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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Apr 11. 2020

나의 사랑하는 전자 이웃들

인심과 마음과 그 사이의 차(茶)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목이 말라 근처 집 문을 두드립니다.


"이보시오, 지나가던 길인데 물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습니까?"


집 주인은 물을 한 바가지 건네 주고, 여행길에 대한 이야기라거나 요즘 형편 이야기 같은 것을 나눕니다. 길을 물어보기도 하고, 이러다가 어쩌면 하루 묵어 가게 된 그 집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르지요. 옛날 이야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르면, 음. 근처에 편의점이 없는지 찾아볼 것 같습니다. 500ml 생수를 사겠지요. 요즘 도시는 인구밀도도 높고 근처에 가게들도 많겠지만,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물 한 잔만 좀… 이라고 말하기는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듭니다.


지난 세기에는 사서 먹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물, 그리고 '뭔가를 마실 수 있는 공간' 자체까지도 재화로 여기게 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으니까요. 카페 음료가 비싼 건 자리를 이용하는 가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21세기입니다만, 아직도 '앉아서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가 통용되는 곳이 있습니다. 찻집입니다.


무슨 당연한 소리이냐고 여기실지 몰라도 제가 차의 세계에 들어와서 얼떨떨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부분이었습니다. 아니, 찻집에서 차를 그냥 주다니요?


요즘 온갖 트렌디한 카페들을 떠올려 보면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지요. 딸랑. 아이고,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오늘 원두가 맛있게 볶였어요. 흠. 강매인가?


사장님과 특별한 안면이 있지 않아도, 들어오자마자 엄청나게 조예 깊은 고객의 포스를 뽐내지 않아도 됩니다. 찻집들에서 손님에게 차를 한 잔 대접하는 건 아직까지 그냥 인정입니다. 물론 모든 찻집이 이렇다는 것은 아니고, 가게에 따라 완전히 카페처럼 운영하는 곳도 많습니다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제가 지나가다 찻집에서 얻어 마신 차가 수십 사발은 되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는 함께 차를 취미로 하는 이웃 분과 우편으로 차 교환을 했습니다. 이것 조금, 저것 조금, 평소 드시는 걸 보면 이 차도 좋아하시겠지, 그런데 보내는 김에 이것도 한 번 맛보시면 좋지 않을까? 주섬주섬 포장한 양이 한 박스.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진 메모지를 골라 쪽지를 써넣습니다. '최근 댁에 새 고양이 식구가 생겼다기에 고양이가 그려진 봉투를 보내 봅니다.'


택배를 부치고 돌아오는 길에 날씨가 파랗게 좋고 어쩐지 기분이 좋습니다. 며칠 후, 제 앞으로도 소포가 도착하네요. '선물을 꾸리는 것도 이렇게 즐거운데, 얼굴을 보면 얼마나 즐거울까요!' 편지를 맺는 한 줄이 마음을 울려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펜팔 친구를 구하고 싶다는 로망은 한 번쯤은 다들 가지지만 실행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편지에 무슨 말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상대를 찾기도 애매하지요. 일부러 펜팔 전용 사이트에 가입하기에는, 글쎄, 그렇게까지 편지 친구에 절실하지는 않은데.


있으면 분명 일상에 소소한 기쁨은 되겠지만 굳이 나서서 하기에는 좀……. 그런데 그렇게 해서 지나가 버린 소소하고 또 특별한 기쁨이 얼마나 많은가요?



예쁜 차 다이어리를 마련해 그날그날 마신 차를 일기처럼 쓰고, 맨 뒤에는 그간 이웃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놓습니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교류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남에게 차를 보내기도 하고 차를 받기도 합니다. 구실로 삼아서 편지도 쓰고 같이 먹으면 좋은 간식도 동봉하지요. 서로를 그다지 깊게 알지 않아도 요즘 펼치는 찻자리나 취향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보낼 것도 보낼 말도 있습니다. 정성 담긴 소포를 받으면 고맙다고 인사를 보내고, 받은 차를 마신 감상으로 시음기를 써서 안부를 전하는 일도 일상적입니다. 차를 보내는 데는 마음이 있고, 향기와 함께 다정한 사람들의 인정이, 혼자 있는 내 식탁 위에 피어오릅니다.


저에게 차가 맛 이상으로 따뜻한 기억이 된 데는 이런 이웃들과의 교류, 다정한 차 문화가 해 준 역할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차 일기 노트의 맨 뒷장에, 그 노트를 쓰는 동안 이웃들에게 받은 편지들을 함께 넣어 놓습니다. 문득 펼쳐 보면 사각사각 써 보내 주신 메시지들에서 그 때의 소리마저 들리는 듯합니다.









원래 빈 손으로 놀기는 어렵습니다. 펜팔도, 물 얻어 마시기도, 대화도 어렵지요. 찻집에서는 아직도 모르는 사이에 오가는 정담이 있습니다. 밝은 해 아래, 비가 오는 날에, 눈이 소복소복 내릴 때, 물 끓는 소리와 차 향이 피어오르는 공간은 어쩐지 편안한 기분이라 어렵잖게 말을 주고받게 됩니다. 차라는 구체적인 소재 하나만으로 오갈 수 있는 다정한 일들이 이렇게 아직도 있습니다.


향긋함만 마시는 걸까요, 아니오, 그 날의 볕과 바람, 그리고 그윽한 마음이며 인사들을 이 한 잔에 담아 마십니다. 여기에 필요한 건 따뜻한 물과 차를 마실 잔 하나. 글을 읽고 있는 당신께도 권해 보고 싶어요.


어쩌면, 차 한 잔. 함께 드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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