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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Jun 30. 2021

부드러운 달, 차가운 불: 백차 호편

고려다원

하동 고려다원(高麗茶苑).


푸르른 지리산의 산줄기를 끼고 아래로는 흐르는 섬진강을 마주하는, 하동 화개면에 있는 다원입니다. 화개면 일대는 매해 하동 차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고, 국내에서도 야생차 산업 특구로 지정되어 있는 대표적인 차 재배지이지요. 전라도와 경상도가 맞닿는 바로 그 화개장터가 있는 곳이기도 해서, 저도 겸사겸사 차 여행이며 풍류 여행을 몇 번 다녀왔습니다.


사진 : 한국관광공사


고려다원 또한 이 야생차 특구로 지정된 다원 가운데 한 곳입니다. 1979년 처음 세워진 이래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차를 연구해 왔다고 해요. 우리가 주로 갖고 있는 인식처럼 하동 일대에서 나오는 차는 녹차가 많지만,이외에도 고려다원은 백차, 여러 우롱차, 홍차 제품을 개발해 매해 등급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백차 호편(虎片)은 고려다원에서 선보이는 새로운 백차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려다원의 다른 우롱차인 청룡조(靑龍爪)와 상대하는 이름으로 백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하네요. 포슬포슬한 이파리가 처음에는 꼭 동물의 터럭 같았다가 물을 받자마자 기지개를 켜듯 푸릇하게 쭉 펼쳐집니다. 



백차는 상대적으로 산화 과정을 많이 거친 차들보다는 건엽 향이 얌전한 편이어서, 우려내기 전까지는 본격적인 향이 뿜어져 나온다는 인상은 아닙니다. 탕색도 엷고 우리는 동안 차와 만날 기대감만이 조용한 시골 밤처럼 증폭되는 순간.


그리고는, 감탄사가 터져 나옵니다. 


아, 이것은 차가운 불이다! 




달을 담아 마시는 차가운 불. 원래 술을 묘사하기 위해 소설 속에서 사용되었던 이 시적인 표현이 한 번에 이해되는 차맛이란 굉장합니다. 백차의 시원한 기운이, 그런데 뜨거운 온도로 속을 지지며 꽃 향기 부드러이 넘어가는데 달밤에 마시는 술의 정취를 떠올리지 않기 어려운 일이죠. 


솔직히 말하자면 안동 소주가 생각나는 맛입니다. 투명하도록 맑은 달에 깃든 풍부한 단맛, 백차 특유의 깨끗하게 깨치는 맛, 그리고 속이 뜨끈한 것처럼 뒤이어 오르는 열감에 절로 나오는 크 하는 소리까지. 



함께 사용한 유리 숙우도 한밤에 비추는 불빛 같고, 마침 오늘 피운 향도 야마다마츠의 화월(華月)이네요. 


달콤매콤한 백단. 달의 부드러움. 투명하고 차가운 불. 백호는 서쪽의 사신이니 가을날의 달일까요. 가을 밤 정취를 떠올리면 호편(虎片)의 이미지는 더욱 명확해서, 꼭 이런 차를 한 잔 옆에 두고 보름달을 바라보는 뜨끈하고 아릿하고 달콤한 애수가 생각납니다.




* 매거진의 모든 리뷰는 주관적 감상이며, 가게 연혁 등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 이상 제가 즐기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옮깁니다. 따라서 현재 시점과 다르거나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가 있을 시 알려 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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