육자로서 부모의 시선만으로 쓰인 육아서를 넘어, 그 육아의 대상자였던 자녀의 후기까지 담아보려 합니다.
♣: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런저런 책을 사들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위해 미리 전집을 잔뜩 사두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집에 있는 책은 봤든 안 봤든, 아이에겐 이미 익숙한 책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집 구매의 단점이다. 반면 아이를 서점에 데려가면 새로운 책을 살펴보며 책을 향한 흥미를 쌓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내 것이 아닌 책은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는 걸 충분히 이해할 나이가 되자마자 아이와 함께 서점에 가기 시작했다. 서점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이다. 수많은 책 사이를 거닐며 새로운 관심사를 발견할 수도 있고, 무한한 상상력을 성장시킬 수도 있다.
난 서점에 갈 때마다 항상 설렜다. 특히 교보문고 같은 큰 서점이라면 더더욱. 그 설레는 마음을 아이 앞에서도 풍부하게 표현했다. 얼마나 재미있는 책이 있을지 기대된다고, 엄마가 기다리는 책이 서점에 나왔을지 궁금하다고. 그 덕분에 아이들도 어릴 적부터 서점은 즐거운 곳, 가고 싶은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책을 살펴보는 그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책의 표지 앞 뒤를 읽고 작가 소개를 읽고 목차를 훑어보며 여러 권을 살펴보다가 문득 한 권을 골랐다며 아이들에게 자랑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옆에서 책을 읽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과정과 그 설렘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 내가 어릴 적 엄마는 잠실에 있는 교보문고에 데려가 책을 쭉 둘러본 뒤, 핫트랙스에 가서 문구류도 마음껏 구경하게 했다. 그래서 교보문고에 가는 날은 늘 신나는 날이었다. 굳이 무엇을 사지 않아도, 볼거리가 너무 많았다. 나는 쇼핑을 좋아했고, 서점은 책을 쇼핑하는 곳이기 때문에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서점에 가는 길은 놀이터에 가는 길만큼이나 즐거웠다.
나는 여전히 '아이들한테 어떤 책을 읽히는 게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서점에 가서 직접 고른 책이요."라고 답한다. 심지어 문제집 한 권을 고르더라도, 본인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게 내 철칙이다. 책을 직접 고르는 경험은 정말 소중하다. 어떠한 방향으로든지 내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을 직접 손에 넣고, 집에 와서 읽어보며 궁금증을 해소하는 경험은 즐거운 것이라는 걸 어릴 적부터 알아야 한다.
서점 안에서 못 갈 곳은 없다
♣: 아이와 함께 서점에 갔다고 해서 어린이 코너에만 있지는 않았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책이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무 어려운 책들은 겉표지들만 보고 지나치더라도, 아이가 가진 세상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점에 갈 때마다 아이들이 직접 고른 책을 한 권씩 사주곤 했다. 단, 중요한 것은 아이가 고른 책이 아이 수준에 맞든 맞지 않든 사주었다. "이 책은 안 돼." 같은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표지 그림이든 책 속 그림이든 아니면 어떤 한 문장이든 아이의 관심을 끈 부분이 있었기에 그 책을 고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못 읽을 책은 없다.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다. 아이가 직접 흥미를 갖고 고른 책이기 때문에 어려워도 읽기 위해 도전은 할 것이고 글을 모른다면 그림만 보거나 읽어달라고 할 것이다. 그 책이 너무 어려우면 다음에 어린이 책 코너에서 같은 주제의 책을 골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아이가 어른책을 선택해 도전하다가 읽기를 포기하면 "덕분에 엄마는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분야의 책을 읽을 기회를 얻었네!"라고 이야기하며 내가 읽었다. 지금은 끝까지 읽지 못했지만, 더 자란 뒤에 언제라도 흥미를 갖고 읽어볼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책마다 나이에 따라 읽을 시기가 있다고 하지만, 굳이 부모가 판단해서 그 획을 일찍부터 그어줄 필요는 없다. 어린이용 그림책을 학생 때 보지 말란 법이 없는 것처럼 글밥 많은 어려운 책이라고 해서 지레 읽지 못하게 할 이유는 없다.
서점에서 아이에게 어린이책만 보여주지 않고 다양한 코너를 함께 거닐다 보면, 아이가 특별히 오래 머무는 코너가 생기기 마련이다. 유독 문학에 흥미를 갖는 아이도 있고, 과학이나 인문 서적을 여러 차례 들춰보는 아이도 있다. 서점은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조금이라도 일찍 발견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 유년기의 즐거운 경험 덕분인지 나는 여전히 서점을 좋아한다. 광화문이나 잠실에 갈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교보문고에 들르고, 여행을 갈 때면 그 지역의 특색 있는 서점을 찾아 꼭 책을 한 권씩 사 온다. 하루종일 서점에 있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나는 서점에 가면 구석에 앉아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새로운 책을 고르기 위해 시간을 보낸다. 평대뿐만 아니라 벽면에 꽂힌 책도 꼼꼼히 살펴보고, 어린이 코너는 물론 원서나 전공서 코너까지 구경한다. 그러다 보면 손에 책 다섯 권 이상이 쥐어져 있을 때도 많은데, 지갑 사정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두세 권만 남기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을 때도 부지기수다. 이제는 그런 아쉬움을 도서관에서 달래곤 한다.
서점은 새로운 분야를 알아가기에 최적의 장소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역사나 철학 분야도, 괜찮은 책을 한 권만 발견한다면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탈바꿈할 수 있다. 아이의 흥미와 적성을 알아가고, 또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데 서점만 한 곳은 없다. 차분하게 책을 고르는 어른들 사이에서 그 분위기를 배우고, 책을 조심히 구경하고 고르는 경험을 한다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취향을 얻게 된다.
아이를 도서관에 데려가지 않은 이유
♣: 보편적으로, 책을 구입하지 않고 많이 읽기 위해서는 도서관을 이용한다. 하지만 난 아이들이 어렸을 땐 도서관에 가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에 가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도서관에선 조용히 책만 읽어야 하는데, 그런 분위기가 아이들에게 강압적으로 느껴질까 우려됐기 때문이다.
집에서 책을 볼 때면 장난스럽게 큰 소리로 읽기도 하고 책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거나, 책을 읽으면서 질문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도서관에선 그게 불가능하다는 게 단점이었다. 독서 시간을 즐기게 되는 데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지 않았다.
또 미취학 아이들은 어린 만큼 면역력이 약하다. 도서관 책들의 위생상태를 무조건 신뢰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이유였다.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는 대신, 그 당시 유행했던 책 대여업체를 이용해 일주일에 세 권씩 배달받기도 했다. 책 대여 업체에서는 일주일마다 회수한 책들을 소독해서 다음 집에 대여해주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가장 중요시한 것은 '책 읽는 시간은 즐거운 시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거였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도서관을 이용한 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였다. 자연스럽게 학교도서관을 이용하면서 도서관 이용할 때의 예절도 학교도서관에서 처음 배웠다. 입학 전 이미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매달 학교도서관에서 뽑는 독서왕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 어린 시절부터 서점을 오가며 책을 고르는 재미를 알게 되면, 아무 책이나 무제한으로 읽어볼 수 있는 도서관이 천국처럼 느껴진다. 나 역시 청소년이 된 후에야 서점보다 도서관을 좋아하게 되었다. 에너지 넘치는 어린이들에게는 끽소리도 내지 않아야 하는 도서관이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러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원하는 책을 다 사려면 10만 원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고, 마치 '금액 무제한 책 쇼핑몰'처럼 느껴지는 도서관을 찾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도서관에서 매번 일곱 권씩 책을 빌려오고, 그중에서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을 서점에 가서 사곤 한다. 읽고 싶은 책이 도서관에 없으면 희망도서 신청을 하고, 가장 먼저 새 책을 빌려오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두꺼운 책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기
♣: 아이가 자라면서 눈높이도 자라고 읽을 수 있는 책의 수준도 자란다. 그러나 아이가 읽어주길 바라는 책과 실제로 아이가 좋아하는 책은 언제나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책장 속 책의 배열을 바꾸는 일을 아이가 청소년이 될 때까지도 계속했다.
청소년기에 인문학책을 많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지만, 그걸 강요하지는 않았다. 인문학책을 읽는 게 도움이 될 거라는 말만 간간이 해주었을 뿐 읽을 책을 고르는 선택은 항상 아이들 스스로의 몫이었다. 독서에 있어 부모의 바람이 강요로 느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름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다행히도 아이들은 글밥 많은 책도 재미만 느끼면 부담 없이 읽었다. 두꺼운 책에 대한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은 효과는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큰 아이의 경우 초등학교 때까진 정말 독서를 많이 했는데, 중학생 시절에는 신나게 놀러 다니느라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등학생이 된 후 언어, 외국어, 모의고사의 긴 지문에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어려서 책을 많이 읽어둔 덕분이라고 한다.
♬: 소위 '벽돌책'에 입문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로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해리포터나 셉티무스 힙, 아로와 완전한 세계 시리즈 등으로 소설에 입문했다. 판타지 시리즈는 길기만 하고 영양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리즈가 줄줄이 이어지는 소설을 읽다 보면 아무리 내용이 방대하더라도 주눅 들지 않는 힘이 생긴다. 게다가 수많은 등장인물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힘은 덤이다.
그렇게 환상적인 스토리를 통해 두꺼운 책에 적응하고 나면, 영역을 조금 더 넓혀갈 수 있다. 흥미롭지만 진지한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 읽은 책 중 가장 두꺼운 책은 약 550페이지에 달하는 <마이 시스터즈 키퍼>였는데, 언니에게 골수 이식을 해주기 위한 의도로 세상에 태어난 자녀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부모를 고소한다는 흥미진진한 내용에 빨려 들어가듯 읽었던 기억이 있다.
책의 두께는 그 책의 특성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일부러 두꺼운 책을 강요할 이유도, 두꺼운 책을 읽는 아이를 대단하다고 추켜세울 필요도 없다.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골랐는데 어쩌다 보니 두꺼웠다'는 방향이 오히려 정답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농담으로라도 절대 하지 않아야 할 말이 바로 "책 읽으니까 졸리다."라고 생각한다. 당장은 그리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지 몰라도, '책은 재미없고 지루한 거야'라는 인식을 조금씩 심어주기에는 충분하니까. 책이 곧 수면유도제라는 식의 농담은 우리 사회에 충분히 팽배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가 이 말을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 큰 딸 작은 딸 모두 성인이 된 지금도 책을 좋아하고 잘 읽는다. 책장 앞에 앉아 이 책 저 책 펼쳐보다가 마음이 끌리는 책을 뽑아 읽는 기쁨을 아는 삶. 그런 삶을 아이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는 아이가 책을 좋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 엄마의 수많은 육아 철학에 동의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감사히 여기는 건 바로 '책을 좋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준 것이다. 덕분에 자라는 내내 다양한 간접경험을 할 수 있었고, 풍부한 어휘력을 갖추게 되었다. 책을 통해 얻은 경험과 능력은 삶의 모든 부분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 여러모로 더 재미있고 쉬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