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는 미각을 전문적으로 훈련했으니까……."
"야, 그런 게 어딨냐?"
한때 동생이 말했을 때 웃어넘겼지만 차를 마시면서 배우는 것도, 그 때문에 발달한 감각도 확실히 있는 듯합니다. 향긋한 물 한 잔을 마시면서 맛은 어떤지, 향은 어떤지, 질감이나 떪음, 맛의 온도, 위치 같은 것까지 찾아내서 즐기는 일을 모두가 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흔히 차는 복잡하고, 맛을 느낄 줄 모르면 즐길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이라면 그 맛을 알아내는 과정이 재미있다고 하겠지만 지금 와서는 다르게 말하고 싶습니다.
'차는 분위기가 40퍼센트다.'
영화 한 편을 볼 때도 카메라 워크나 의상 구성이나, 음악과 연출 모든 부분을 다 누리는 건 아닙니다. 차에서 분위기가 40퍼센트라면 맛은 대강 절반만 알아도 넉넉히 차를 즐긴다고 할 수 있겠지요.
분위기란 뭘까요? 적당히 멋지게 꾸며져 있는 가게에서 창 밖으로 흔들리는 꽃을 보며 차를 마시면 분위기가 있는 걸까요?
답을 말하자면 사실 그렇습니다. 아마 그 찻집에서 마셨던 차를 그대로 집으로 가져와 마신다면 다른 느낌이 들 겁니다. 온도, 습도, 조명……. 차맛에는 실제로 많은 것들이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경험에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요소들이 영향을 줍니다.
찻집을 다니다 보면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나가다가 잠시 들른 가게에서 잠깐 앉아서 차 한 잔 하고 가라며 내준 차를 마시게 되기도 하고, 이미 벌어져 있는 찻자리에 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에도 참가해 요즘 지내는 사정을 듣게 되기도 하지요. 박람회나 축제에서 차 농가 부스에 들르면 올해 햇차를 만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스타일로 만들고 싶었는데 이런 맛이 난다는지 하는 이야기들과 함께 봄바람을 맞습니다.
멋진 가게도 돌아보면 그 날의 기억이 있습니다. 날씨가 청명했는지, 밤늦게 돌아갔는지, 찻집으로 접어드는 언덕길이 가팔랐는지 안은 아늑하게 꾸몄는지 모던하게 꾸몄는지. 그리고 동행한 사람과는 어떠했는지. 테이블보에 비치는 햇볕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했기도 하고 여기처럼 집에 선반을 달면 좋을 텐데, 하고도 말했던 것 같습니다.
강변의 차 소풍, 〈한강차팟〉은 '제대로 된 차의 룰' 에 따르자면 얼렁뚱땅입니다. 물은 보온병에, 다탁은 캐리어 위에 깐 천으로, 차마다 98도니 95도니 정해져 있는 온도를 무시하고, 각자 마시고 싶은 차며 쓰고 싶은 잔을 가져와 되는 대로 모여앉아 잔디밭에서 한 차 피크닉이지요.
그렇지만 돌아보아도 '아, 그날의 차는 정말 좋았지.' 하고 생각이 됩니다. 이 부분을 주목해 볼까요. 그 날 마셨던 '차맛' 이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차가 맛있었지' 보다, '그 날 마신 차가 참 좋았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차는 물론 맛이 중요하지만,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한 40퍼센트 정도는 그 날의 차가 좋기 위해 그 날이 좋아야 합니다.
야외 소풍에서 마시는 차는 아무래도 제대로 준비된 가게에 비하면 물 온도나 조건을 세심하게 맞출 수도 없고 필요한 도구를 잊어버리고 가져오지 않아서 단계를 건너뛰기도 합니다. 맛 자체의 질을 따지면 집에서 혼자 신경써서 우린 차가 훨씬 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돌아보아도 즐겁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순간의 차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햇볕일까요, 바람일까요? 온도, 습도? 함께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을 통틀어서 저는 분위기라고 부릅니다.
좋은 분위기와 분위기를 즐기는 마음. 그것은 빼놓을 수 없는 무형의, 차를 맛있게 마시기 위한 일부입니다.
일기일회一期一會.
지금 이 순간은 살면서 단 한 번이고, 지금 이 만남은 그래서 살면서 단 한 번.
다도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이 말은 단지 만남이나 손님 대접에만 구애되지 않습니다. 단 한 번인 이 순간을 얼마나 마음으로 기쁘게 즐기는가. 그것이야말로 '분위기를 즐긴다' 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국 다도에서도 차가 맛이 다는 아니라고 하는 셈이며, 차가 음료에서 문화로 뛰어오르는 지점은 이곳에 있을 겁니다.
음료보다 문화라고 하니 거창하게 느껴지시나요? 하지만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에 따르면 차를 문화로 즐기기 위해 할 일은 쉬운 것뿐이지요. 음미에 자신이 없어도 될 수 있는 대로 하면서 분위기를 즐기는 거예요. 영화 이론을 몰라도 되는 대로 즐겁게 보는 것처럼, '차맛을 느끼기에 아직 부족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기보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차 한 잔' 하는 순간을 즐겨 보는 겁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에, 옷깃이 날리고 손 안에 든 찻잔이 기분 좋으면, 그 때 살며시 중얼거립시다. '일기일회'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