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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Nov 15. 2021

한국 차에 무슨 전통이 있다고

전통은 만들어갈 수 없나요?




'차를 마셔 보고 싶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일 같다', '잘못 우릴까봐 무섭다' 하는 말이, 주변에서 차에 관심을 가지지만 선뜻 발을 들이지 못하는 분들께서 하시는 말입니다.


차를 마시려면 일단 마음이 편하게 선뜻 해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엄두가 나지 않으니 장벽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번 글에서 이런 장벽의 정체가 알음알음 쌓여 있는 차에 관한 인식이라는 말을 했었는데요, 오늘은 그 중에서도 '한국 차의 전통' 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해요.


문화에서 전통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양날의 검입니다. 고루하게 느껴지거나, 현대적으로 정말 잘 해석해서 최신 것처럼 보이거나이지요. 한국 차 시장에서 '전통' 은 어디에 있을까요? 글쎄, 아무래도 '우리도 근본 있는 차문화다!' 하고 말하고 싶은 분들이 진입 장벽을 쌓는 데 가장 활용되고 있지 않을까요?


차문화에서 전통 찾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한국 차문화는 전통이 있다기에 전통이 너무 없거든요. 그러면서 동시에 보리차는 찻잎이 아니니 차도 아니고, 한국 전통 다례를 한 통 14만원짜리 우전으로 엄숙하게 행하시겠다고 하면아무래도 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그걸 재미있어하며 돈을 쓰겠어요? '이색 체험' 을 넘어서 매일매일 하고 싶어하는 일로서 말입니다.


조선 왕실에서 행하는 정식 다에서는 인삼차를 귀한 차로 생각해서 올렸습니다. 전통을 사랑한다면 일단 인삼차를 받아들이셔야겠지요.




1. 유구하게 대용차를 사랑한 나라


《승정원일기》 에 따르면, 조선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할 때 귀한 손님을 예우하기 위해 고르고 고른 극상품 인삼차를 내었다고 합니다.


"칙사를 맞이하고 영송하는 다례를 할 때에 매번 인삼차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인삼이 비록 진품(珍品)이라도 항차(恒茶; 항시 마시는 차)가 아니기 때문에 맛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입이 즐겁지 않습니다. 비록 금년 봄의 다례시에 목격한 것을 말한다면, 객사(客使)가 찻잔을 받고는 맛보고 마시지 않았으니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

― 정조 23년(1799년)


하지만 인삼차가 입맛에 맞지 않은 중국 사신은 차를 마시지 않았고, 이에 십여 년 후에는 찻잎을 이용한 작설차나 백호차를 내는 것으로 다례에서 사용하는 차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조선은 차를 굳이 문화로 발달시킨 나라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회적 예절을 수행하는 데 다례도 끼어 있었던 데 가깝겠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일기 다례 관련사료 역주서』에서 발췌했는데, 차에 관한 조선 왕실 기록을 '다례에서 절을 네 번 했다.' 라는 대목까지 다 긁어모아도 역주 포함 한 권입니다. 고려까지 올라가면 또 모르겠는데, 솔직히 고려는 너무 멀고, 현대 한국을 살펴보면 거리에는 죄다 카페뿐이며 차 관련해서는 통합된 공인 자격증도 아직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인정합시다. 한국에는 아직 차문화도 없고 이어져 왔다고 할 만한 강한 전통도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전통이 그렇게 필요한가 싶습니다. 전통 좋은데, 전통이 없으면, 없는 전통을 만들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근본이 너무 필요해서 '바른 우리 전통 차문화' 를 찾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재미없는 것만 하니 현대 차문화가 전통 위에 서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보다 최근 오 년간 피부로 느낀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한국에서 차문화가 융성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유구한 전통' 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라고요.


제가 차를 처음 마시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브런치 매거진을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도 확연히 다르게, 이제 차를 마시는 젊은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도 새로운 가게도 많이 생겼으며, 카페에 생겨나는 차 메뉴들도 세분화되고, 차는 고리타분함이 아니라 트렌디하고 멋진 문화라는 인상이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씁니다.


문화 아무래도 경제적 성장 위에서 스스로 움트는 종류이나 보니, 전후 시대가 지나가고, 일부러 '전통을 수호' 하려는 노력도 지나가고, 사람들이 무언가로 마음껏 놀 수 있는 시대쯤에 융성하나 싶어요. 그러니 전통 아닌 바로 지금입니다. 전통을 찾는다고 해도, 지금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없는 전통을 찾고 싶은 분들께 묻습니다. '근본 없는 지금 문화' 는 백 년 후에 전통이 될 수 없을까요?




2. 지금 만들면 우리 차입니다.


문화는 섞이고 변해가는 것이 본질입니다.


이제 500년 정도 되어서 '유구한 역사' 를 가진 일본 다도는, 그 발흥기에 한국에서 수입한 물건은 고려물(物),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은 당물(物), 하고 이름 붙여 좋아했습니다. 심지어는 자국 물건보다 그런 수입 물건들의 격을 더 높게 쳐 줬지요.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수입한 문화는 고유의 체계를 형성합니다. 문화는 자라나는 나무와도 같아서 그 땅에 심긴 채 다양한 영향을 받게 되지요. 나무는 외부에서부터 햇볕과 물을 받아들이지만 그 나무가 그 땅의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요즘 새롭게 인기를 끌고 있는 말차 문화를 보면 전통과 민족과 문화 수용 사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태도가 참 묘합니다. 말차는 일단 일본 다도인데, 아직도 한국에서 대놓고 '일본 문화' 라고 하기에는 껄끄럽습니다. 그래도 말차는 일본 차입니다. 그래서 말차를 진지하게 한다는 찻집에 가 보면 '교토 우지*산 최고급 말차' 라고 써 놓습니다. 그래도 일본 문화는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에서 말차를 진지하게 만드냐고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차 산지


저는요, 직구나 공구 이런 거 엄청 귀찮아해요. 내가 사고 싶을 때 손 뻗어서 살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감과 접근성을 원하는 것뿐인데, 맛있는 말차, 아니, 맛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먹을 만한 말차 하나 사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는 겁니다.


최근 국내에서 말차 사다 화나신 분


애매한 태도와 애매한 전통. 말차 빙수를 요즘 찻집에서 팔기는 하는데 국내 티 브랜드에서 파는 '프리미엄 말차' 도 라떼용이나 베이킹용입니다. 전통 말차 다례라는 것을 하는데 솔직히 젊은층이 보기에는 문화적으로 그렇게 매력적이지도 않고, 죄송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별로 근본이 없습니다. 진짜 전통이 있고 문화적으로 풍부한 상황이라면 말차 빙수도 있고 쑥 말차도 있으면서, 그런데 동시에 국내에서 말차 다도를 위한 말차를 쉽게 살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이 초록색 가루 하나 사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냉정하게 진단하자면 말차는 최근 2년 내에 떠오른 붐이지 전통이 아닙니다. 또 다른 소비자 분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국내에서 다도는 극소수 매니악 문화였고 요즘 우후죽순 생기는 매장들은 다 해외에서 들여온 최신 유행 스타일인데 굳이 전통으로 권위를 세우는 모양이 우습다' 고도 합니다.


전통으로 권위를 세우고 싶지만 '힙'하게도 보이고 싶다.


무척 모순되지만, 말을 조금만 바꾸면 사실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에 여기서 쓴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전통 없음에 구애받지 말고, 지금 가져오는 문화가 남의 나라 전통이었던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정성들여 지금 유행하는 최신 문화를 만들어 백 년 후 전통으로 정착시켜 주세요.


전통은 권위가 아닙니다. 풍부하게 꽃핀 문화를 후대에 이르는 말일 뿐입니다. 차문화를 '지금' 만들어 가는 전통의 주인공으로서 새롭게 차를 마시는 분들을 겁주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물론, 유구한 대용차의 나라에서 보리차는 차도 아니니 하고 있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3. 한국이 차문화를 주도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차는 그저 물을 끓여 마시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15세기 일본 다인인 센 리큐가 한 말을 2021년 한국 다인인 제가 인용하면서, 이 말에 대한 해석으로서 '차는 그저 향긋한 물이다' 라고 하겠습니다. 유구한 대용차의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요.


조선에서 차 문화가 다른 나라만큼 흥성하지 않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대 차 문화가 불교 문화 및 사치 문화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숭유억불 정책을 취하고 검소함을 강조한 조선에서 세력이 적어질 만도 했지요.


그러나 향긋하고 따뜻한 물을 마시는 것이 좋은 사람들은 이 나라에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뭘 달여 먹고 우려 먹고 끓여 먹고시장에 나온 온갖 재료들을 보면 이렇게나 모든 걸 말리고 덖어서 물에 우려 먹는 나라도 없다 싶어요. 그리고 온갖 종류의 다양한 카페가 이렇게나 발달한 나라도 찾아보기 어렵고 말이지요. 한번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차 문화가 얼마나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게 될지 기대가 되는 심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냐고요?


정신 수양이라는 이름하에 차보다도 고상함을 먼저 내세우지 말아 주세요. 전통에 집착하지 말고, 진짜 차와 가짜 차를 소비자에게 가르치기 전에 '어떻게 하면 배우지 않고도 편안하게 마실까' 를 고민해 주세요.


이렇게 마셔도 차고, 저렇게 마셔도 차며, 섞어 마셔도 차고, 대용차도 차고, 향을 넣어도 차라고 좀 합시다. 그리고 그 차를 마시는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방법들이 무엇이 있는지 고민해 주세요.


소비자들이 쉽게 차를 구매할 수 있게 하고, 제다 과정이나 발효도에 대해 몰라도 차맛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설명을 써 주세요. 고상함과 분위기에 내몰려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가격과 설명을 바탕으로 손쉽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차가 별것 아닌 것이자 동시에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될 때, 차가 전통과 권위를 넘어서서 차 자체로 다가올 때 그것이 소비자가 누릴 수 있는 문화가 됩니다.


차는 그저 물을 끓여 따뜻하게 우려 마시는 한 잔일 뿐입니다. 전통과 권위와 문화적 맥락을 넘어서, 혼자서 앞에 놓으면 안정되고, 사람 사이에 있으면 부드럽게 그 사이를 이어 줍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고 조금 아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일상입니다. 저처럼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는 일상이요, 앞으로 백 년간 새롭게 꾸려 가고 싶은 동시대 문화의 일부입니다.





최근에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습니다. 매해 하는 궁궐 축제도, 이번에 새롭게 꾸며진 박물관 프로그램도 '전통 있는' 문화를 현대에 살려내기 위한 다채로운 노력으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문화재청이나 한국관광공사에서 하는 캠페인들도 무척 좋아합니다. 한국이고, 동시대 문화라는 느낌이 물씬 들거든요.


한국의 문화적 역동성을 보면, 이 나라는 '살려내고', '보존하는' 전통 문화를 넘어서 창조하고, 변용하고, 섞어다가 또다시 새롭게 만들어내는 전통의 가능성을 듬뿍 품고 있다는 믿음이 들어요. 그리고 그것은 나무가 바깥에서 온 햇볕과 물로 자라듯이 한국만의 것이 아니지만 또한 반드시 한국만의 것이 될 것임도 믿습니다. 팝도 아이돌도 한국 문화가 아니었지만 K-pop이 대표적인 한국 문화가 되어 버렸듯이 말이에요.


한국 차문화에 백 년짜리 충실한 근본은 없지만 백 년짜리 미래는 꿈꿀 수 있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그 시작은 누구나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차이며,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차이겠지요. 요즘다인은 지금 차를 마시는 모든 사람들이 '요즘 다인' 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차를 마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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