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이 함께 쓰는 육아서'는 두 딸을 키우며 수십 권의 육아서를 탐독한 50대 엄마와 심리학을 전공하고 교육계에서 일하고 있는 20대 딸이 함께 쓰는 시리즈입니다. 양육자로서 부모의 시선만으로 쓰인 육아서를 넘어, 그 육아의 대상자였던 자녀의 후기까지 담아보려 합니다.
♣: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시절의 일이다. 첫째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유치원생인 둘째만 데리고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학교를 일찍 마치고 집에 돌아온 첫째가 내게 전화를 걸어 자기도 마트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버스를 타고 오가야 하는 거리인지라, 다시 가서 너를 데려올 수는 없으니 다음번에 함께 오자며 달랬다.
그랬더니 큰 아이가 자신 있는 말투로 "혼자 갈 수 있어!"라고 답했다. 엄마랑 여러 번 다녀봤으니 마을버스를 어디에서 타야 하는지, 어디에서 내려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고 했다. 엄청난 자신감을 보이며 혼자 찾아오겠다는 아이를 믿어보기로 했다. 버스 타는 곳과 간단한 경로, 내리는 곳을 다시 한번 정확하게 설명해 준 후 전화를 끊었다.
아이가 오는 동안 걸릴 시간을 고려해 마저 쇼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차, 어디에서 만나자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는 게 생각났다. 아이에겐 핸드폰이 없었다. 얼른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둘째를 데리고 허둥지둥 카트를 밀고 달리는데, 마트 내에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000 어머님은 아이가 기다리고 있으니 안내데스크로 오시길 바랍니다.'
마트에 도착한 아이가 안내데스크로 직행해 엄마를 찾아달라고 요청한 거였다.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고 하자, 연락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다고 답했다. 그때 첫째의 엉덩이를 토닥여주면서 칭찬을 잔뜩 해주었다. 아이를 믿고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후에는 아이가 혼자 어딘가에 가는 일이 늘어났다. 그럴 때면 항상 가야 하는 이유와 목적지, 누구와 함께 어떻게 갈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했다. 그리고 스스로 경로와 대중교통을 검색해서 내게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 다 보내주었다.
'청소년 되기' 연습
♣: 중학생이 되면 초등학교에 처음 갈 때보다도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더 일찍 학교에 가야 한다든지, 교복을 챙겨 입어야 한다든지 다양한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때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도 많다. 그러니 입학 직후에는 헐레벌떡 준비하고 나가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다.
첫 한 달 동안은 초등학교 때처럼 따뜻하고 기분 좋게 깰 수 있도록 함께 깨워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이제부터는 혼자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제까지 혼자 일어나본 적 없던 아이에게 "너 내일부터는 혼자 일어나"라며 얘기를 던져놓고, 다음날 아침에 가서 "오늘부터 혼자 일어나라 그랬지?" 하며 화를 내봤자 서로 간에 아침부터 기분만 나쁠 뿐이다.
"중학생이 되니까 더 일찍 일어나야 해서 힘들지? 엄마도 더 일찍 일어나서 밥준비 해야 하니까 참 힘들다. 좀 익숙해지면 너는 스스로 알람소리에 깨고 엄마는 그동안 밥준비하고 그러면 훨씬 덜 힘들 거야. 그렇게 해줄래?" 이런 뉘앙스의 얘기들을 기분 좋게 건네면 아이도 서서히 마음 준비를 하게 된다. 어느 정도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었다 싶을 때 "내일부터 해볼까, 혼자 일어나는 거?" 하면서 아이의 동의를 얻은 후 시작하면 된다.
알람소리가 나는데도 아이가 일어나지 못하면 티 나지 않게 도와주었다. 처음엔 아이 방에 불을 켜고 그냥 나오고, 그다음엔 TV 뉴스 볼륨을 키우거나 아이가 늘 듣던 영어 cd를 방에 틀어 놓았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오늘 혼자 일어나기로 약속한 날인데...", "엄마는 밥 준비 다 했는데~" 얘기하면 아이들이 부스스 일어났다. 그게 시작이었다.
늦잠 잔 아이가 지각하지 않으려면 아침식사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늦게 일어난 것에 대해 뭐라 하지는 않았다. 아이도 늦어서 정신이 없는 상태이고, 그 원인은 자신의 늦잠이라는 걸 본인도 이미 잘 알고 있다. 거기에 대고 도움도 안 되는 얘기를 할 필요는 없다. 교복을 입고 준비하느라 허둥거리면, "밥 먹을 수 있겠니?"하고 물었다. 아이가 먹을 시간이 없다고 하면 상을 그냥 치웠다.
늦잠 자서 과일조차도 못 먹고 등교할 때도 있었지만, 아침도못 먹고 가는 게 안타깝다는 이유로 깨워주지는 않았다. 제시간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는 것은 아이들의 책임이고, 학교에 가기 전 먹고 마실 것을 준비해 주는 게 나의 책임이었기 때문에. 엄마를 위해 일어나주고, 엄마를 위해 밥 먹어주고, 엄마를 위해 공부해 주는 아이는 우리 집엔 있을 수 없었다.
♬: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어린이'에서 졸업해야 한다. 내게는 이 사실이 매우 무겁게 다가왔는데, 나는 어린이인 상태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청소년으로 거듭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엄마가 이런 '파일럿 기간'을 준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모든 아이들의 자립에 이런 파일럿 기간이 필요하다. 성인이 된다고 해서 갑자기 자립심이 생길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부터 차근차근 '나의 행동에 내가 책임지기'라는 가장 중요한 과제를 익혀야 한다. 이 시기에 이걸 놓쳐버리면 "나 아파서 회사 못 간다고 엄마가 대신 전화해 줘."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나는 평소에 숙제를 안 하거나 지각하는 일이 거의 없는 아이였는데, 딱 한번 엄청난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방학 중 하루 학교에 등교해 교과서를 받는 예비소집일이었다. 잠이 엄청나게 많은 나는 방학 내내 늘어지게 늦잠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게 습관이 되어서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숙면을 해버린 것이다. 눈을 떠보니 이미 소집 시간을 한참 넘긴 뒤였다.
예비소집일인 걸 까먹고 늦잠을 자버리다니 너무 창피했다. 분명 선생님께 심하게 혼나겠지. "엄마, 나 오늘 예비소집일이었어!" 내 절규를 들은 엄마는 태연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선생님께 전화드려서 설명해야지, 왜 못 갔는지. 교과서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도 여쭤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엄마가 대신 전화해 주면 안 돼...?"라고 물었지만 엄마는 단호하게 네가 얘기해야 할 일이라고 답했다.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수습하는 게 맞다는 것쯤은 나도 내심 알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은 방학이니 그럴 수도 있다며 호탕한 반응을 보였고, 난 몇 번이나 사과한 뒤 전화를 끊었다. 사실 나는 태생적으로 잠이 많고 누군가 옆에서 망치질을 해도 잘 수 있을 정도로 잠귀가 어두운 사람이다. 그래도 이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늦잠을 자서 지각한 적이 없다. 어쨌거나 잠을 못 이기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나라는 걸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아이 혼자 여행 보내기
♣: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첫째가 대구에 사는 친한 언니를 만나러 혼자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중학생이면 혼자서 대중교통을 타고 여기저기 잘 돌아다닐 나이지만, 처음으로 멀리 여행을 간다고 하니 걱정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안전을 위해 그 언니의 핸드폰 번호를 미리 받고, 언니가 역으로 마중 나온다는 것을 확인한 후 KTX로 왕복티켓을 끊어 보냈었다.
그런데 아이가 대구에 잘 도착해서 식사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KTX 탈선사고가 났다. 뉴스에서는 운행이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변수에 아이 혼자 먼 타지에 있다니 걱정이었다. 아이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함께 통화하며 급하게 표부터 취소하고 고속버스를 예매했다. 가슴 졸이는 경험이긴 했지만, 덕분에 아이가 KTX도 처음 타보고 우등 고속버스도 처음 타보는 경험을 쌓았다. 이때 이후로 첫째는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는 걸 좋아하게 됐다.
친구는 겨우 중3짜리 딸을 어떻게 혼자 대구까지 보낼 수 있냐고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언젠가는 겪을 일이다. 본인이 해보고 싶다고,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 때 믿고 보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성인이 아니라서 인터넷과 핸드폰을 이용해서 아이의 동선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렇게 비교적 안전한 상태에서 여행 경험을 쌓은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불안해한다고 해서 세상이 더 안전해지지는 않는다. 아이를 품에만 끼고 있다고 해서 완전하게 안전할 한 것도 아닌 데다, 아이를 언제까지나 내 품에 데리고 있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부모가 함께할 수 있을 때,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어수룩하지 않게 살 수 있도록 경험을 쌓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부모 없이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심을 키워주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 처음 혼자 해외에 간 건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당시 호주에 살고 있던 언니를 만나기 위해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까지는 부모님이 배웅해 주었지만, 문제는 경유였다. 직항 항공편이 없는 도시라 중간에 말레이시아에서 경유를 해야 했는데, 한밤중에 경유지에 내려보니 안내데스크를 비롯해 공항 곳곳에 불이 꺼져있었다. 당연히 직원도 보이지 않았다. 인천공항이 얼마나 친절한 곳인지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헤매다 문득 환승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국제 미아가 될 판이었다. 바로 그때, 눈앞에 직원 한 명이 보였다. 안내직원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 적어도 이 공항에서 일한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지 않을까? 나는 다짜고짜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었으니, 내가 타야 할 항공편을 비롯해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기에는 당시 내 영어가 다소 짧았다는 거였다.
궁여지책으로 직원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이 상황을 설명했고, 무작정 직원을 바꿔주었다. 언니는 영어를 엄청나게 잘하고 말레이시아 공항에도 여러 번 와 본 적이 있으니 해결해 줄 수 있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전화를 끊은 직원은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이 내게 가야 할 방향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도착해 보니 아주 외지고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만약 설명을 듣지 못했더라면 절대 찾을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혼자 출입국게이트를 지나 비행기를 갈아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입국심사까지 거친 일은 내 16년 인생 최대의 모험이었다. 비록 국제 미아가 될 뻔한 약간의 위기가 있었으나, 이때의 경험으로 해외여행에 푹 빠지게 되어 10개국 이상을 돌아다니는 여행자로 성장했다.
방패막 되어주기
♣: 아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자기 주도적인 아이로 자라기까지, 부모가 아이의 방패막이되어주어야 한다. 마음이 단단하게 여물기 전까진 누군가 툭하고 던지는 말 한마디에도 상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 친지가 모이는 자리가 생기면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이를 위해 나와 남편의 생각을 바꾸었다 해도,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춘기 때는 친척들과의 대화에서 상처받는 일이 생각보다 흔하다. 분명 말하는 사람은 나쁜 의도가 없었겠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또 다르다.
누군가 아이에게 깊이 참견하거나, 상처 주는 말을 하려는 분위기가 느껴지면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리고 대화의 주제를 돌리거나,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켜 그 자리를 벗어나도록 유도했다. 이때 말을 하던 주체나 아이, 어느 쪽도 기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친지라면 아이에게도 나름 소중한 사람이니 그 사람에 대한 나쁜 기억을 만들어 줄 필요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평생을 바뀌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바뀔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런 말을 왜 애한테 하느냐고 화를 내면 오히려 어색해져 버린 그 순간이 아이에게 나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 아이는 언젠가 내 둥지를 떠나야 한다. 언제까지고 내 곁에 둘 수는 없다. 아직 못 미덥더라도 스스로 날아보겠다며 연습하는 것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어야 한다. 가끔은 제대로 날지 못해 여기저기 부딪히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가슴 아파도,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다독이며 응원해 주어야 한다. '지켜봄'에 가슴 졸여지는 것이 엄마의 몫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자기만의 방법으로 날갯짓을 연습하다 지친 모습으로 둥지에 돌아오면, 왜 엄마 말을 안 듣냐고 쏘아붙이는 대신 세상살이에 눈 떠보려 애쓰다 지친 아이의 날개를 따스한 시선으로 만져주어야 한다. 언제든 날아들어 쉴 수 있는 부모의 품이 있다는 걸 아는 아이는 편안하게 날아오를 수 있다. 그 안정감이 무엇이든 혼자 해낼 수 있는 자기 주도성으로 아이에게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