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관
누구에게나 나약함이 있다. 따라서 다자이는 만인을 변호했다.
내가 다자이 오사무에게 처음 관심을 가지고 또 반하게 된 계기는 〈직소(駆込み訴え)〉다. 국내에는 〈유다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초기에 번역되었고, 최근에는 원제를 살려 〈직소〉라고 되어 있는 것도 보았다. '직소'로 번역된 '駆込み訴え'란 과거 일본에서 억울하거나 긴급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 일반적인 행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지방의 영주나 대신에게 사정을 아뢰는, 실존하는 제도였다.
〈직소〉는 억울한 사정을 고발하는 일인칭 주인공의 말로 전문이 이루어져 있는 단편인데, 다자이 오사무는 실제로 이 단편을 구술이라는 방식으로 집필했다. 받아 쓴 사람은 다자이의 두 번째 아내인 미치코 씨다.
다자이는 방의 코타츠에 앉아서 잔을 기울이면서, 누에가 실을 토해내듯이 구술했다. 막힘이 없었고 정정하는 대목도 없었다. 평소와 완전히 다른 그의 표정에 압도당해, 나는 그저 기계적으로 펜을 움직일 뿐이었다.
쓰시마 미치코, 《회상의 다자이 오사무》 (2008)
당시 나는 다자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인간 실격》을 어쩌다 읽고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작가라고 생각하고 치워 두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직소〉는 달랐다. 단 몇 문장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처음에는 전문을 읽은 것도 아니고, 동료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인용한 대목을 보고 '읽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몇 자를 읽자마자 빨려들어갔고, 끝까지 읽고 나서는 가슴이 고통과 안타까움으로 내려앉는 듯했다.
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알아주시지 않더라도 단지 당신 한 사람만이 알아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아무리 깊이 당신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사랑합니다.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 저는 지금 이 현세의 기쁨만을 믿습니다. 다음 세상의 심판 같은 것을 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저의 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애정을 왜 받아주시지 않는지요. 아아, 그 사람을 죽여주십시오. 나으리. 저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안내해드리지요.
(…) 저, 제게 은 삼십. 그렇군요, 하하하하. 아니, 사양하겠습니다. 얻어맞기 전에 그 손을 치우십시오. 돈이 좋아 고소한 것이 아닙니다. 손 치워! 아니, 죄송합니다. 받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상인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저는 우아한 그 사람으로부터 항상 경멸을 당해왔었지요. 받겠습니다. 저는 어차피 상인입니다. 미움을 받고 있는 금전으로써 그 사람에게 훌륭히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게 가장 어울리는 복수의 수단입니다. 꼴 좋다! 은 삼십으로 녀석은 팔립니다. 저는 전혀 울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직소〉 (1940)
〈직소〉의 가롯 유다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첫 대목부터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는 익명의 고발인으로 등장해, '나쁜 사람'이자 '죽어야 마땅한 사람'에 대해 횡설수설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일인칭의 휘몰아치는 감정, 인간이 인간에게 품는 애정과 질투가 솔직하고도 고독하게 드러나는 드라마다. 증오한다고 했다가 사랑한다고 했다가 번복을 거듭하며 헤매는 언어가 도리어 상대에 대한 깊고 복잡하며 진실되기까지 한 감정을 드러낸다. 예수를 배신하고 밀고한 제자로 알려져 있는 유다가 어떤 심정적 정동으로 고발에 다다랐을지를 소설적 허구로 상상해, 구어체의 '직소'로 엮어낸 솜씨가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이 치밀한 구성과 아이디어, 몰아치는 감정이 단 하나의 번복이나 수정도 없이 즉흥으로 뱉어낸 구술이라니. 〈직소〉와, 이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당시 나에게 일종의 경이였고 한 작가에 대한 신화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나도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직소〉와 비슷한 분량의 단편을 마치 구술처럼 홀린 듯 계획 없이 써내는 경험도 하게 되어 당시의 경이는 많이 희석되었지만, 〈직소〉는 여전히 내가 몹시 좋아하는 다자이의 작품 중 하나이다. 〈직소〉를 계기로 다자이의 다른 단편들을 읽으면서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에 입문했으니 특별한 추억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과 케이크와 커피를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 아시노 공원의 카페 '에키샤'를 떠나, 다자이의 생가인 사양관으로 향하는 길에 '다자이 오사무 추억의 광장'이라는 것이 있어 잠시 들렀다. 삼면이 벽돌 벽으로 되어 있는 빈 공터에, 벽마다 다자이 오사무의 개별 작품 이름들이 명패처럼 붙어 있는 기념 공간이었다. 〈직소〉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광장에 잠시 머물며 마치 오래된 옛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듯 추억이 있는 각 작품들의 제목을 돌아보았다.
'다자이 오사무 추억의 광장'에서 몇 분을 더 걸어, 드디어 이번 여행의 목적인 다자이 오사무의 생가, 사양관에 도달했다. 다자이 오사무처럼 말하자면 실은 도착하기 전부터 질리고 있었다.
"다자이의 집은 일대의 대지주였다",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쌓은 집안을 부끄러워했다"라는 언급으로 다자이의 집이 부자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차마 짐작하지 못했다. 멀리서부터 일반 주택가의 한 블럭을 다 차지하는 붉은 벽돌 기와 담장이 보였다. 본채와 정원, 소작농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쌀을 보관하던 곳간들까지 대지 면적 680평에 달하는 대저택이 바로 다자이 오사무의 집이었다. 지나치게 한 개인에게 집중된 부를 보면 "혁명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농담처럼,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났다."라고 하는 다자이의 대표작 《사양》의 대목에 절로 공감이 가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사양관의 '사양'도 해당 작품에서 따온 이름이다.
어쨌든 나는 사양관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더욱 가관이었다.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하여 지은 호화로운 건물의, 복층 구조로 된 거실 공간이 온통 탁 트여 있어 실내인데도 마치 커다란 광장에 있는 것 같았다. 수확 철에는 이곳에 삼백 명이 넘는 소작농들이 줄을 서서 소작료로 낼 쌀의 품질을 검사받았다고 한다. 번쩍번쩍 닦은 아오모리 측백나무들이 당시의 부를 과시하듯 기다랗게 켠 내장재로 집안 구석구석을 두르고 있다. 당대에는 웬만한 재력으로는 쓸 수 없었던 재료인 유리창도 장지문들을 대신해 광택을 뽐낸다. 금 병풍이니 서양식으로 꾸며진 이 층의 두터운 카페트와 샹들리에니 할 것도 없이 규모만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식구들만 열 명이 넘고, 하인들도 서른 명이 넘었다던 살림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벽장에는 소반과 쟁반도 십 수 개씩 당장 쓸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다. 나는 순간 다자이 오사무처럼 의기소침하고 기분이 좋지 않아져서, 입구 근처에 있는 못생긴 다자이 오사무 인형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다자이 오사무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 열 세 살까지 이 집에서 살았고 그 이후부터는 학교와 가까운 곳에 방을 잡아 하숙하면서 통학을 했다. 이런 화려한 대저택에서 살다가 처음 바깥 세상에 나가게 된 도련님의 심정이란! 어릴 적부터 남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예민하고 유약한 성격이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고뇌가, 이 호화로운 사양관을 보면서 짐작이 가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성장기는 일본에서 한창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불리는 때였다. 즉 민주주의 열풍이었다. 여러 정치•사회적 배경이 있지만, 침략 전쟁을 반대하고 남녀 평등을 주장하며 노동자의 단결권과 파업권을 쟁취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좌파 정당들이 설립되고 대학에서는 자유로운 사상 탐구를 지향하며 천황은 지배자가 아니라 국가의 한 기관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일었다. 문화계에서도 국가 주도적인 분위기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런 분위기는 시골 구석구석까지 퍼져, 다자이는 어머니가 "요즘은 민주주의라는 것 때문에 살림이 어렵다"라고 푸념했다고 회고한다. 일대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던 집안의 기가 약한 도련님을 또래들이 놀려댄다. 다자이 오사무는 지주인 자신의 집안을 부끄러워했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좌익 사상에 동경을 품었다. 대학에서는 전공과 상관없이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고 좌익 운동에 간여하다 경찰서에 잡혀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것에는 분명 새로운 감각이 있었다. 협조가 아니다. 독재다. 상대방을 예외 없이 다 공격하는 것이다. 부자는 모두 나쁘다. 귀족은 모두 나쁘다. 돈 없는 일개 천민만이 옳다. 나는 무장봉기에 찬성했다. 기요틴 없는 혁명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나는 천민이 아니었다. 기요틴에 오르는 역할이었다. 나는 열아홉 살짜리 고등학생이었다. 반에서는 나 혼자만 눈에 띄게 화려한 옷을 입었다. 이래서는 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자이 오사무, 〈고뇌의 연감〉 (1946)
그러나 다자이는 강단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언제나 약자에게 이입했기에 민주주의가 대두하면 살림이 어려워지는 집안의 도련님이면서도 소작농들에게 공감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가 지나면 일본은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 전체주의적 야욕을 드러낸다. 국가가 '치안 유지법'이라는 것을 발효하여 전쟁에 동조하지 않는 사상범들을 잡아넣고, 2차 세계대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나라 전체를 덮기 시작하자, 다자이는 정부의 눈치를 보는 행보를 보인다. 겁이 나서일 수도 있고 가장으로서 다시 꾸리게 된 가정을 챙기지 않고 운동에 뛰어들 결심까지는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한때 열렬히 몸담았던 좌익 운동에 지치고 질려서일 수도 있다. 그는 문학 외에 삶에서 한 가지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간 적이 없다. 오직 문학만을 진심으로 밀고 나가려니 다른 것을 밀고 나갈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주저하고 번복하고 번민하는 인간의 내면, 스스로 부끄러운 삶과 사고의 과정들을 통렬하리만치 솔직하게 털어놓은 사소설¹을 통해 나약함은 죄가 아니라고 다자이는 말하고자 했다.
자신을 변호하려는 동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약자를 바라보고, 약자 중에서도 더 약해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면모에 주목하던 다자이에게는 그 시대 인간 보편의 약함이 보였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가정을 내버려두고 잡혀가 신세 진 사람들을 배신하기는 두려운 것이다. 그런 약한 마음이 일생을 지배하는 인간도 있고 인생의 한때를 차지하지만 결정적인 후회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하루하루 갈팡질팡할 수도 있다. 다자이는 그 약함을 변호한다. 누구에게나 나약함이 있다. 따라서 다자이는 만인을 변호했다. 그 약한 면모가 부끄러워서 감추고 싶은 사람들이 "왜 이런 것을 소설로 쓰느냐"며 욕한다. 타인의 약함에서 나온 행동으로 상처입은 사람들이 끔찍한 인간상이라고, 변호받을 가치가 없다며 다자이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욕한다. 각자 다 일리가 있다. 그렇게 만인이 다자이의 소설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불멸의 문학이다.
1) 사소설(私小説): 일본 근대 문학에서 대두된 장르 중 하나로, 작가가 자신의 사생활을 소재로 삼아 허구를 거의 섞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서술하는 작품을 뜻한다. 특정 주제 의식을 피력하기보다는 작가 본인의 감상과 생활을 드러내는 고백 문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 묘사'를 추구한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 사조와도 영향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