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향 파도

어느 일요일 오후

by 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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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할일을 다 해치운 느긋한 주말 낮입니다.

일어나서 식사를 챙기고는, 바느질거리들을 가져다가 시원하게 몽땅 수선해 버렸지요.


그러면 이제 딱 차를 마실 참인데, 어쩐다…….




정산소종 전통공예 작야우(昨夜雨).


오늘 차 선정은 퍽 명확합니다. 어젯밤에 비가 왔으니, 오늘은 작야우를 마셔야지요.


정산소종이니 홍차이고, 전통 공예라는 말이 붙어 있으니 현대식보다 옛날식으로 만들었다는 뜻일 테고, 작야우는 이름이네요. 엄청나게 시적인 이름이어서 고전 시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확 마음이 끌렸습니다. 거기다 어젯밤에는(昨夜) 비가(雨) 왔으니까요!



정산소종 하면 일단 스모키한 훈연 향, 그리고 새큼한 레몬 향 같은 뉘앙스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특징은 같음에도 세상의 정산소종은 다 다른 맛일 테고, 이전에 다른 소종 홍차들을 마셔 보았다지만 이 특별한 이름을 가진 정산소종을 저는 처음 보니 어떤 느낌일지 두근두근하네요.


정산소종은 중국에서 유럽으로 처음 수출된 홍차라고도 하고, 그 매력적이고 독특한 향을 모방하다 등장한 것이 얼 그레이입니다. 다른 점은, 얼 그레이는 베르가못 오일을 첨가해 정산소종 특유의 상큼한 향과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소종 홍차는 향료를 첨가하지 않아도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히 나타나는 향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얼 그레이만큼 톡 쏘는 시트러스 향이 나지는 않아요.


개완에 물을 붓고, 한 번 데워진 다구에 찻잎을 넣으면 열기와 물기를 받아 찻잎이 향을 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아직 우러나지 않은 시점에서 예열된 다구에 잎을 넣었을 때 나는 향을 온향(溫香)이라고 하는데요, 여기서는 정말 베이컨을 연상케 하는 스모키한 향기가 확 올라오네요.



물이 닿으면 또다시 향이 바뀝니다. 이제 상큼하게 올라오는 '그 향기' 가 나고, 송연에서 송진으로, 조금 더 찐득하고 맑은 쪽으로 훈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요.


그리고 맛. 이 친구는 아주 새큼상큼합니다. 그런데 훈연도 뒤지지 않고 따라붙지요. 비 오고 해가 나듯 무엇이 먼저 오고 나중에 하나가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파도 같습니다. 새큼하고, 장작불 연기 향 두텁게 가득하고, 그러나 그 안에서 또다시 상큼한 레몬 향이 나타나는 듯이.



훈연의 뉘앙스가 상당히 명확합니다. 이 차가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어떤 장작불 위에서 연기를 쐬었을지 떠오를 것만 같아요. 차에 연기를 쐬는 오두막 아래에서 소나무가 듬뿍 타오르고, 그 위쪽, 뜨끈한 바람과 연기가 가득한 곳에서 이 백송 향기를 입는 찻잎들.


이 훈연 향을 위스키나 오크 향에도 비하기 때문에 묵직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풀 줄기를 통 치고 튀어내리는 물방울처럼 깔끔히 한 덩어리로 모여서, 목으로 싹 넘어갑니다. 무거운 적란운은 저 하늘 위에만 있고 시원하도록 상쾌한 바람이 부는 산비탈. 어제 비가 내린 걸까요?




물을 끓일 때는 아직 구름이 가시지 않았다가 차를 마시는 동안 날이 개었습니다.


늦봄의 빛이 따스하게 비치는 갓 오후에, 볕과 바람과 밖에는 새 우는 소리, 그리고 레몬 향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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