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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Dec 09. 2021

마시는 시간 여행

가향 차는 기억을 싣고




웨딩 임페리얼, 마르코 폴로, 로즈 로열, 러시안 캐러반, 비올레트 모나무르, 핑크 베르사유…….


모르는 사람에게는 신비롭게만 느껴지는 온갖 차 이름들. 


개중에는 한국어로 번역하면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이름들도 무척 많습니다. '첫사랑', '달 위에서 차 한 잔', '꿈 이야기', '푸른 정원', '인도의 별'……. 


제가 좋아하는 '첫사랑' 이라는 이름의, 루피시아 사의 여름 한정 차. 첫사랑이 시작하듯 상큼달큼한 레몬그라스와 레몬 껍질로 가향한 녹차로 딱 초여름 시즌에만 구매할 수 있습니다.


차 이름들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요? 일단은 위에 말씀드린 종류처럼 차 회사들에서 상품으로서, 원료를 조합해 만들어내는 차 이름들이 있습니다. 유명한 니나스(Nina's)의 '베르사이유 장미' 차는, 스리랑카에서 나는 실론 티에 장미 꽃잎과 해바라기 꽃, 자몽과 오렌지 향을 가향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실론 티', '다즐링', '아쌈' 처럼 차가 나는 지역이나 품종에 따라서 붙는 이름이 있습니다. 각 지역마다 차의 특징이 다르고 스타일이 다르니, 이 원료들의 조합으로 원하는 차맛을 이끌어낼 수 있겠지요. 


이를테면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는 보통 실론과 아쌈을 일정 비율로 혼합해서 만듭니다. 건파우더 녹차를 원료로 해서 민트 가향을 한 것은 마리아쥬 프레르 사의 '모로칸 민트' 가 되네요. 


한국, 남산을 각각 컨셉으로 잡아서 만든 차도 있고, 우리에게 친숙한 오설록에서도 제주의 여러 풍경을 모티브로 블렌드 티를 출시한 바가 있습니다.


마리아쥬 프레르의 '한국' 차, 포트넘&메이슨의 '남산 블렌드'.


이렇게 차 회사마다 나름대로의 모티프, 나름대로의 멋을 가지고 고유한 향수를 조향하듯이 만들어내는 가향 차들은 그 자체로 맛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어떤 맛과 향으로 컨셉을 풀어냈는지, 어떤 원료를 쓰고 패키지는 어떻게 디자인되었는지, 찻잎 모습은 어떤지 하는 구석구석 모든 요소들이 즐거움이 되지요. 제가 무척 좋아하는 벨로크(Bellocq)사의 차, '인도의 별(Etoile de l'Inde)은 자스민 향이 가향된 녹차인데, 맛과 향에서의 컨셉뿐만 아니라 장미꽃잎과 수레국화, 메리골드 꽃잎으로 알록달록한 색채를 나타내어 선명하고 알록달록한 인도 느낌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두었습니다. 



하지만 또 차를 조금 마셔 보면 안타깝게도, 일각에서는 이런 가향 차들을 '하수들의 차' 라고 여기는 시선도 있습니다. 차는 그저 찻잎 본연의 맛과 향을, 장인의 솜씨에 의해 이끌어내어진 대로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자몽 향' 이니 '오렌지 향' 이니 하는 것이 추가적으로 들어가서는 차맛을 해칠 뿐이라고 보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런 분들께는 마치 기성품인 옷보다도 맞춤 양복이 더 고급이듯, 대형 차 회사에서 나오는 레디 메이드 제품보다도 매 해 유명 다원에서 선보이는 엄선한 품종별 차를 안목 있는 인맥을 통해 구해서, '그 해의 날씨와 다원의 스타일, 작황과 같은 모든 요소에 의해 결코 매번 같은 맛일 수 없이 특별한' 향미를 느끼는 일이 중요한가 봅니다. 


이렇게 써 놓으니 무척 우습게 들리지만, 모 다원에서 몇 년도에 나온 이 품종 차가 3년 전에는 맛이 어땠는데 올해는 어쩌고 하고 말씀하시는 이런 분들 앞에서 좋아하는 차 브랜드의 가향 차 이름 하나를 가장 좋아한다고 대기는 조금 뭐랄까요. 기세가 움츠러드는 느낌이 듭니다.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도 비싼 모모 다원 차에 비하면 브랜드에서 나오는 가향 차는 손쉽게 살 수 있고 섬세하게 맛이 변화하지도 않으니 얼핏 더 간단하고, 덜 고급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정해져 있지요. 오늘 〈마시는 시간 여행〉에서는 당연하게도, 이런 브랜드 가향 차의 역성을 들러 나왔습니다!  


대형 회사에서 나오는 가향 차의 크나큰 장점이 두 가지 있으니 바로 쉽게 구매할 수 있고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매 해 날씨와 작황에 따라 맛이 변한다면 큰일입니다. 가향 차는 지향하는 컨셉이 있고, 사람들도 그 맛을 기억해서 같은 향의 차를 사러 오는 것인데 그 맛이 들쑥날쑥하다면 기업으로서 품질 관리에 실패한 셈입니다. 그러니 가향 차는 언제 사든 같은 맛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들 좋아하는 음악이 한두 곡씩은 있으실 거예요. 그 중에는 요즘 좋아하는 곡도 있고, 삼 년 전에 좋아해서 귀게 익게 들었던 곡도 있고, 오 년 전, 십 년 전, ……. 시간을 거슬러올라 좋아했던 음악은 어쩐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 수 년에 걸쳐서 들으니 같은 음악임에도 내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서 같은 소절이 또 새롭게 들리곤 하는 경험도 있으실 거예요. 가향 차는 마치 그런 좋아하는 음악 같습니다.


제가 홍차에 거의 처음 입문했을 때 가장 처음 반했던 가향 차는 니나스의 '달 위에서 차 한 잔(Thé sur la Lune)' 입니다. 푸른 수레국화 꽃잎이 들어 있어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찻잎은 마치 풍선껌처럼 달콤한 블루베리 향을 뿜어내는데, 이 차를 마실 때마다 저는 마치 차를 처음 마시던 그 때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요. 모든 것이 새롭고, 이 상큼하고 로맨틱한 향기가 저를 둥실둥실 감싸 음악이 가득한 달빛 아래로 데려다 줄 것만 같은 환상적인 기분. 이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저는 어김없이 '달 위에서 차 한 잔' 봉투를 열어요


또, 포트넘 앤 메이슨 사의 대표 차인 포트메이슨(Fortmason) 티. 이 차는 처음으로 스콘이 맛있다는 티 룸에서 주문해서 마셔 보았는데, 당시에는 차에 들어간 오렌지꽃 가향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영 별로였다고 차 일기에 써 둔 구절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문득 그 맛이 없었던 기억조차 잊고 다시 포트메이슨을 마셨을 때 그 잔잔하고 쌉쌀한 향긋함은 마치 일요일 낮 거실에 울리는 피아노 선율처럼, 햇볕 아래 꿀 방울처럼 달콤하게 다가와 깜짝 놀랐던 적이 있어요. 놀라서 차 일기를 뒤져 보며, '분명 전에 별로였던 차가 아니었던가?' 하고 되돌아보았지요. 차는 변하지 않았지만 제 입맛이 변한 것입니다. 


변하지 않고, 쉽게 살 수 있어서 쉽게 곁에 둘 수 있는 가향 차들은 마치 사랑하는 음악과 같아서 잊혀지지 않는 추억도, 어느 날 문득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격세지감도 느끼게 합니다. 마치 눈으로 보고 코로 들이마시는, 그리고 혀로 맛보는 시간 여행이랄까요? 소중한 순간에 어떤 가향 차가 함께했다면 그 차는 언제고 그 시간의 기억을 불러옵니다. 대체로 분위기 좋은 곳에서 차 한 잔 하는 순간은 좋은 기억이기 때문에, 동일한 맛과 향으로 그 기분을 언제든 느낄 수 있지요. 



서양 차 이야기를 줄곧 했지만 차가 세월을 느끼게 하는 점은 어디서나 동일한 것 같습니다. 영화 〈일일시호일〉에서는 12간지에 따라 그 해의 동물이 그려진 찻사발을 꺼내 쓰면서, 12년에 한 번 다시 보게 되는 그 사발을 마주하며 차와 함께한 시간을 마주하는 장면이 있지요. 그리고 차를 마시면서 보니 다들 처음으로 반하게 된 가향 차는 잊지 못하시더라고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향은 무엇인가요? 좋아하는 향기의 차가 있으신가요? 아니면, 아직까지 그런 차를 만나지 못해서, 처음으로 반하는 향기를 만나는 짜릿한 순간을 인생에서 아직 먹지 않은 달콤한 케이크처럼 남겨 두고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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