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웃은 뭔가 다르다

느슨해서 편안한 관계

by 혜하




약 5년 전 차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비슷한 연배의 차 친구들 몇을 알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① 차를 마시고 ② 제 나이 또래라는 점 말고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교류를 시작한 시점도 각기 다른데다가, 성격이나 생활 패턴도 제각각인 듯합니다. 왜 갑자기 확신이 없어졌냐면, 하는 일이나 사는 곳 또는 주로 뭘 하며 일상을 보내는지 등등 일반적으로 관계를 트기 위해 아이스 브레이킹 용으로 사용되는 그 모든 정보들이 없거든요. 나잇대도 추정에 가까워서 사실 아직도 대부분은 정확한 나이를 모릅니다.


이런 정보 부족은 놀랍게도 이들과 교류하고 관계를 지속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SNS에 올리는 하루하루의 찻자리를 지켜보며 상대의 취향을 눈치채고, 덧붙인 사담을 읽으며 근황이나 상태를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가끔 안부를 물으며 잠시 대화를 주고받고, 새 차가 생겼는데 한번 맛보라며 보냅니다. 보통은 이렇게 잔잔하게 흘러가다, 때로는 함께 찻집에서 마주 보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즐거운 하루를 보낸 후 각자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지요.


신기하게도 이들과의 관계는 부담이 없습니다.


서로에게 '함께 차 마시는 사람'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적 맥락 속의 자신이 배제되고 인성과 성향을 가진 오롯한 개인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연의 나로만 존재할 수 있는 관계가 우리에게 얼마나 되던가요. 오히려 서로 어디서 뭘 하며 지내는지 모르다 보니 더 솔직해지기도 합니다. 또한 교류의 깊이가 얕다고 해서 무신경하다거나 무성의한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그냥 오늘은 그런 날이고, 이번은 그런 경우일 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어쩐지 '다우茶友'라는 말보다는 '차 이웃'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각자의 생활 방식은 달라도 마주치면 짧게 인사하듯 안부를 전하고 좋은 음식 좋은 일이 있으면 주고받는 관계, 바로 이웃이지요.


요청표지.jpg 차를 앞에 두고 나의 오늘과 너의 오늘로만 마주하는 사람들


몇 년 전부터 '느슨한 연대(weak ties)'가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출간 후 꽤나 붐을 일으킨 『90년대생이 온다』(임홍택 저)의 주역,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의 관계론으로 주목을 받나 보더라고요.(요즘은 밀레니얼 세대라는 말도 구식이고, MZ세대로 관심이 넘어갔지만요.) 이들이 추구하는 관계의 바탕에는 각자 자신의 삶을 살던 도중 공통의 목적이 있거나 각자의 입맛에 부합하면 결합하고 아니면 해산하는 식으로 지내겠다는 마인드가 있습니다. SNS에서 ‘팔로우’로 이어지는 때로는 일방향적이고 일시적인 비대면 관계가 대표적이지요. 즉 결속 자체가 목표가 되던 과거 한국 사회의 주류 방식 “우리가 남이가!”와는 대척점에 있는 관계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 사회와 생활 방식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많은 기업들에서 재택근무를 도입했고, 정부는 (사실은 물리적이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공공연하게 장려하고 있습니다. 어깨동무하며 형님-아우 하던 정다운 술자리가 불가능해지자 랜선회식 같은 걸 시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어디 한 번 솔직해져 봅시다. ‘굳이 비대면으로까지 이 사람들과 이러고 있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든 적 있지 않나요? 새로운 상황에는 그에 맞는 새로운 방식이 어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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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지.”


이 말이 명대사로 자리잡은 영화 <왕의 남자>(이준익 감독, 2005)에서 사용된 맥락과는 영 멀어졌습니다만, 차 이웃들과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네요. 우리는 각자 본래의 자리가 있고, 교류하기 위해서 그 자리를 벗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굳이 손을 내밀어 챙겨보내준 햇차와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보내준 선물이 얼마나 세심한지 알고, 이런 이웃의 일상이 평온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때때로 마주치며 느슨하게 연결되고 다정한 마음으로 유지되는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 이 관계는 꽤나 편안합니다.

바로 오늘, 차 한잔 마시며 새로운 이웃을 사귀어 보시면 어떤가요? 거창한 자기소개가 없어도 당신이 마시는 그 한잔의 차만으로 요즘 다인들은 은은한 환영인사를 해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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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프로젝트 《요즘다인》, 〈언제 한번 차 한잔〉 에서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차 이웃은 뭔가 다르다 (청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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