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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Sep 01. 2021

차를 배워야 시집을 잘 간다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 게시물에 포함된 모든 사진은 본문에서 말하는 가게와 관련이 없습니다.




때는 5월, 신록이 무성한 아름다운 봄날.


차를 꽤 오래 좋아하게 되면서 골동품과 고미술품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저희 〈운월시사〉 는 멋진 찻사발과 차통이 어딘가에 있다면 구매하고 싶다! 는 마음을 가지고 티룸이며 갤러리를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차에 입문하고 얼마 되지 않으면 모르는 가게에 들어가기 조금 망설여질 수 있지만 그렇게 쭈볏거리기도 이제 한참 과거의 일. 관심이 있어 보이는 물건을 진열한 곳이라면 어디든 씩씩하게 들어가 "안녕하세요!" 하고, 붙임성 넘치게 인사를 하는 저희들이었지요.


그 날 들른 곳은 무척이나 고상한 느낌으로 꾸며 놓은 가게였는데, 보통 가게들보다 층고가 반 층 정도나 높고 디자인은 휘황찬란하면서도 컬러는 차콜블랙과 톤다운된 그레이로 중후한 느낌을 주는 내부 곳곳에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굉장한 분위기였지요.


구경을 하고 있으니 곧 사장님께서 가게를 소개하러 오셨습니다. 사장님은 젊은 손님들이 차에 관심이 있는지, 차를 배워 본 적은 있는지 궁금해하시더니 이윽고 이 시즌에 시작하는 티 클래스가 있다며 저희에게 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장님은 엄선한 커리큘럼에 따른 티 클래스를, 교양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 큰 사명감을 가진 분이셨는데 그래서 티 클래스에서 교재로 사용할 차를 얼마나 비싼 가격에, 저급한 차들이 아니라 추천받아 마시는 것만으로 경험치가 쑥쑥 오르는 고급 차들로만 선별해서 가져오는지, 찻값과 티클래스 비용을 생각해 보면 사실상 밑질 때도 있고, 여러 테마(홍차, 보이차, 등등)와 시간대(직장인반, 평일반, 주말반, 등등)에 맞추어서 많은 클래스를 운영하기가 힘들어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건강도 나빠졌지만 이렇게 올해도 클래스를 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말이지 굉장한 어필이었습니다. 20분 정도 들은 멘트를 정리하자면,


    • 차 같은 것을 배워 놓아야 우아한 사람이 된다.

    • 교양 있고 우아한 사람이 되어야 남자는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여자는 시집을 잘 간다.

    • 내 클래스는 교재로 1억이 넘는 비싼 차를 사용하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여러 의미로 일동 입이 딱 벌어졌는데 들키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 네. 그렇군요. 그렇구나… 음, 넵…!"






저희는 차콜블랙과 톤다운된 그레이로 꾸며지고 중후한 소품들이 잔뜩 있는 약간 어두운 가게를 나와서 도로 햇볕 아래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잠시 말이 없다가


"저는요, 저런 분들이 좀 안타깝다고 생각해요."


"안타깝다고요? 답답한 것도 아니고요?"


"저 분은 비용도 적자고 스트레스까지 받으면서 티 클래스를 운영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저 분에게 '젊은이들에게 차를 가르쳐서 교양을 갖추고 지위가 높아 보이게 해서 시집 잘 가게 하기' 는 중요한 일인 거예요. 그 일에 그만큼이나 노력을 들이고 돈을 쓸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는 거죠. 하지만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가치가 아니잖아요? 좀 더 즐겁고 자신의 행복을 위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은데."


비싼 차, 우아해 보이는 모습, 사회적 인정.


숨이 막힌다고 느낄 정도로 안타까웠습니다. 우아한 티 클래스를 위해 만방으로 노력하는 사장님은 차에 대해서 엄청나게 공부를 하셨겠지요. 비교해서 마셔 볼 (비싼) 차를 들여오려고도 여러 곳과 연락해야 할 테고, 차를 마시고 산지나 특징을 알 수 있도록 코와 혀를 훈련시켰을 것이며, 차들의 다양한 향미와, 향미에 얽힌 에피소드나 지식이나 용어나 하는 수많은 내용을 수강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교재도 만들어야 했겠지요. 


그런 노력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단지 '무식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결혼에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 이고, 좋다는 근거는 '1억이 넘는다', '한 통에 8천만원짜리 차다' 라고만 설명된다면 안목을 기르는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게 마시는 차는 즐거울까요?



그 분이 가게에 가져다 놓은 미술품이며 물건들은 멋졌습니다. 진열된 물건에 관심이 생겨서 들어갔던 만큼, 요모조모 뜯어 보며 아름다움을 감상할 만큼 멋진 작품들이었어요. 그러니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 분은 그 물건들이 어디가 예쁜지, 어떤 기준으로 가게에 물건을 골라서 들여 놓는지 자신의 미학에 관해 말할 수도 있었고, 티 클래스 이야기를 하자면 차를 알고 즐길 때 (사전 지식이 아예 없는 것보다) 재미있게 마실 수 있는 좋은 점을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차가 1억 원짜리이고, 비싼 차를 마셔서 안목을 길러야 좋은 차를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안목을 기르는 이유가 뭘까요? 내가 좋은 것, 내가 봐서 기쁜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가게 사장님 말을 인용하자면,


"들여 놓으신 예쁜 물건들을 보니까 기분이 좋아서, 오늘 좀 지쳤었는데 힘까지 나는 것 같아요."


"아유, 예쁜 걸 보고 힘이 나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모르는 사람들은 봐도 아무 감흥이 없을 물건들을, 나는 보는 것만으로 힘이 난다니 그렇게 좋은 게 어딨어."


정말로 그렇습니다. 교양이든 안목이든 내가 즐겁게 문화를 누리기 위해서 쌓고, 즐겁게 누리다 보면 자연히 쌓이는 것이지요. 사회적으로 우러러보아지는 기준을 맞춰야 해서, 이게 남들 보기에 좋은 건지 알아내려고 문화를 배우는 것은 오히려 문화에 갇히는 일일 뿐입니다. 비싼 차인가? 유명한 산지에서 나왔나? 요즘 좀 이름 있는 사람들이 이 차를 마시나? 그런 질문 말고, 


좋아서 하고 있는 건가? 나는 지금 즐겁나?


하고 물어봅시다. 


처음 얘기한 가게 사장님이 '남을 위한 차' 의 극단에 있어 보이셨지만, 우리도 조금씩은 그런 불안을, 혹은 장벽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좋은 건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지, 나는 아직 아는 게 없는데, 나는 초보니까 좋은 걸 알아보지도 못할 것 같은데, 하는 생각들이요.


'배워야만 차를 마실 수 있다' 라고 주장하는 홍보 문구들은 그런 약점을 파고듭니다. 하지만 기억해 주세요, 차는 차를 알아보기 위해서 마시는 것도 시집을 잘 가기 위해서 마시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가 즐겁게 마시는 차가 지금 최고라는 것을. 아는 게 없다면 없는 대로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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