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꽃피는 찻집

이런 게 차 마시러 다니는 재미지요

by 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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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솔내길 곳곳에 숨은 독립서점과 멋진 가게들을 지나, 클럽 거리의 소란을 블럭 뒤로 두고, 어울마당로의 조그마한 공원 앞에 자리잡은 찻집이 있습니다. 호젓함과는 거리가 멀고, 홍대-합정-상수의 핫플레이스 트라이앵글 안에 있는 나름 교통 좋은 곳(?) 임에도 이곳의 계단을 올라가 스르륵 미닫이문을 열면 고요한 딴세상에 온 것 같지요.


여름, 바깥에서 내리쬐는 38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햇살은 발이 쳐진 창문 안에서 온화한 볕으로 바뀌고, 사장님께서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일단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한 병 꺼내 주십니다. 아, 시원하다! 이런 날은 웰컴 드링크보다도 웰컴 찬물이 반겨지는 법이지요. 그리고 말합니다.


"날씨에 어울리는 차로 부탁드립니다."





차는 종류가 많고 많은데다 향과 맛도 많고 많아, 요즘 찻집들에서는 손님들의 선택 편의를 위해 차 종류와 향미를 간단하게 설명한 메뉴판을 준비하는 편입니다. 그런 메뉴판을 옆으로 슥― 밀치고,


"주시는 대로 먹을게요." 한 마디.


어떤 차가 나올지 모르는 두근두근함. 왜 이 차로 골랐는지 설명을 들을 수 있거나, 어쩌면 아직 수입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메뉴판에 업데이트되지 않은 새로운 차와 만날 수 있는 기회까지! 바로 이런 랜덤 차 뽑기의 맛을 알고 계신지 이 찻집의 메뉴판에는 진짜 이 옵션이 있습니다. '티 마스터의 오늘의 추천 차' 메뉴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오늘 꼭 마시고 싶은 차 하나와,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거기에 어울리는 추천 차로 알아서 주세요' 주문을 좋아합니다. "동방미인을 마시고 싶고, 그리고 다른 건 아무거나 어울리는 걸로 주세요."


재미있는 이야기도 맛있는 차도 나오는 마법의 주문이랍니다!


발 아래로 구름이 우거지는, 해발 2,300m의 고지대. (사진 : 금강신문)


오늘 그렇게 랜덤 뽑기(?)로 나온 추천 차는, 운남성 임창지구 백앵산(白鶯山)에서 만들어진 야생 고수 홍차입니다. 야생차는 야생이라는 뜻, 고수(古樹)차는 차나무가 오래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차를 만든 차나무는 수령이 무려 800여 년이 되었다고 하니, 대략 1,200년대쯤부터 자란 나무입니다. 고려시대에 태어나셨군요.


운남이라고 하면 본래 보이차가 유명한 곳인데요. 임창지구는 4대 보이차 생산 지구라도고 하고, 그 유명한 대설산(大雪山)이나 빙도(冰島) 같은 지역도 모두 임창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가 나는 백앵산은 믿거나 말거나 시적인 이름으로, 깎아지른 산 위로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퍼졌다, 모였다, 퍼졌다 하는 모습이 마치 흰 꾀꼬리(鶯)가 날개를 펼치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해요.


오늘의 백앵 고수 홍차도 원래 보이차를 주로 생산하는 나무에서 동일하게 잎을 딴 차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보이생차에서 느껴지는 각종 푸릇푸릇한 뉘앙스를 담고 있었어요. 이 비밀을 알기 전까지 저는 주는 대로 차를 마시며 알쏭달쏭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짓궃은 서프라이즈 같지만 이렇게 랜덤 차를 요청하면 차 이야기를 천천히 해 주시곤 해서, 처음에는 이게 뭐지? 뭐지? 하면서 마시는 재미도 있거든요.



차를 우리면 코 앞에 가져왔을 때 훅 풍기는 향기가 범상치 않은 풍경을 예고합니다. 코로 맡는 향만으로는 도무지 차종을 짐작할 수 없는 느낌이었어요.


그리고는 보이생차에서 나타나는 무척 풍부한 꽃 향기와 과일 향이, 홍차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풋풋하고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과일 맛은 잘 익은 백도가 물렁한 속살을 흐느러뜨릴 때의 과즙 같고, 풍부한 향기는 갓 뜯은 산나물이나 미나리 향기, 꼬들꼬들한 벽라춘 아엽의 향 같습니다.


향기의 스타일만으로는 떫은맛이 동반될 것 같은데, 푸릇푸릇한 향이 홍차의 부드럽게 익은 질감과 합쳐져서 하나도 쓰지 않으며 우아하고 가뜬합니다. 마치 높은 누대에 올라 툇마루에 서 푸르른 하늘과 구름 드문거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 그 기분을 싣고 가듯 마무리는 개운히도 엷은 멘솔 향처럼 마무리합니다. 마루 위에 서서 속 시원하도록 천하를 내려다보면 옷자락을 흔들고 가는 청명한 바람.



마시고 나면 입안에 남는 것은 설탕이 고인 듯 달콤한 후운입니다. 이런 향기는 차를 마시고 난 후 잔 바닥에 남은 배저향(杯底香)을 맡아 보면 더욱 진하게 드러나지요. 찻잔을 들어 킁킁거려 보면 꼭 눌어붙은 과일 사탕 같은 단 향기가 폴폴 나고 있어요. 홍차로 만들어서야 더욱 도드라지는 짙은 단향이 운남의 구름과 야생차의 독특한 뉘앙스를 담고 한 점 남아 있습니다.






찻집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차 이야기 말고도 차 수입하는 이야기, 요즘 사는 이야기,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며 마음에 품은 고충까지 팽주(烹主; 차를 우려 주는 사람)와 손님을 가리지 않고 흘러흘러 한바탕 말을 나누다 오게 됩니다. 저도 이 날은 예정에 있을 리 없던 증조할아버지 독립운동 이야기까지 꺼내게 되었었네요.


그렇게 새 차도 마시고, 보통 차나무 이야기인 천 년 전 전설부터, 보통 마시는 사람들 이야기인 십 년 전 일화까지 섭렵하며 느긋하게 눌러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아무래도 그 말이 나옵니다. 아, 오늘도 잘 마셨다.


차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꽃피는 가게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요!


간만에 길게 펼쳐진 차담과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고 싶을 만큼 새롭고 맛있는 차에 신났던 날이었지요. 이제는 슬쩍 수그러든 해가 내리쬐는 문 밖으로, 찻집을 나서면서 그러니까 인사합니다.


"오늘 잘 마시고 갑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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