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농담으로 통용되는 '낙엽' 이란 오래된 차를 뜻합니다. 오래된 차 중에서도, 오래 묵혀서 먹어도 되는 차 말고, 오래 놓아 두면 향기와 선도가 떨어져 맛이 없어진 상태의 차를 말하지요.
잘 마른 잎이라서 그냥 보관해도 될 것 같지만 장기 숙성용으로 만들어진 종류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차는 2년 이내에 먹는 편이 좋습니다. 종류에 따라 그보다 짧은 것도 많습니다. 많이 간과하고 있지만 차는 농산물이거든요(!)
그런, 차보다는 마른 잎에 가까워진, 열심히 수집한 알록달록한 낙엽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다짐하게 됩니다. 아! 차를 낙엽으로 만들지 말아야지.
그런 결심도 몇 회째, 대청소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못 하고, 옷 정리를 해야지 하면서 못 하는 대부분 사람들처럼 차 동호인의 집에는 여전히 낙엽이 쌓여 갑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올해는 큰 맘 먹고 정했습니다. 올해를 낙엽 처리의 해로 선정하자! 그리고 집중적으로 낙엽을 소비해 해치운 다음에, 그때서야 새 차를 사자.
집에 있는 차를 마시기만 하면 되는 쉬운 결심 같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올해 새로 나오는 햇차들이며 이번에 어느 지방 차 농사가 어떻게 되었다더라, 어디서는 올해 이런 상품을 출시했다더라, 하는 새 정보들은 항상 차 동호인들의 흥미를 가장 자극하는 소식이고, 주변에 친구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놀랍게도, 내가 차를 몇 통씩 사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 차가 생깁니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햇차를 샀는데 좀 드셔 보세요' 가 각각 다른 사람에게서 다섯 번씩 반복된단 말이죠. 그런데 이 사악한 차 동호인들은 햇차를 보내 드리는 김에 햇차만 보내면 정 없으니까 마침 이 때다! 집에 있는 다른 맛있는 차도 넣고 좀 아슬아슬한 오래된 차도 넣고 같이 먹으면 좋은 다른 차도 넣습니다. 근본적으로 입은 한 번에 차를 하나씩밖에 먹을 수 없는데 대한민국의 멋진 택배 시스템과 사람의 손은 한 번에 차를 여러 개 보낼 수 있는 점이 문제입니다.
딱 하루, 2명의 차 이웃들과 만났습니다. 차가 이만큼 생겼습니다.
단지 친구 집에 잠깐 놀러갔다가 받게 된 차들.
이런 것을 '티백 포화 상태' 라고 부릅니다!
이런 어려움을 안고 몇 년이 지나면 낙엽이라고도 하기 뭣한 유물이 생깁니다. 2013년 햇차를 남에게 받아서 2020년까지 보관한다거나(그 분이 말씀하시길, '이 차도 월드컵이 보고 싶었을 수 있잖아요!'), 차 통이 크기라도 하면 눈에 띄는데 1회분, 5그람 정도씩 봉투에 작게 담아 놓은 차들은 '소분 차 바구니' 에 넣은 다음 몇 년씩 존재를 잊는 때도 허다합니다.
저 또한 이런 시간의 흐름을 피해갈 수 없었기에 올해 특단의 조치를 내리고, 이제는 차를 고르는 시간마다 적극적으로 차를 모은 바구니를 찾아 보고 낙엽을 마셔 없애기로 했지요. 그렇게 소분받은 봉투며 아껴서 조금씩 먹은 바람에 완전히 다 먹지는 않았지만 몇 그람밖에 남지 않은 예쁜 틴들을 보며(차는 가득 들어 있을 때보다 작은 봉투에 조금만 담겨 있으면 향이 더 빨리 날아갑니다.), 이 차를 가졌을 때의 기쁨과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는지를 추억처럼 하나하나 되새기다 보니, 문득 마음도 오래 두면 빛이 바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차가 낙엽이 되려면 적어도 2년쯤 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시는 차가 식품이라고 알고 있음에도 2년이나 그냥 가지고 있는 이유는, 아마 아끼는 스티커를 차마 쓰지 못하고 모으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요? 하지만 차는 20년을 둬도 괜찮은 스티커가 아니라 식품이기 때문에 비극이 발생합니다.
예쁜 라벨이 붙은, 그렇지만 낙엽이 된 차를 몇 개째 뜯어 마시면서 '아, 이건 이 분이 올해 정말 맛있었다고 주셨던 차, 이건 또 다른 분이 어머니 찻장에서 귀한 것을 몰래 빼서 보냈으니 비밀리에 드셔야 한다고 했던 차, 또 이건 5년 전에 여행을 가서…….' 하고 기억을 떠올리고, 그런데 차는 이제 바래서 그렇게 맛있지는 않을 때. 씁쓸한 맛과 아직 남아 있는 묘한 향기의 흔적을 더듬으며 좋은 것을 바로 그 때 누리는 일은 참 중요하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카렐 차펙(Karel Capek) 사 패키지는 귀여운 일러스트와 특별한 테마 때문에 인기가 많습니다. 왠지 뜯기 아깝단 말이죠.
어제는 아는 분을 뵙고 구움과자와 파운드 케이크, 그리고 1회분으로 소분된 다즐링을 선물받았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정리를 할 때 원래 저라면 간식은 오늘 먹어야 하니까 접시에 차리고, 여기에 어울릴 차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있을지 찾아 보았을 거예요. 소분받은 다즐링은 또 나중에 좋은 때를 위해 소분 바구니에 넣어 두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
'어제 받은 차를 바로 지금 뜯어 마시는 것만큼 잘 누리는 순간이 있을까?'
나중의 좋은 때가 아닌 바로 지금, 선물을 주신 이 마음을 누리기 위해 차 봉투를 뜯고, 우리기로 합니다. 그렇게 함께 마신 다즐링은 신선한 오렌지 향이 듬뿍 나는 파운드 케이크와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바로 지금 같이 먹는 선택이 아니었다면 후회했을 거라고, 흐르는 음악과 옆에 둔 꽃을 보면서 그 날 저녁의 모든 부분을 즐기면서 알 수 있었지요.
차를 그 순간 가장 행복하게 즐기려면 언제나, '혹시 다음에 또 좋은 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넘어 지금을 최고로 사랑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또 한 번 느낍니다.
간만에, 최고의 티타임.
낙엽 처리의 해.올해 저는 가급적 햇차를 사지 않겠지만 그와 더불어 받은 차는 곧장 마셔 버리겠다는 목표도 같이 세울 생각입니다. 낙엽 처리는 묵은 차를 마시는 일일뿐만 아니라 새로운 낙엽을 만들지 않는 일이기도 할 테니까요.
남에게 무엇을 주는 마음은 참 소중합니다. 나를 떠올리며 이런 걸 좋아하시겠지, 이것도 누려 보시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주는 마음은 드물고도 따뜻해서 받으면 곧장 마셔 없애기는 왠지 아까운 바람에 보관하려고 하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오래된 사랑이 추억으로는 남지만 설렘은 사라지듯, 마음도 너무 오래 보관하기만 하면 빛이 바래고, 또 보낸 마음은 편지와도 같아서 잘 마셨어요! 하는 소식이 답신으로 돌아올 때 선물한 쪽에서도 기쁘기 마련이겠지요.
다행히도 차는 시간의 융통성이 다른 선물에 비해 좋습니다. 과일이나 간식과 달리 짬이 나지 않거나 급하면 몇 달은 그대로 두어도 문제가 없는걸요. 너무 늦지만 않게, 내가 가장 편한 시간에 포장을 뜯어, 상냥한 마음을 떠올리며 누려 보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