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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May 29. 2021

비 내리는 교토의 책방: 사카이마치 101

교토 훈옥당


훈옥당(薫玉堂).


1594년에 창업하여 현대까지, 420여년의 역사를 지닌 교토의 향 가게입니다. 처음에는 교토 고찰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 약재를 유통하면서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오랜 시간을 짐작해 볼 수 있네요.


이런 오래된 가게들은 전통이 깊은 만큼 자부심도 대단하고, 그런데 현대까지도 장사를 이어 오고 있는 만큼 가게의 특징과 철학을 녹여내 세련되게 기획한 상품을 둘러보는 맛도 있습니다. 불을 이용해 태우게 되는 전통 방식 향뿐만 아니라 향낭, 향을 입힌 장식품, 편지지 등 각종 응용 상품들도 있습니다.


사진 : 훈옥당 공식 홈페이지


훈옥당은 전국 주요 사찰에 향을 납품하고 있고, 또 일반인을 위한 향 체험 교실을 운영하고도 있습니다. 오래된 가게들이 그렇듯, 단순한 '좋은 향기' 이상으로 문화를 녹여내어 만들 수 있는, 일종의 작품으로서의 향은 어떤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향 재료를 반죽해 가늘고 기다랗게 만든 선향(線香)은 예전에도 두루 쓰였고 현대에도 손쉽게 불만 붙이면 감상할 수 있는 향이어서 기본 상품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사카이마치101(堺町101)은 훈옥당에서 천연 배합 선향으로 대표적인 제품인데요, 천연 재료를 사용했고, 한 가지 재료만이 아닌 여러 재료를 섞어 향을 만들었고, 선향 타입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저는 새로운 가게를 처음 접할 때면 샘플러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두루 한 번씩 맛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한 통 사기 위한 준비단계이기도 하고, 한 가게에서 나오는 다양한 상품을 둘러보다 보면 그 가게의 특징도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이번에 구매한 것은 훈옥당의 다양한 배합 향 시리즈를 한데 묶어 세 줄씩 태워 볼 수 있는 샘플러 패키지. 따스하고 우아한 향 계열로 채워진 주(朱), 시원하고 고상한 계열로 구성된 남(藍) 모두를 구매했습니다.

각 6종 종류별로 3줄씩 선향이 들어 있고, 향을 꽂아서 태울 수 있는 향꽂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시리즈에 포함된 선향들은 각각 교토에서 유명한 장소들을 테마로, 전통과 현대 향료를 조합해 표현했다고 합니다. 전통 위에 서서 현대 교토를 소개하는 훈옥당의 시선이자, 향기로 돌아보는 교토 명소 한 바퀴 여행이기도 하네요. 저는 태울 때 각각 장소를 찾아보고, 상상하면서 감상하는 즐거움이 무척 커서 좋았습니다.


두 시리즈는 다섯 종의 서로 다른 향, 그리고 두 패키지 모두에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이 사카이마치101(堺町101) 입니다. 기본 향이자, '꼭 한번 맛보세요!' 라는 느낌이 되겠네요.



이 향에 불을 붙이면 참으로 묘한 느낌이 듭니다. 처음에는 목조 건물이나 절의 향기, 오래된 책 향기 같다가, 그런 고건물 복도로 부는 서늘한 바람 같기도 합니다. 피워 놓고 문득 맡고 있으면 장미 같은 향도 납니다. 신선한 장미보다는 우아한 브랜드에서 내놓는 장미 향수 같습니다. 그러다가, 비 오는 교토 산넨자카 언덕의 물에 젖은 돌길 같기도 하고, 파우더리하게 부서지는 향은 마치 그런 가느다랗게 내리는 빗줄기.


사진 : 歲月之歌


향 설명으로는 니시혼간지 거리의 정취, 훈옥당 매장 1층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온갖 향목들과 상품들을 통튼, '훈옥당' 자체를 이미지한 향이라고 하는데요. (훈옥당은 니시혼간지와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앞에 있습니다.) 저는 어쩐지 비 오는 언덕길, 미묘하게 달콤한 듯도 하고 서늘한 듯도 한, 나무 냄새도 나고 어둡고 촉촉하고 아늑하기도 한. 골목을 들어서면 숨어 있듯이 자리해 있는, 교토의 어느 책방, 오래된 서적이며 옛날 문고본을 등불 아래 늘어놓은 가게가 떠올랐습니다. 역사도 현재도 지금 담고 있는 복잡미묘한 추억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향기입니다.  



사카이마치101(堺町101)은 훈옥당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조향법(향을 배합하여 만드는 일종의 레시피)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옛날 향기도 아닌 것이, 옛날과 지금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것이, 이 레시피도 아마 맨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겠지요.


향 끝에 불을 붙이면, 세월을 거듭하여 과거와 지금이 혼재하는 오래된 시간이 말을 겁니다.





* 매거진의 모든 리뷰는 주관적 감상이며, 가게 연혁 등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 이상 제가 즐기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옮깁니다. 따라서 현재 시점과 다르거나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가 있을 시 알려 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 직접 찍은 사진 외 인용되는 사진은 브랜드 공식 페이지에 게재되어 있거나,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C) 라이선스에 해당하는 저작물입니다.


* 훈옥당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사진과 함께 주요 전통 향료를 소개해 두고 있습니다. 이 매거진에서 리뷰하는 향 이야기에서 자주 나오는 재료들이니, 향료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둘러보셔도 좋겠어요. (구글 번역기를 돌리셔도 읽을 만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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