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다인 인스타그램에서는 그 날의 날씨에 어울리는 차를 소개하는 '차 일기예보' 컨텐츠가 있습니다.
차 일기예보 담당은 제가 아니지만, 오늘처럼 하늘이 무거운 날에는 자연히 떠올리게 됩니다.
단총일까? 소종 홍차도 좋겠다. 이런 묵직한 날에 어울리는 뜨겁고 스모키한 향 너머로 흐린 구름을 뚫고 올라갈 것 같은 상큼한 레몬 향, …….
<레몬 향 파도> 에서 말했던 그 정산소종이지만, 오늘은 조금 더 훈연이 묵직한 소종 홍차를 마셔 볼까 해요. 그래서 첫인상은 스모키입니다. 정산소종은 소나무 장작을 태워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연기를 쐬어 만들거든요. 이런 향이 코를 뒤덮으니 빽빽하고 매캐하다고 여길 만도 한데, 신기하게 맛이 맑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순간을 넘기고 나면 입 안에서 모여 있던 귤나무 꽃봉오리가 터지는 것처럼 은은하고 상큼하게 레몬 향이 퍼져 차를 마시는 제 정수리를 훅 끌어올립니다. 비 오는 날 즐기기에 그야말로 딱이에요.
어둑어둑 따스한 실내에서 마시는 홍차는 꼭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비 오는 날이면 무조건 정산소종이다! 하고 정할 수도 없습니다. 비의 느낌에 따라 어울리는 차도 달라지는걸요. 오늘은 안개가 낀 듯 어둑어둑한 날씨에 오는 비지만, 가뜬하고 촉촉하게 내리는 비도 있습니다. 나무를 더 싱그럽게 만들 것 같고 공기에서 먼지를 없애 청명한 하늘을 기다리게 하는, 톡톡 내리는 가랑비가 오는 날이면 푸릇푸릇하고 맛이 좋은, 낮은 지대에서 자라는 청향 차나 중국 녹차도 어울릴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향이 너무 섬세하고 맑기보다는 적당히 두터운 질감이 있으면서, 그럼에도 차 맛 자체는 봄처럼 푸르면 좋겠지요.
그런 날에는 조금 가볍게 나온 수선도 좋겠습니다. 수선(水仙)은 이름에도 물이 들어가 있네요. 물의 신선이라니 왠지 벌써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요? 암차 중에서 향은 육계, 순후함(淳厚; 두텁고 맑음)으로는 수선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비단 같이 매끄러운 수선의 질감은 따스한 난꽃향으로 몸을 도탑게 감싸 줍니다. 노란 찻물은 꼭 빗방울 달라붙은 창문 너머로 흘러드는 불빛같이 찻상을 은은히 밝히겠지요.
날에 따라 다른 차를 떠올리는 것은 몸이 알고 있는 차의 맛과 향, 실은 그것을 넘어선 느낌이자 내가 차와 만났던 경험을 되짚어서 떠오르는 듯합니다. 으슬으슬 추운 날에 오뎅 국물이 떠오르는데, 딱 무가 커다랗게 썰려 들어가서 시원하게 끓인, … 하고 생각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마시고 싶은 차를 생각하는 것뿐인데 추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그건 아마도 그 차와 함께했던 많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날에 파전 하나 막걸리랑 딱 걸치고 싶다 할 때 문득 떠오르는 어떤 기억들. 시장통 평상에서 친구랑 마주앉아 먹었던 그때. 유리 통창에 주룩주룩 흐르는 빗방울을 옆에 두면서 마셨던 홍차. 그때 틀어져 있던 음악. 차는 추억의 사진첩입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추억이 다르니 이런 비 오는 날 떠오르는 차도 음식도 다르겠지요. 딱 떠오르는 그것이어도 딱 좋겠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추억을 상상하며 소종, 단총, 수선을 드셔 보셔도 좋겠습니다.
혹은 여러분의, 여러분만의, 오늘 이 날씨에 딱 생각나는 차 한 잔. 어떠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