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차는 어쩌다 드시게 되셨어요?라고 한다면

by 혜하




차는 어쩌다 드시게 되셨어요?



라고, 찻집을 다니다 보면 어쩐지 질문을 받게 됩니다. 다른 취미도 그런가요? 아니면 '아직 젊어서 웬만해서는 차를 마시지 않을 사람' 으로 보이는 걸까? 차가 2,30대 트렌드로 자리잡기 시작한 지금으로서는 서너 해 전 일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글쎄요, 어쩌다 보니……. 하고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얼버무렸지만 실은 대답이 있습니다. 너무 뻔하고, 너무 뻔하니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아 말이 길어질까봐 슬쩍 감춰 놓은 답인데요, 찻집에서 나누는 담소로는 아무래도 내 차 입문에 관한 마음보다 그날 마시는 차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서는 그러나 제 차 입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브런치에서는 아무래도 아무 차 소개보다는 제 이야기를 하고 싶기 마련이니까요!




차를 마시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가 제 대답입니다. 차는 어쩌다 드시게 되셨어요? 차를 마시고 싶어서요. 역시 너무 뻔한 대답일까요? 하지만 저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데.


이 이야기를 하려면 제가 생각하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말씀드려야 합니다. 차가 일종의, 우아한 라이프스타일의 표상이듯 제게도 차 마시는 사람에 관한 이미지가 있었지요. 잠시 시간을 되돌려 그 시절의 저를 만나, 차 마시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그 이미지를 들어 보도록 할까요.


Q. '차 마시는 사람' 은 어떤 사람인가요?

A. 차 마시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차로 가득한 찻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번 그 찻장에서, 그 날 마시고 싶은 차를 골라서 우려 먹어요.


심플한데요? 하지만 이번에는 이 대답을 한 머릿속에 접속해서, 이 내용을 한번 재생해 볼까요?


차 마시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차로 가득한 찻장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각국 다양한 브랜드에서 좋아하는 차를 사다가 눈높이에 맞는 커다란 나무장에 채우고, 햇볕이 아름답게 드는 낮 그 알록달록한 찻장 앞에 서서 '오늘은 어떤 차가 어울릴까' 고민해요. 이 날씨, 이 기분, 이 느낌. 오늘은 이 차다! 하고 정하면 틴을 꺼내 놓고 먼저 물 끓이기부터. 주전자는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능숙한 손끝에서 차가 우러나면 꼭 생각한 좋아하는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이제 실체가 드러났군요! 가만히 보면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차와 차를 고르는 안목만이 아닙니다. 차로만 가득 채울 수 있는 눈높이에 붙은 커다란 나무장이 있어야 하고, 그런 나무장을 설치할 수 있는(혹은 그런 장이 붙어 있는) 채광 좋은 집도 필요하고, 햇볕이 아름다운 낮 느긋하게 모아 놓은 차 컬렉션을 바라보면서 무슨 차를 마실까 고민할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합니다. 갖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죠.


이런 이미지는 꼭 동화책 속에 나올 것 같은 유유자적한 삶이어서, 그렇지만 저는 그게 '차 마시는 사람' 이 된다면 막연히 모두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차를 마시자고 마음 속으로 '결정' 했습니다. 마치 신데렐라의 성을 꿈꾸는 어린 시절처럼 말이지요.




지금, 누가 봐도 어엿한 '차 마시는 사람' 이 된 저는 채광 좋은 집과 차로만 채운 벽면 부착형 삼나무 찻장과 차 만들기 전용 테이블과 차를 마실 공간을 다 갖고 있을까요?


답은 아실 겁니다. 아니겠지요. 그로부터 5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만약 지금 집이 있다면 저는 차 이야기가 아니라《20대, 5년만에 내 집 갖기의 꿈을 이루다》 매거진을 연재하고 있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 마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 꿈을 이루었느냐고 하면 저는 그렇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차를 마시고 있거든요.


저는 지금 벽면에 가득한 꿈의 찻장은 없지만 원목 책장을 하나 사서 차와 찻잔으로만 가득히 채워 놓았고, 그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예쁜 옥색으로 된 찻잔 닦는 전용 행주도 옆에 걸려 있습니다. 옆에는 초록색으로 잎을 늘어뜨리는 디시디아가, 여름마다 잎을 무성하게 만들어 찻상에 그늘을 드리우는 벤자민이 자라고, 모든 낮 모든 때 해가 잘 드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주말 낮, 혹은 재택 근무를 하는 낮 해가 아름다운 순간이면 차를 마시자고 생각합니다. 티 테이블은 멋있는 원목으로 구하고 레이스 깔개를 깔아 놓지는 못했지만 차를 마시기 위한 책상을 따로 샀어요. 차 수건, 모래시계, 차 저울, 티 코스터 같은 부대 물품들을 좋아하는 모양으로 예쁘게 진열해 둡니다. 선반 위에는 화병도 있고 매번 좋아하는 물건과 그림엽서로 인테리어를 바꿉니다. 물 끓는 소리는 부엌 쪽에서 들립니다…….



제가 떠올린 '차 마시는 사람' 에게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날 내가 원하는 차를 고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부동산이나 좋은 직장보다도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취향이 필요했습니다. 종종 물질적이고 확실한 부가, 부동산을 가질 수 있는 만큼의 많은 부가 경험, 취향, 지식을 대유해, 경험과 시간의 수업료가 필요한 미식이며 차며 향이며 하는 것들이 고급 취미이자 소위 상류층의 취미로 오해받는 세상입니다만, 저는 5년만에 부동산은 가질 수 없어도 차 고르는 안목은 가질 수 있었습니다.


차 마시는 사람이란 뭘까요.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뭘까요. 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삶이 바뀌어 가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 이미지는 차 마시는 사람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여유가 있는 사람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차고가 딸린 자가에 살며 주말에는 서핑을 가는 삶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 그리고 또 저도, 언젠가 또한 바로 지금,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삶의 방향을 고르고 있겠지요. 어떤 것도 옳거나 그른 선택지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차 마시기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여기서는, 오 년 전 제가 꿈꿨던 '차를 마시는 사람의 삶' 을 말씀드립니다.


여전히 커다란 부는 없지만 마음의 기쁨이 있습니다. 커다란 안정이 없어도, 불안한 것은 불안한 대로, 차를 만들 때 고요한 마음은 고요한 대로 모두 가질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차를 찻장에서 고를 수 있게 되었고, 감각과 미각과 아름다움을 일상 많은 곳에서 발견하는 하루하루를 살고, 약속을 잡을 때 뭐 하지… 하고 고민하는 공백이 '새로운 찻집이 있는데, 함께 가 보지 않을래?' 제안하는 설렘으로 바뀌었습니다. 전문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취미가 생겼고, 전국 찻집 지도를 머릿속에 넣었고, 차가 아니었다면 만날 리 없었던 사람들을 알고 갈 일 없었던 곳을 가 보며 아는 세계를 넓혔습니다.



좋은 취미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건강을 해치지 않고 마음을 쏟아 즐겁게 임할 수 있는 취미라면 뭐든지이겠지요. 그리고 그 중에 하나, 취미로서 가질 수 있었던 꿈, 차를 마시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한 마디가 저를 어디까지 이끌어 주었는지 돌아보면, 삶이란 참으로 다채로운 가능성으로 가득하다는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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