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학원 없이 영어 하는 아이로 키우는 법

엄마와 딸이 함께 쓰는 육아서

by 송혜교
'엄마와 딸이 함께 쓰는 육아서'는 두 딸을 키우며 수십 권의 육아서를 탐독한 50대 엄마와 심리학을 전공하고 교육계에서 일하고 있는 20대 딸이 함께 쓰는 시리즈입니다. 양육자로서 부모의 시선만으로 쓰인 육아서를 넘어, 그 육아의 대상자였던 자녀의 후기까지 담아보려 합니다.

필자가 두 명인 만큼, 헷갈리지 않도록 엄마는 ♣, 딸은 ♬로 표기합니다.



: "엄마, 다른 애들은 해리포터를 한국말로 보나 봐!"


중학교 1학년이던 작은 딸이 하교하자마자 달려와 놀란 목소리로 얘기했다.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학교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영화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영화 내용 중에는 수업시간에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주문을 배우는 게 나온다. 플리트윅 교수가 손목 운동을 강조하면서 주문을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다른 친구들이 익숙한 듯 "휘두르고 치고, 휘두르고 치고!"라고 입을 모아 따라 했다는 거다.


아이는 그때 깜짝 놀랐다고 한다. 자기는 지금껏 더빙 버전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swish and flick!"이라는 대사만 들어왔는데, 모든 아이들이 단체로 그 부분에서 "휘두르고 치고!"라고 말하는 게 너무 놀라웠다고. 다른 친구들은 오히려 우리 아이가 이상해 보였겠지만.




영어학원에 보내지 않은 이유


: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 쉬운 영어책 정도는 모르는 단어도 유추해 가며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막상 영어를 말하려고 하면 문법적인 것부터 따지다가 결국은 입도 뻥긋 못 하는 사람이다. 난 우리 아이들만큼은 나와 같은 사람, 그러니까 '학교 영어성적은 최상위였어도 실질적으론 영어 한 마디 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


처음에는 영어학원을 알아봤다. 독서를 좋아하는 딸들이 재미있는 영어책을 술술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동네에 있는 영어학원의 커리큘럼들은 대부분 학교 시험 성적 향상이 주목적이라서, 오히려 영어문장을 읽을 때마다 문법에 맞춰 우리말로 해석하는 습관이 생길 것 같았다. 우리 동네엔 내가 원하는 방식의 영어교육을 해주는 곳이 없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엄마표 영어'를 택했다.


영어실력이 미미한 내가 엄마표 영어에 도전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영어를 가르친다'는 생각을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아이들이 영어에 자연스레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만 하자고 생각했다. 내 강요에 의해 영어를 공부한다기보다는, 아이들 스스로 영어의 필요성을 느낄 때 '지나고 보니 엄마와 보낸 시간이 도움이 되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일 수 있길 바랐다. 그래서 엄마표 영어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다짐한 한 가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이 나 때문에 영어에 흥미를 잃게 하지는 말자'였다.




언제나 영어가 흘러나오는 집


: 처음 엄마표 영어를 시작할 때, 첫째는 초등학교 3학년, 둘째는 일곱 살이었다. DVD로 영화를 보여주는 게 공부의 시작이었다. 폐업하는 가게에 가서 아이들이 볼만한 DVD를 저렴한 가격에 왕창 사 오기도 하고 언제나 새로운 DVD를 찾아 헤맸다. 영화를 고르다 보면 아이들의 성향 차이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첫째 아이는 한 번 본 영화를 두 번은 찾지 않는 반면, 작은 아이는 자기가 재미있다고 느끼면 열 번도 넘게 반복해서 보는 스타일이었다. 학습적인 면으로 따지면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지만, 뭐라고 말을 얹지 않고 그냥 두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더빙판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 원작의 느낌과 다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들을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선 원작 그대로를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볼 때는 내용이 궁금하니 이해하기 쉽게 한글 자막을 켠 채로 보고 익숙한 영화나 드라마는 자막 없이 보도록 했다. 처음에는 자막이 없어 이해하지 못하는 대사가 있으면 답답해하지만, 아이들은 의외로 금방 익숙해진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자막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이때 중요한 건, 어떤 영화를 볼지 선택하는 건 아이들의 몫이었다는 거다.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도 아이가 보건 안 보건 신경 쓰지 않고 영화를 자막 없이 틀어놓기도 했고, 아이들이 잠들 때나 아침에 일어나기 전, 아이들이 집에 없을 때까지도 해리포터 같은 재밌는 오디오테이프를 틀어놓았다. 하루 종일 TV나 라디오를 틀어두는 가정이 있는 것처럼, 백색소음 대신 영어가 들리는 집을 만든 셈이다. 영어는 공부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라는 걸 알 수 있길 바랐다. 현재 20대가 된 딸들은 여행, 공부, 친구 등 모든 면에서 영어를 사용하면서, 엄마표 영어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이야기하곤 한다.


: 어릴 적 친구들이 모여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 혼자 공감하지 못하던 기억이 난다. 모두가 짱구나 도라에몽, 이누야샤에 빠져있을 때 나 혼자 마틸다나 하이스쿨뮤지컬, 한나 몬타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일본 문화는 익숙하지도 선호하지도 않는다. 살면서 제대로 본 일본 영화가 거의 한 편도 없을 정도다.


반면 어린이를 위한 영미권 작품은 거의 다 섭렵한 듯하다. 재미를 위해 찾아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뤄진 일이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영어로 된 영화를 보며 얻은 것 중 가장 값진 것이 뭘까? 많은 사람이 어휘력이나 문장 구성 능력을 꼽겠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내가 어린 시절 엄마표 영어에 참여하면서 얻은 가장 값진 것은 '영미권 문화에 대한 이해'다.


언어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게 '재미'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기는 난관은, 영미권 문화의 웃음 포인트가 우리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방금 나온 대사가 왜 웃긴 건지, 사람들이 어떤 포인트에서 웃는 건지 알아내는 건 외워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꾸준히 그 문화에 노출되어야만 '아무 생각 없이 함께 웃기'가 가능한 셈이다.


유튜브를 보면 사람들의 영어 공부를 돕기 위해 예능이나 영화의 웃긴 장면을 골라 올리는 채널들이 있다. 깔끔하게 자막도 달려있는 데다 가장 재밌는 장면만 골라볼 수 있으니 정말 유용하다. 그러나 영상을 살피다 보면,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웃어야 하는 거지?", "이게 뭐가 웃겨요?"라는 댓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문법은 배울 수 있어도, 웃음은 배울 수 없다. 그러니 문법에는 무지하더라도 작품에 담긴 문화와 개그코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영어를 향한 밝은 문이 활짝 열리는 셈이다.




언어는 공부가 아닌 일상이야


: 자막 없이 본 영화의 자세한 내용이 궁금할 때면, 아이들이 관련책을 스스로 찾아 읽었다. 해리포터를 예로 들자면, '마법사의 돌' 영화를 재밌게 본 뒤 한글로 된 해리포터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첫째는 해리포터 한글판 전집을 여덟 번 이상 읽었고 둘째는 열 번 이상 읽었다. 그렇게 한글책을 많이 읽으니 해리포터 DVD는 자막 없이 보아도 내용을 100% 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르는 문장이 나오더라도 스토리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유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막 없이 영화를 보는 게 익숙해질 때까지는 나도 아이들과 함께 앉아서 봤다. 아이들이 화면을 가리키며 "엄마, 지금 뭐라는 거야?"라고 물으면 "엄마도 뭐라는지 몰라, 그냥 들어보자"하면서 그 어려운 시간에 동참하는데 의미를 두었다. 엄마도 함께 배우는 입장이라는 걸 알려주면 아이들이 자신이 먼저 이해한 걸 내게 설명해 주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마틸다, 피터팬, 인어공주, 아이가 커졌어요, 빙크의 베이비 데이아웃, 곰돌이 푸, 메리포핀스, 말괄량이 삐삐, 바로워즈 같은 작품들을 특히 좋아했다. 꼭 시간을 엄격하게 정해두고 보는 게 아니라, 학교에 가기 전 아침을 먹으면서 틀어두기도 하고 하교 후 소파에 앉아 보기도 했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영화를 즐기게 된 덕분인지, 아이들은 영화에 빈번하게 나오는 일상적인 대사를 쉽게 외우고 따라 했다.


: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반복적으로 보며 대사를 따라 하던 방식은, 요즘 유행하는 '쉐도잉'과 매우 흡사하다. 의도치 않게 효과 좋은 학습법을 터득한 셈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캐릭터의 성격이 드러나는 일상적인 대사들을 정말 좋아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미국의 국민 시트콤이라고 불리는 <풀하우스>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작품이라 올드한 면도 있지만,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살며 생기는 에피소드를 담은 스토리 덕분에 아이의 말과 어른의 말을 다 들어볼 수 있었다. 나는 <풀하우스>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대여섯 번씩 반복해서 시청했다. 덕분에 가장 많이 본 시즌1의 1화는 미리 대사를 칠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그 반복 시청이 빛을 발한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은 외국인 친구와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부터였다. 긴 문장들은 머릿속에서 문법을 신경 쓰며 뱉어야 했지만, 리액션이나 간단한 표현들은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튀어나왔다. 내가 이런 표현을 언제 외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는데도! 만일 엄마가 "다른 작품도 좀 봐야지. 매일 똑같은 것만 봐서 뭐 해?"라는 식으로 규제했다거나, "이 작품은 회화에 좋으니까 반복해서 봐!"라고 강요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모든 작품의 DVD를 구매하거나 시간 맞춰 디즈니 채널을 틀고 '본방사수'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ott 서비스가 넘치는 요즘에는 다양한 작품을 접하기가 식은 죽 먹기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중에서 자기만의 취향을 찾아가고 주인공에게 애정을 쏟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속한 문화의 폭이 넓어진다.




엄마표 영어의 효과


: 아이들이 각각 중1, 고1일 때 엄마표 영어에 대한 후기를 남겨주었다. 첫째로, 외국인과 대화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학교에서 원어민 선생님께 질문이 있을 경우, 언제나 주저 없이 먼저 나서서 질문하곤 한다고.


둘째로는, 영어 듣기 평가에선 항상 좋은 점수를 받는다. 첫째 아이의 모의고사날. 친구들이 다가와 '다른 때와 달리 영국식 발음이 나와 듣기 평가를 망쳤다'며 불평했다고 한다. 첫째는 친구들 말을 듣고서야 그날 듣기 평가가 영국식 발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평소 집에서 영국식 발음, 미국식 발음을 따지지 않고 다양하게 들었던 탓에 어떤 발음도 자연스럽게 다 들렸기 때문이다.


둘째는 중1 무렵부터 해리포터나 트와일라잇 시리즈 같은 두꺼운 원서도 겁 없이 읽곤 했다. 한글 책으로 반복해서 읽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다는 이유에서다. 영어로 된 긴 글을 읽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감이 사라진 것이다. 영어로 쓰여있든, 한국어로 쓰여있든 그냥 '재미있는 콘텐츠'라고 받아들이는 듯했다.



: 초등학생 시기가 영어를 시작할 수 있는 최상의 시기인 건 맞다. 하지만 엄마표 영어를 시작하며 가졌던 목표는 딱 두 가지였다. 아이들이 영어에 거부감을 갖지 않게 하기, 그리고 영어에 흥미를 가지도록 하기. 아이에게 억지로 공부를 시키게 되면 영어 자체를 싫어하는 아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언어는 공부가 아닌 일상이니까.


: 내가 지금 외국인 친구와 함께 쇼핑을 하거나, 런던의 카페에 불쑥 들어가 혼자 커피를 시켜 먹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엄마의 노력 덕분이다.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하루 종일 단어장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니까.


영어 공부에는 끝이 없다. 만 개의 단어를 외웠다고 해서, 토익 만점을 맞았다고 해서 더 공부할 필요성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끝없는 공부를 일상에 녹여내는 자기만의 즐거운 방식을 터득하는 것이다. 학생 타이틀을 뗀 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누가 시킨 적도 없는 단어 외우기를 매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 엄마표 영어가 내게 준 가장 값진 것은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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