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다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21세기다우면 뭐 어때

by 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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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출근해서 하는 아침 루틴이 있습니다. 우선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손을 씻고 와서 밀린 메일과 다이어리를 확인하고요,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하는 시급한 일이 없다면 도자기 텀블러와 유리병을 들고 정수기로 향합니다. 텀블러와 병을 따뜻하게 데우고, 텀블러에만 뜨거운 물을 잔뜩 담아 자리로 돌아와요. 서랍에서 오늘 마실 차를 꺼내 찻잎을 두 스푼 덜어 유리병에 넣고 곧장 뜨거운 물을 옮겨 붓습니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물티슈로 닦으며 2분 정도 기다리고, 우러난 차를 다시 도자기 텀블러에 옮겨 부으면 끝. 오전 내내 마실 차가 완성됩니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 유리병이라고 했지만 딱 사무실에서 쓰기 좋은, 차 주전자의 가장 모던한 형태라고나 할까요. 취직도 하기 전에 이걸 미리 사뒀던 스스로의 혜안에 감탄하며 차를 우립니다.)


제가 매일 아침 차를 마시는 이유는, 이렇게 차를 준비하고 우리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할 일은 어떤 것들이 있고,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며, 이걸 해결하기 위해 누구와 어떤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차분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잠깐의 여유를 누리며, 혹시 누군가 업무 도중 나를 열 받게 해도 정중하고 성숙하게 대해야지 다짐합니다. 현대 직장인을 위한 빠르고 간단한 정신 수양 꿀팁으로 소개해도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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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채셨나요? 저는 회사에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후에도 마셔요. 다만 오후 업무가 끝나면 재빠르게 퇴근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도자기 텀블러에 티백만 퐁당 담급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팀원들은 이 모습을 매일 보는데도 제게 취미가 무엇이냐, 주말에는 주로 뭘 하냐 물었을 때 차를 마신다고 대답하면 그들은 놀랍고 새로운 정보라는 듯이 반응합니다.


"다도? 혹시 막 한복 입고 앉아서 조신하게 하는 그거?"

"에이, 설마요. 젊은 아가씨가 그러겠어요. 호텔 가서 애프터눈 티 마시겠죠. 그렇죠?"

"아아, 그거~. 비싼 취미를 가졌네."


저는 그냥 차를 마신다고만 말했는데 벌써 당신들끼리 의견을 교환하고 결론을 내리는 걸 보면서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고민합니다. 조목조목 반박할까, 대충 그렇다고 말하고 넘길까. 그러다 마침내 왜 차를 마신다는 말이 곧장 '한복 입고 하는 다도'나 '비싸고 화려한 호텔 애프터눈 티'로 연결되는지 생각에 빠집니다.






딱히 차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도 누구나 차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는 짐작할 겁니다. 하지만 알고보면……, 상상 이상으로 오래되었습니다. 중국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내용을 제외하더라도 주나라 때 이미 차를 공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당나라 때 쓰인 최초의 차 전문서적 『다경(茶經)』(육우 저)을 계기로 차가 한반도를 비롯한 주위 국가에 전파된 게 벌써 1,200여 년 전이네요.


바로 그 오랜 시간 동안 차 문화는 엄청나게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많이 간과합니다. 차를 마시는 방법도 수차례 바뀌었고,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도구도 그에 따라 계속 변화했습니다. 당연히 절차나 형식, 예법도 달라졌겠지요.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클래식'한 음다(飮茶) 문화, 그러니까 한복 입고 조신하게 우리는 다도법이나 애프터눈 티로 대표되는 화려한 서구 살롱의 티는 차의 역사상 아주 최근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최근의 양식이라 해도 지금 보면 무척 구시대적으로 보이지요. 이런 형태로 차 문화가 성행한 이후 또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요즘은 누구나 근처의 아무 카페에 들어가도 밀크티나 녹차 정도는 주문할 수 있습니다. 티백이 세상에 나온지도 한참 되었고, 일반적으로 탕비실의 기본 구성은 노란 커피믹스와 현미녹차 티백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차를 마신다고 하면 앞서 나열한 두 가지 인상을 먼저 떠올리고 차를 멀고 어렵게 느끼고 있습니다. 차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요.


지구 반 바퀴를 하루 안에 이동하고,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기계로 또 다른 가상공간에 순식간에 접속하는 상황이 이제는 너무 당연해서 굳이 말하기도 우습지요. 불과 100년 전과 같은 생활 양식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문화라고 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예전부터 이어지던 방식을 고수하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달라지는 생활 양식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스레 취사선택하거나 새로운 것을 도입하고, 이에 따라 차 문화는 계속 변화할 겁니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요.


심지어 다원성, 다양성의 가치가 부각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굉장히 다양한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의 처지가 다르니 필요한 심적 안정감도 다르고, 가질 수 있는 금전이나 시간적 여유도 다릅니다. 이렇게 다양한 환경의 사람들에게 천편일률적인 다도나 차 문화를 적용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될까요? 이 시대의 차 문화는 특히나 어느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저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차를 즐기고, 차를 통해 중심을 잡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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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경우를 예로 들어볼게요.


Case 1-1. 요즘의 저는 직장인이라 번거롭지 않게 하나의 텀블러와 하나의 유리병 만으로 간단하게 차를 우리고 즐길 수 있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업무 도중 차를 마시겠다며 이삼십 분씩 시간을 내어 음미하기 어려우니 한두 종의 차를 벌크로 사무실에 두고 머리와 마음을 정리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Case 1-2. 대신 주말이나 휴일이면 차를 마시기 위해 번거로운 것들을 굳이, 그것도 최선을 다해 합니다. 조심히 다루어야 하는 다도구들을 늘어놓고 요리조리 위치를 바꿔가며 어떤 조합과 배치가 더 보기 좋은지 궁리합니다. 다도구에 따라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기 위해 실험도 해보고요. 설거지거리가 늘어나는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Case 2. 몇 년 전의 저는 대학생이었습니다. 금전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많았고 이래저래 선물 받은 차도 많았지요. 자취방에 있는 다기라고는 인터넷 최저가로 구한 유리 숙우와 기본형 티팟 각각 하나, 그리고 본가 부엌장에서 가져온 찻잔 두 조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차를 마시며 그 맛에 최대한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생김새며 향, 맛,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까지 세세하게 찾아내서 기록했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 방식으로 차를 마셔보았지만, 공통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화났을 때 마시면 차분해지고, 날씨가 좋을 때 마시면 즐거워지고, 초조할 때 마시면 편안해지고, 머리가 복잡할 때 마시면 개운해졌지요.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어 마침내 차를 마시는 그 자체에서 오는 만족감이 심리적, 정신적 편안함으로 이어지는 감각이 있습니다. 저는 이 감각을 부르는 행동과 마음을 통틀어 '다도(茶道)'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차를 마신다면, 그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자신을 돌아보고 보살필 수 있다면, 형식이 달라져도 차(茶) 안에는 여전히 도(道)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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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프로젝트 《요즘다인》, 〈언제 한번 차 한잔〉 에서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사무실에서 다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청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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