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칸 야스다야
패배를 계기로 무결한 새출발을 하는 일본이 아닌, 패배한 상태를 인정하는,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역사를 부정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일본이 되기를, 다자이는 바랐다.
이런 마음에서 탄생한 작품이 《사양》이다.
쇠락을 받아들이는 마음. 패배를 사랑하는 마음.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사양관에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다자이를 그렇게까지 좋아한다는 자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다자이 문체로 쓰는 다자이 생가 여행기라면서 공들여 그의 문체를 재현하고, 여행지에서 겪은 내용에 더불어 다자이의 온갖 작품을 소개하고 신변잡기까지 예시로 들며 다섯 편을 연재한 주제에 무슨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실은, 다자이에 대해서는 여행만큼이나 여행기로 독자들에게 내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깨닫고 좋아하게 된 부분이 많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들을 글로 쓰려니까 조사하게 되고,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으로 만들다 보니 그의 삶의 궤적 전체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연재의 마지막에 더 하도록 하자.
여하간 적당히 작품을 좋아했고 인생사도 놀릴 지점이 많으니까 관심이 있는 편이었다. 여행 코스 중에 다자이 관련 장소가 있어서 들를 수 있다면 끼워넣는 정도다. 사양관에 들르기 위해 아오모리 코스를 끼워넣은 23년도의 일본 여행에서 반 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막내 동생이 일본에 가 보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자이만큼 많은 것은 아니지만 나도 현대 한국 기준으로는 형제가 많은 편에 속한다. 막내 동생은 나보다 열 여섯 살이 어려서 아직 중학생이다. 아직 일본에 가 본 적도 없다. 여비를 대 줄 테니 동생을 데리고 일본에 다녀오라고, 어머니가 권했다.
"어디를 가고 싶은가" 물었더니 도쿄라고 한다. 애니메이션 굿즈를 사고 영화를 보고, 파르페를 먹고 싶다고 했다. 여비를 받으니 어린이의 취향에 맞춰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외에는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을 말하지 않는다. 날짜 안에 최대한 배치해도 시간이 남는다. 그렇다면 근대 일본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후지산 근처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중에서도 〈동경 팔경〉이 이즈 반도의 시골 여관을 배경으로 하고, 또 후지산 이야기도 종종 나오지 않는가.
그렇게 나는 료칸 야스다야에 방문하는 계획을 짜게 되었다.
하이큐 극장판과 점프 샵 쇼핑, 파르페 가게를 원하던 막내로서는 반쯤 사기를 당했다고 할 수 있다. 엿새간의 여행 동안, 나는 막내의 요구 사항을 모두 만족하는 동시에 누마즈로 시작해 이즈 반도 내륙을 관통하고 아타미를 거쳐 이즈의 동해안으로 올라와 도쿄로 복귀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다자이 오사무가 머물며 그의 양대 대표작을 썼던 공간들을 둘러보게 되었다. 시즈오카 누마즈의 '야스다야' 료칸에서는 《사양》의 전반부가, 아타미의 '기운각'에서는 《인간 실격》이 집필되었다. 변명하자면 일본 여행이 처음이라니 막내동생에게도 전통적인 료칸과 멋지게 꾸며진 온천을 경험시켜 주고 싶었는데, 마침 도쿄에서 멀지 않은 누마즈에 다자이 오사무가 체재한 료칸이 있었던 것이다. 숙박을 결정하면서 나는 고객 메모 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다자이를 좋아해서 이번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야스다야의 객실은 손님이 방을 지정할 수 없고, 빈 객실 중에 랜덤으로 배정이 된다. 당연히 객실들 중에서도 다자이가 머물며 글을 썼던 '그 방'이 있다. 객실을 지정할 수는 없지만, '그 방'이 비어 있다면 반드시 '그 방'으로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그 외에도 나는 이전 사양관 방문 때처럼, "모처럼의 일본이니까"라는 마음으로 기모노 등 입을 옷들을 다리면서 여행 준비를 마쳤다.
이즈 반도는 도쿄의 서남쪽에 있다. 신칸센으로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이고, 기후가 따뜻하고 온천이 풍부해 예로부터 휴양지로 인기가 많았다. 이는 근대 일본 문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즈의 ○○로 요양을 떠나……." 같은 대목이 다자이 오사무가 아니더라도 작가들의 일대기에 종종 등장한다. 이즈 반도의 서북쪽에는 후지산이 있고, 산줄기를 따라 이즈의 내륙 산간 지대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람이 사는 마을은 주로 해안가에 모인다. 대개가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내가 이즈를 방문한 것은 삼 월 초였다. 아침에 도쿄에서 출발해 누마즈 시내를 들렀다가, 누마즈에서도 시골인 야스다야에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바다에 낙조가 떨어지고 있었다. 시내에서 야스다야 앞까지 가는 지역 노선 버스가 해안가를 달리는 동안, 만조로 부풀어오른 바닷물이 무서울 정도로 지면과 가까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과 신기한 마음이 동시에 들어서 나는 빠져들 것처럼 창 밖 바다를 줄곧 쳐다보았다.
야스다야에 도착하면, 오래된 여관답게 먼저 앉을 자리를 안내해 준다. 시즈오카의 짭짤한 녹차와 온천 만쥬를 주기에 먹으면서 체크인을 했다. 짐을 맡기고 나서 저녁 식사까지 시간이 조금 났다. 여관 앞 바다를 구경하러 길을 건넜다. 이차선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관 맞은편은 백사장이다. 모래사장 가장자리에 지는 해를 받아 새빨갛게 빛나는 이즈의 칸자쿠라(寒桜)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칸자쿠라는 개화 시기가 일 월 하순부터 삼 월 초까지다.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시기에 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진한 분홍색의 겹벚꽃이, 끝물에 가깝게 만개한 꽃잎들을 주렁주렁 달고 아직 차가운 바닷물이 들어찬 우치우라 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자이가 야스다야에서 머문 것도 이 무렵이다. 1947년, 이 월 말에서 삼 월 초. 피란해 있던 생가인 가나기 마을에서 전쟁의 끝을 맞고, 전후 어수선한 도쿄로 돌아올 방안을 모색하다가 막 미타카 자택으로 이사한 직후다. 다자이는 작품을 쓰기 위한 작업실로 자택 외에도 여러 공간을 돌아다닌 작가로, 야스다야에도 《사양》 집필을 목적으로 방문했다. 실제 집필이 반 달 되지 않는 투숙 기간 동안 이루어졌으니 구상은 그 이전부터 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자이는 지주인 자신의 집안을 부끄러워하며 고등학교 시절부터 좌익 운동에 가담했고, 대학 시절에는 경찰들의 추적을 피해 아지트를 전전하면서 몇 번이고 유치장 신세도 졌다. 그러다가 가정을 가지고, 주변인들의 설득 및 집안 배경 등이 작용해 아오모리 경찰서에서 "다시는 좌익 운동을 하지 않겠다"라는 맹세를 하고 집필에 전념했으며, 전쟁 중에는 최대한 정부의 검열을 피해 활동할 수 있도록 작품의 의의를 포장하거나 우회하기를 택했다. 그리고 때는 1947년. 시대는 변화하고, 계급은 이어진다. 다자이 오사무의 형은 여전한 지역 유지로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문학상을 받게 해 달라는 호소의 편지를 심사위원에게 보내고, 제발 생활비를 꾸어 주십사 주변에 사정하던 젊은 날의 다자이 오사무도 이제 신진 작가는 아니게 되어, 후배의 작품을 평가하고 문예지에 추천하며 때로는 주변인에게 작은 인정을 담아 수표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안정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 글을 쓰려고 다자이의 연표를 뒤적거리는 내 손에는 바로 이듬해인 1948년에 그가 결국 투신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돌이킬 수 없는 미래처럼 쥐어져 있다. 그러나 때는 아직 그로부터 한 해 전이다. 1947년 3월 초의 다자이 오사무는 아직 이 여관에, 바다가 출렁이고 벚꽃이 피는 이즈의 야스다야에 있다.
스스로도 작가로서 중기의 걸작을 쓰고 싶다고 말하던, 만 서른 일곱의 다자이. 이 때의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일본의 편을 들었습니다. 멍청한 부모라도, 어쨌든 피범벅이 되어 싸우다가 패색이 짙어져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상태가 된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자식도 괴상하지 않습니까?
(…) 실제로 그즈음의 정부는 멍청하고 나쁜 부모였습니다. 도박 뒷수습을 위해 처자식의 옷을 다 내다 팔아 서랍 속은 텅텅 비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도박을 일삼으면서 홧술 따위나 마시고는, 배고픔과 추위로 훌쩍대는 처자식에게 '시끄러워! 가장을 뭘로 보는 거야, 무시하지 마! 곧 큰 부자가 될 수 있는데 그걸 왜 몰라! 이 불효자식 같은 놈들!' 따위의 말이나 외쳐대니 도통 손댈 엄두가 나지 않았지요. 저도 잡지에 게재된 소설이 전문 삭제되기도 하고, 장편소설의 출판이 금지되기도 하고, 정보국의 요주의 인물이 되는 바람에 서점 주문이 뚝 끊기기도 했습니다. 그사이에 두 번이나 전쟁으로 피해를 입어¹, 이거야 원 정말로 지독한 일만 겪었는데, 그래도 저는 그 멍청한 부모에게 최선을 다해 효도하자고 생각했습니다.
(…) 그리고 일본은 참패했습니다. 정말이지 그런 꼴로 심지어 일본이 이겼다면, 일본은 신의 나라가 아니라 악마의 나라겠지요. 만약 거기서 이겼다면, 저는 지금처럼 일본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패배한 지금의 일본을 사랑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랑합니다. 얼른 그 '포츠담선언'의 약속을 전부 이행하여, 작지만 아름답고 평화로운 독립국이 되기를.
부끄러움을 잊은 나라는 문명국이 아닙니다.
다자이 오사무, 〈답신〉 (1946)
이 때쯤 일본은 '과거와 단절하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 열풍이었다. 패전 후 연합국 사령부(GHQ)의 주도로, 황실 재산을 동결하고 전쟁 수뇌부를 처벌하는 데 더해 농지 개혁 등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정책들이 잇달아 발표된다. 이것이 과거의 군국주의 정부에 반하는 '민주주의'로 부상하고, 숨 죽이고 있던 좌파 지식인들이며 평론가들이 과거의 일본을 성토하는 대회를 벌인다. 다자이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제 치하에 있다가 해방을 맞은 관점에서 이 시기 역사를 보게 되는 한국인으로서는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감정이다. 탄압의 시대가 끝났으니 숨어 있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핵심은 일본이 가해자라는 것이다. 1945년 8월이 오기 전까지, 신문과 서적들은 전쟁의 영광과 일본의 번영에 대한 말을 늘어놓고 있었고, 사람들은 또 어쩔 수 없이 그런 언설을 믿으며 살아가기도 했다. 검열된 작품이 모두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 살던 어린이들의 수필집²을 읽은 적이 있는데, 조선총독부 글짓기 대회에서 입상한 이 글들은 물론 군국주의 일본의 입맛에 맞는 검열을 통과한 작품들이었겠지만 '전선에 나가 대일본제국을 위해 힘쓰는 오빠를 위해 나도 일상에서 슬픔에만 빠져 있지 말고 활기차게 살아야겠다', '(만주에서 일본군의) 승전 소식이 들려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축하 행렬을 벌이는 것을 구경하러 나가 즐거웠다'와 같은, 그 시대에 태어나 군국주의 프로파간다를 배우며 살아가는 어린이들로서는 충분히 느낄 만한 진솔한 감정들을 볼 수 있었다. 어른들이라고 달랐을까? 또, 일본인들이라고 달랐을까?
다자이는 이에 대해 '일본인은 모두 전쟁에 협력했다³'며, '전쟁 중 고난을 모조리 부정하지 말라⁴'는 입장을 가진 것이다. 우리는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전쟁에 협력했고, 공습을 당하고 굶주리면서도 진심으로 일본을 사랑하기도 했고, 바로 어제까지는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과거의 자신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처럼, 오늘은 정반대의 말을 청산유수로 늘어놓을 수가 있는가. 부끄러움도 없는가?
말하자면 패배를 계기로 무결한 새출발을 하는 일본이 아닌, 패배한 상태를 인정하는,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역사를 부정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일본이 되기를, 다자이는 바랐다. 이런 마음에서 탄생한 작품이 《사양》이다. 쇠락을 받아들이는 마음. 패배를 사랑하는 마음.
이 마음을 소설로 표현하기 위한 힌트를, 다자이는 체호프의 희곡 《벚꽃 동산》에서 얻는다. 러시아 귀족 사회의 몰락을 그린 《벚꽃 동산》은,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한 귀족 가문의 영지가 경매로 팔려나가기까지의 과정이 줄거리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시대 귀족의 사고 방식과 행동이 인물에게서 잘 드러나는데, 이를 풍자나 비판이 아닌 담담한 사실 묘사처럼 다룬다. 결말까지의 반전 같은 것도 없이 벚나무가 가득하던 아름다운 영지는 자본가에게 팔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빈 무대에 나무를 베는 도끼 소리만 들린다. 그럼에도 작품은 묘하게 밝고 쓸쓸한 뉘앙스를 남기는데, "일본의 《벚꽃 동산》을 쓰겠다"며 호언장담하던 다자이도 아마 몰락 그 자체를 그려내는 이 작품의 묘한 긍정성에 끌렸던 것 같다.
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짧은 바닷가 산책을 마치고 야스다야로 돌아오자, 나이 지긋한 주인이 객실로 나와 동생을 안내한다. 중정 옆 복도를 지날 때, 창밖으로 불이 켜진 작은 방이 하나 보였다.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자료가 있는 작은 기념관입니다. 원할 때 언제든 둘러보실 수 있어요."
멀리서 보는 기념관 바닥에, 내가 가나기에 다녀왔을 때 부끄럽다고 생각하던 다자이 오사무의 동상을 찍은 사진 액자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우스움과 더불어 왠지 모를 반가움을 느끼면서 나는 대답했다.
"언제든 가 봐도 되는 건가요? 저, 다자이 오사무를 정말 좋아해서요."
"역시 그러시겠지요."
잠깐. '역시 그러시겠지요.'는 무슨 대답이란 말인가? 본래는 시골 휴양지라 나잇대가 있는 사람들이 주로 오는 낡은 여관에, 예약 메시지에까지 '다자이를 좋아합니다.'라고 쓰고, 기모노에 하카마까지 차려입은 채 숙박하러 온 젊은 여성은 아무래도 다자이 오사무 팬으로 보인다는 것인가? 물론 내가 다자이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눈에 다자이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인다니 이건 패배감이 든다. 하지만 계단을 올라, 내가 묵을 곳으로 바로 '그 방'이 소개되면서 나는 패배를 사랑하는 기쁨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 '다자이 오사무 『사양』 집필의 방'이라는 문패가 야스다야의 2층에서 나를 맞아 주고 있었다.
1) 전쟁 중 다자이는 공습으로 도쿄 미타카의 자택이 불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고후의 처가로 피신했고, 그러나 고후의 집도 소이탄으로 일대가 불바다가 되면서 다시 쓰가루 생가로 피난했다. 가나기 마을도 공습에서 예외가 아니었는데, 동네 사람들 중에서는 "(커다랗고 눈에 띄는)저 집 지붕이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라며 불만을 표시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3) 1946년 1월, 이부세 마스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4) 1946년 1월, 쓰쓰미 시게히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