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다 보면 날이 좋을 때, 멋진 풍경을 볼 때 차 한 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 마음이 커지고 모여서 떠나게 된 것이 차 여행. 찻짐을 한가득 싸 들고 멋진 곳에서 실컷 차를 마시자는 마음을 참을 수 없게 되는 순간입니다.
"저희는 왜 맨날 이런 곳으로 오는 걸까요?"
"그야 저희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게 이런 곳이잖아요."
하루에 몇 번 안 되는 배차를 퍼즐처럼 끼워맞춰 갈아타기를 반복하며 산넘고 물건넌 끝에 도달한 곳은 보물 제413호 경주 독락당. 조선 중기에 지어진 고택으로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이 햇살, 바람, 습도…….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주변을 돌아본 뒤 해가 지기 전에 계곡에서 찻자리를 가졌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차도 모인다고 다들 조금만 가져왔다며 꺼낸 차들이 모아보면 한가득이네요.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차가 좋을지 의견을 나누는 즐거움으로 다회가 시작됩니다.
계곡을 끼고 지어진 고택을 바라보며 즐기는 찻자리.
시원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차를 마시면 신선이 따로 없는 기분입니다. 옷 젖는 줄도 모르고, 아니 젖은 옷은 빨면 된다고 할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차는 분위기가 40퍼센트라고 숙소의 전기포트에서 묵은내가 나서 걱정했던 것도 맛 좋기만 합니다.
저녁을 먹고 마루에 나와 차를 마십니다.
풀벌레 소리, 차솥의 물 끓는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 깊어지는 가을밤.
차 뿐만 아니라 가져온 기물들도 다양해서 이 자리를 빌어 새로운 기물을 개시하기도 하고 서로의 기물을 바꿔서 사용해보기도 합니다. 작은 조립식 사방탁자를 세운 뒤 어떤 기물을 올리고 화병은 어떻게 장식할지 고민하는 시간, 새로 개시하는 갈대가 그려진 다완이 가을밤에 흔들리는 갈대와 둥근 달 같아서 정취에 젖어들고, 깨졌다가 막 수리를 마치고 돌아온 숙우를 개시하며 함께 나누는 기쁨.
처마에 가을비 떨어지는데
빗줄기는 가늘어서 보이지 않고
젖는 땅 보면서 임 오는 발소리 듣네
때마침 내리는 가을비가 운치를 더해 줍니다.
처마에 맺혀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차를 내리고 향을 사르는 즐거움.
차가운 빗방울이 기와에 떨어지는 소리, 바닥에 떨어진 빗방울 자리가 별처럼 빛나고, 주위가 하도 어둡고 한적한 시골이라 세상에 이 풍경만 있는 것 같은 고요함, 그 사이에서 차솥이 바람처럼 물 끓는 소리를 내는 순간.
이게 무슨 재미냐고 하면 재미없는 걸 관조하는 재미라고 하지요.
낯선 아침 공기에 피로를 잊고 정신을 차립니다. 느긋하게 일어나자고 얘기했지만 막상 아침이 되니 다들 눈을 반짝이며 부지런히 찻자리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어둑한 가운데 물을 끓여 보온병에 따르고 말차를 체 쳐서 차통에 담는 시간.
계곡물 흐르는 소리에 찻물 치는 소리가 얹히네
상쾌한 아침 공기와 고요히 흐르는 물소리, 나무가 머금은 세월이 삐걱대는 소리.
여명의 시간에 일어나 준비한 찻자리는 산줄기 너머로 드문드문 햇빛이 비치기 시작할 즈음 마무리되었습니다. 짐을 정리하고 돌아가는 길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봅니다. 1박 2일이라는 짧은 여행이었지만 순간순간이 영화 같았던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