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높은 아이로 키우는 법

엄마와 딸이 함께 쓰는 육아서

by 송혜교
'엄마와 딸이 함께 쓰는 육아서'는 두 딸을 키우며 수십 권의 육아서를 탐독한 50대 엄마와 심리학을 전공하고 교육계에서 일하고 있는 20대 딸이 함께 쓰는 시리즈입니다. 양육자로서 부모의 시선만으로 쓰인 육아서를 넘어, 그 육아의 대상자였던 자녀의 후기까지 담아보려 합니다.

필자가 두 명인 만큼, 헷갈리지 않도록 엄마는 ♣, 딸은 ♬로 표기합니다.


너희는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 자존심이 타인의 시선에 의미를 두었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라면, 자존감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감정이다. 나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믿는 마음. 자존감은 사람이 평생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가치 있는 기본 자산이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믿지 못했다. 나 자신을 믿지 못하니 어떤 일을 하든 그 결과에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늘 조마조마한 삶을 살았다. 이런 내가 싫었지만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성인이 된 뒤에도 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아이를 가진 뒤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아이가 나처럼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였다. 그래서 미친 듯이 육아서를 읽었다. 그렇게 내가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파악했고, 우리 아이들에게만은 그런 원인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남편과 함께 노력했다.


: 청소년들을 만나 강연을 할 때마다 종종 묻는 질문이 있다. "여러분은 자존감이 높은 편인가요?" '스스로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라고 말하면, 50명 중 1~2명 있을까 말까다. 아무도 손 들지 않는 날도 있다. 참 속상한 일이다.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해도, 영단어를 하나도 몰라도, 심지어 맞춤법을 틀리더라도 괜찮다. 성인이 되기 전 단 하나의 역량만 다져야 한다면, 그건 단연 높은 자존감이다. 낮은 자존감을 안고 사는 일은 평생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이나 괴롭다. 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편안함과 여유를 찾아낸다.




싸우지 않는 부모


: 자존감은 기본적으로 어린 시절, 특히 유아기에 형성된다고 한다. 즉, 유년 시절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이의 자존감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이때 부모 사이의 충돌은 아이의 자존감 하락 원인이 될 수 있다. 부모가 서로 싸우는 모습은 아이에게 생존의 위협이다. 안정적이지 않은 가정은 곧 부모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비슷한 케이스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물론 좋은 날도 많았지만, 무서움, 불안함, 무력감은 유독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나는 학창 시절 12년 내내 전교 1등을 유지했다. 성적이 좋을 때면 모처럼 부모님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그런 날엔 집안의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반면, 성적이 떨어질 때면 부모님의 반응과 흐려질 집안 분위기부터 걱정하곤 했다.


난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아이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아이를 위한다는 이유로 부부가 서로를 비판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00이 공부하는데, 당신 TV 소리 좀 줄여.", "애들 성적이 왜 이 모양이야?", "그게 어디 내 탓인가?" 같은 말들. 다소 피상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아이가 '나 때문에 부모님이 다툰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일절 하지 않는 일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 아이를 키우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또 한 가지는,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는 거였다. 딴 일을 하며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눈을 맞추고 호응을 하며 내가 온전히 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전달하며 듣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아이가 옹알이를 할 때도 "어유, 그랬어요?" "아, 그랬구나!" 하며 대꾸를 해주었다.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녀오면 신발을 벗으면서부터 "엄마, 오늘 어쩌고 저쩌고~"하며 얘기를 시작했다. 그 덕에 집안에 앉아서도 유치원의 일상이 훤히 들여다 보였고 누구랑 친한지, 누구를 좋아하는지까지도 알 수 있어 참 좋았다. 그래서 더 관심 가지고 이것저것 물어보면 아이는 더 신나서 얘기를 했다. 아빠가 퇴근하고 나면 아이들은 또 아빠에게도 달려가 한참을 조잘거렸다.


이게 습관이 되었는지, 유치원 때부터 시작되었던 재잘대기는 학년이 올라가도 계속되었다.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이 말을 안 한다'는 육아 선배들의 말이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성인이 된 지금도 딸들은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한다. 언제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딸들의 높은 자존감에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 아이는 자신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연스레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또 그에 대한 자신만의 의견도 만들어 나가게 된다. 이는 어휘력이나 언어 구사력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성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아이들은 가끔씩 잘못된 사실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말을 한다. 이건 반가운 일이다. 사회의 다양한 규칙과 문화를 알아채고 배워가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짚어줄 수 있을 때 짚어주면 된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어린애들이 으레 하는 의미 없는 말'로 치부하는 게 아니라 정말 하나의 의견으로써. 물론 부족한 점도 있을 테고 틀린 것 투성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한 명의 인간으로서 타인을 존중하고 존중받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의견을 존중받은 경험이 없었다면, 성인이 된 후에도 내 의견을 당당하게 피력하는 일을 주저했을 것이다. 실제로 일을 하면서 마주치는 많은 청년들이 분명 괜찮은 의견을 잔뜩 주눅 든 채로 말하거나, "좀 별로인 것 같긴 하지만 혹시..."라고 운을 띄우며 처음부터 자신을 낮추고 들어가는 것을 종종 보았다. 예의를 지키는 것과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은 다르다. 어릴 적부터 이 사실을 깨우치는 게 중요하다.




죄책감 주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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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한 명의 인격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 아이니까 이렇게 키워야지'라는 생각보다는 '내 아이가 이렇게 커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려고 했다.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대화를 통해 무엇이든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을 존중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커서도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선택지를 강요하면, 느는 것은 거짓말뿐이다. 솔직하지 않아야만 부모와의 트러블이 없으니까. 거짓말을 들키지만 않으면 아이는 괜찮은 걸까? 그렇지 않다. 아이 스스로 '어쩔 수 없이 한 거짓말이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죄책감을 갖게 되는데, 나는 그게 아이의 정서에 훨씬 나쁘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일방적으로 하는 얘기는 대화가 아닌 지시에 속한다. 아이 본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의무만을 강요하는 일이다. 만약 이에 그치지 않고 체벌까지 하게 되면, 아이는 분노를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체벌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이의 정서에 치명적인 데다가, 심지어 교육적인 효과도 없다.


반복적으로 체벌을 받은 아이는 죄책감이 무뎌진다. '난 체벌을 받음으로써 잘못의 대가를 치렀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는 인격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짚어 반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죄책감은 자존감에 스크래치를 내지만, 반성은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양분이 된다. 자존감에 어떠한 타격도 주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 "나 친구랑 여행 가는데, 너네 집에서 자고 오는 거라고 해도 돼? 우리 엄마가 너 좋아하잖아!" 범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말을 듣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주위에는 '엄마에게 거짓말하는 딸들'이 많았다. 거짓말을 하게 되는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학원 가기 싫어서, 집에 좀 늦게 들어가고 싶어서, 여행을 가고 싶어서.


더 나아가서는 이런 경우도 있다. "너 혹시 식당에서 손 보이게 찍은 음식 사진 있어? 남친이랑 밥 먹는데 엄마가 누구랑 있냐고 물어보는데..." 남자친구와 밥을 먹는 건 죄가 아니다. 학원 가기 싫은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엄마와의 싸움이 시작된다는 게 친구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그래서 이 딸들은 늘 묘한 죄책감을 가진 채 하고 싶은 일을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이게 포인트다. '허락보다 용서가 빠르다'는 말은 이미 자식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일단 저지르고 나중에 들키면 수습하겠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엄마가 싫어하니까 그건 절대 안 하는' 자식은 드물뿐더러, 속이는 방식도 점점 교묘해진다. 그러니 대화 없이 무작정 무언가를 반대하는 건, 자녀에게 죄책감을 안겨줄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식을 '괴도 루팡'급 속임수의 달인으로 만들 뿐이다.




일관된 양육방식


: 엄마는 엄하게, 아빠는 다정하게. 혹은 그 반대로, 이런 식으로 부모의 양육스타일을 나누는 게 한 때 유행했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양육의 역할을 따로 나누지 않았다. 아이에게 엄하게 대하는 걸 싫어했을뿐더러, 어느 한쪽이 악역을 맡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지켜야 하는 선을 알려주는 일은 부모가 수시로 맡아야 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 전담하고 한쪽이 달래주는 건 아이에게도 혼란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이가 잘못했을 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어느 쪽이든, 그 자리에 없는 부모도 같은 의견일 것임을 아이가 자연스럽게 알고 있도록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이를 위해 평상시 남편과 아이 양육에 관한 기준에 대해 자주 대화를 하며 의견을 맞추곤 했다.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 차분하게 눈을 맞추고, 지금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대화하는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왜 그러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필수로 여겼다.


만일 부모 대신 아이를 양육해 주는 제삼자가 있다면, 그 사람과도 양육방식에 대해 대화를 하고 의견을 일치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이는 가치관 정립에 혼란을 겪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쪽에 의존하게 된다. 더 나아가, 양육방식의 차이로 가족 간에 트러블이 생길 경우 아이 역시 심적으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 "엄마는 라면 못 먹게 해서 아빠랑 몰래 먹었어!" 친구가 말했다. 초등학생 시절의 일이었다. 나는 왜냐고 물었다. 친구는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왜긴, 건강에 안 좋잖아!"라고 말했다. "그럼 아빠는 왜 허락해 주시는데?"라고 묻자, "몰라? 엄마는 안 된다는데 아빠는 몰래 먹어 된대."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럼 라면을 먹어도 되는 걸까, 아닌 걸까? 맛있는 라면을 못 먹게 하는 엄마는 나쁜 사람이고, 아빠는 나의 공범이 되는 걸까? 별 것 아닌 문제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 양육자의 의견이 충돌할 경우 집안의 규칙은 흐릿해진다. 무언가를 금지하는 규칙이 있다면 그 이유와 기준이 무엇인지도 알려주어야 한다. 기준이 자꾸 바뀌어 버리면 규칙을 지켜야 할 이유는 사라지고 금지당했다는 감정만이 남는다.



'집'의 의미


: 집은 모든 가족구성원에게 가장 편안한 곳이어야 한다. 가정이란 어떠한 조건도 없이 존재만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의 목표는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가정을 선물하는 거였다. 지치고 힘들 때 가장 생각나는 곳은 언제나 집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가정의 편안함을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은 가족 간의 '대화'다. 편안함을 느끼는 대화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있다. 아이들은 아직 작고 어리지만, 한 명의 사람이다. 그러니 나이와 상관없이 긍정적인 말을 통해 존중받는 느낌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자랄 수 있다.


아이들과의 대화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비교하지 않는 일이다. 그 비교 대상이 누구든, '네가 더 못하다'는 표현은 아이의 자존감을 부모가 짓밟는 것이고 '네가 더 낫다'는 표현은 아이를 향한 사랑에 조건을 붙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배려 없는 대화와 비교가 있는 가정은 진정한 의미의 '집'이 될 수 없다.


: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많은 공감을 샀던, <꺼내 먹어요>라는 노래 속 한 구절이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은 참 중의적이다. 회사에서 부장님이 나를 괴롭힌다면 당연히 집에 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부장님이 집까지 따라온다면? 그때도 집에 가고 싶을까?


엄청난 싸움만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엄마, 나 이거 샀어!"라고 이야기했을 때, "뭘 이런 걸 사 왔어. 얼마 줬는데?"라는 답이 돌아온다면, 그리고 평소 모든 대화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같은 집에 사는 사이라도 마음이 멀어질 수밖에 없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가족은 불청객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집'의 의미는 단순한 공간을 넘어, 그 공간에서 느끼는 편안함까지 더해졌을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 단순히 몸을 누일 침대가 있다고 해서, 비를 피할 지붕이 있다고 해서 진정한 집이 되는 건 아니다. 집이란 머물 때 마음이 편안하고, 떠나고 싶지 않은 공간이어야 한다.




: 먼저 살아봤다는 이유로, 내가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아이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려는 부모의 태도가 집을 불편한 곳으로 만든다. 그러나 부모세대가 살았던 세상과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너무나도 다르다. 앞으로도 끝없이 달라질 세상 속에서 살아갈 사람은 부모인 내가 아닌 우리 아이다. 그 세상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부모나 아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어떠한 삶의 태도를 요구하기보다는, 아이가 세상을 잘 배워갈 수 있도록 함께 있어 주는 편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부모의 도리는 단지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교육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실수나 실패를 통해 내실을 다지고,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힘을 배우도록 지지해 주는 것. 그래서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아이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존감을 키워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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