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하 Jun 26. 2021

부드러운 매움, 개운한 슬픔: 구름의 모습

오사카 옥초당

오사카 옥초당 두 번째 리뷰입니다. 가게 소개는 첫 글을 참조해 주세요!


1.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동양 살롱: 매서원

2. 부드러운 매움, 개운한 슬픔: 구름의 모습




《향기의 모습(香りの象)》시리즈는 옥초당에서 내세우는 고급 선향 라인 중 또 하나. 향 중의 향이라는 침향을 기본으로 다른 향료를 조금씩 첨가해, 각각


원(円; 근원), 바람(風), 구름(雲), 파도(波), 숲(杜), 꽃(花)



여섯 가지 '개념' 을 향으로 풀어낸 시리즈입니다. 침향이라고 불리는 특징을 공유하는 기본 재료 중에서도(산지나 수종에 있어서) 어떤 것을 선택했는가. 어떤 재료와 얼마나 배합해, 어떻게 특징을 살리고 어떤 심상을 만들 것인가. 하는 부분들을 각각의 시리즈에서 맛볼 수 있지요.


'향기의 모습' 시리즈.


이 글에서는 여섯 가지 향기의 모습 중 구름의 모습(雲の象). 베트남 침향의 중후하고 부드러운 향기에 청량감 있는 머스크(사향), 용뇌를 첨가하고, 마지막으로 패향(貝香; 소라와 조개 등 패류의 껍데기를 곱게 갈아 만든 재료)으로 향 전체를 단단히 감싸 전통적인 분위기를 냈다고 하는데요,


사실 이렇게 들어도 바로 와닿지는 않습니다. 전통 향료로 배합하는 향 설명이 항상 그게 그거기도 하고(몇 번 보다 보면 외워요. 침향 백단 사향 용뇌 감송 계피 정향 패향 썼겠지.), 어떤 재료가 들어갔느냐보다도 그 재료를 얼마나 배합해서 어떻게 엮어냈는가가 결국 '그 향이 어떤 향인가' 를 말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밀가루, 소금, 달걀, 버터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빵이 다양한 것처럼요.






처음 구름의 모습(雲の象)을 피웠던 것은 밤 동안 내렸던 눈이 슬며시 녹을 무렵. 하지만 하늘에는 무거운 눈구름이 아직 머물러 있고, 차가운 공기가 어쩌면 또 한 번의 강설을 예고하는, 고요한 오후였습니다.



구름의 모습(雲の象)은 처음에 알기 어렵습니다. 지나치게 부드러운 것 같기도 하고, 후텁지근하게 단 것 같기도 하고, 곧장 어떤 향인지 느낌이 오지 않아요. 연기도 무척 적게 납니다.


이럴 때는 차분하게 문향(聞香)이지요. 향 접시를 눈 속에 두고, 조금 떨어져 앉아 가만히 향기를 향해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면 문득 느껴지는 것은 꽃향. 마치 좋은 먹을 갈았을 때 나는 꽃 향이자 꽃집에서 막 꽃다발을 받아들었을 때 코끝에 대지 않아도 싱싱하게 느껴지는 그런 싱그러운 향긋함이 스칩니다. 아마도 침향의 단맛을 맵고 청징한 재료들로 잡아 주어서 그렇겠지요.


눈을 감으면, 저 멀리서 누군가 흠뻑 먹을 찍어 한 수 시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눈밭 속 매화 향을 문득 맡는 것처럼 눈밭 속 먹 향, 눈밭 속 시의 향기를 맡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만난 구름의 모습(雲の象)은 처음과 또 달랐습니다. 유월의 세찬 비가 내리는 밤. 지붕과 벽을 때리는 빗소리가 다른 모든 것을 가리는 때.


지금, 진한 침향의 향기가 아니라면 이 빗소리에 묻혀 버릴 것만 같아서 이 구름의 모습(雲の象)을 꺼냈습니다. 집안에 불은 한 개를 남기고 모두 끄고, 어둑어둑한 그림자에 잠겨 꼭 대화 상대라도 되듯 맞은편에 둔 향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요.


비가 오는 날, 구름의 모습(雲の象)은 깊숙하고 매캐하고, 구름 속 가득한 물의 입자처럼 부드러우며 그 물들이 서로 당겨 방울을 이루고 떨어져 내릴 때의 장력처럼 짱짱했습니다.


맑은 날에는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인상이 이렇게 변하다니. 눈을 감고 깊이 들이쉬었습니다. 부드러움이 앞섰다가 매움이 오나 싶다가도 먼저 매캐하고 부드럽고, 팽팽한 것 같다가도 도로 뭉실한 그 모습처럼 부드러이 쓰다듬습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것처럼, 소리는 작아졌다가 또 커지고, 통통 튀었다가 휘몰아치고, 온 몸으로 이 향을 마셔 당기고, 밀고, 긴장을 느꼈다가 몸을 풀었다가…… 그야말로 향과 함께 호흡했습니다.  


구름의 모습은 본래 정해진 것이 없겠지요. 눈을 돌리면 다른 모습에 또 다른 모습, 변화하고 율동하고 움직이는 것이 구름의 본질일 터입니다.


연기가 적은 것은 마음으로 그 모습을 그려 보라는 것일까요. 눈 오는 날에 눈구름, 비 오는 날에 비구름, 구름의 모습(雲の象)은 그 자리에서 소리없이, 그 날의 구름과 같은 심상을 만들어냅니다.



다만 아무래도 공기 중에 물기가 많을 때 잘 어울리는 향인 듯합니다. 눈구름이 내려앉은 날의 고요함, 비가 쏟아붓는 날의 부드러운 매콤함. 물기와 만나면 침향의 특징 중 또 하나인 신맛도 잘 드러나서, 묵향이라고 생각한 첫인상이 더 설득력을 띱니다. 먹 냄새, 물 냄새. 어딘가 풋풋한 풀 냄새 종이 냄새.


구름은 부드럽고 그 안에 품은 뇌운은 매캐합니다. 구름은 부드럽고 잘게 퍼진 물방울이 비가 되어 떨어질 때 그 박리(剝離)는 슬프지만, 한바탕 쓸고 간 비가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듯 울고 나서는 개운함이 있습니다.


부드러움을 주는 매움. 개운함을 주는 슬픔.


구름의 모습입니다.



* 매거진의 모든 리뷰는 주관적 감상이며, 가게 연혁 등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 이상 제가 즐기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옮깁니다. 따라서 현재 시점과 다르거나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가 있을 시 알려 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단에 그려진 연꽃 정원: 미무로토의 연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