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잡념이 차오른다

인생을 가로막는 벽을 치워버렸을 때 오는 잡념에 대해서

by 혜현

아주 오랫동안 학위에 꽁꽁 묶인 삶을 살다 보니 다른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었다. 학위 과정 동안 나는 온통 논문에 대한 부담감 + 교수의 갑질로 인한 분노 + 학위 후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 그런데 학위를 그만두고 나니 이 모든 고민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처음 며칠간은 그동안 못했던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랫동안 미용실에 가지 못해 허리까지 길었던 머리를 댕강 잘랐고 파마도 했다. 집 안을 꼼꼼하게 대청소도 했다. 그리고 그동안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밤을 새워가며 몰아서 봤다. 낮 시간에 밖에 나와서 마시는 커피도 정말 맛있었다. 잠을 깨우는 커피가 아닌 맛으로 먹는 커피가 기분이 좋았다. 잠도 8시간 이상씩 푹 잤고, 옷도 사고, 책도 읽고 그냥저냥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하루를 채워나갔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날 무렵 시간이 잘 안 간다고 느껴졌다. 텔레비전을 오랫동안 보니 머리가 아팠고, 사고 싶은 것도 잔뜩 사고 나니 흥미가 떨어졌다. 느긋하게 일어나 지난밤 예능을 보며 아점을 먹고 운동을 갔다 온 뒤 가볍게 간식을 먹고 누워 유튜브를 한참 보다가 어둑어둑해지면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저녁을 차려 먹었다. 피곤하지 않으니 잠도 잘 안 왔고 또 유튜브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정을 넘겨 자기를 반복했다.


처음엔 너무 무료하고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들어서 예전처럼 다시 바쁘게 살아야 하나 생각도 했지만 왜인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잡념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대학원을 뛰쳐나온 건 신의 한 수였어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그만둔 건 내가 나를 구한 거야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니

잘못했다고 하고 돌아갈까?
나를 걱정하는 메일이 와 있지는 않을까?(당연히 안 왔다)
이제 뭐 먹고살지?
석사로 취업은 할 수 있을까?
나이가 많아서 취업을 못하면 어떡하지?


잡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저녁에 잠들기가 어려웠고, 아침이 오는 게 괴로웠다. 집안일을 하다가도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생각이 한번 잡념으로 빠지면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손발이 차가워졌다.


잡념은 불안으로 자라났고, 불안은 우울로 무럭무럭 자랐다.


사회에서 도태된 것 같은 불안에서 기인한 우울은 나를 깊은 땅속으로 끌어내렸다. 다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무언갈 적극적으로 할 수도 없는 나약한 내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마음이 수백 번 지옥을 다녀왔다.


석사가 끝나고 박사는 절대 안 해 하며 쿨하게 연구실을 떠나던 동기와 함께 나왔어야 했는데.
한결같은 태도로 갑질하던 교수한테 한 번이라도 들이받아 볼걸.


우울은 또 후회를 낳았고, 그 끝은 항상 스스로에 대한 원망뿐이었다.



오롯이 견뎌야 했다. 다가오는 잡념을 거부하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봤지만 그 끝은 항상 또 다른 잡념의 시작이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조금씩 나아졌다. 잡념이 들면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고 어두운 방에 누워 유튜브만 보곤 했었는데 잡념과 함께 집안일도 할 수 있게 되고, 밥도 먹을 수 있게 됐다.


물 밀듯 밀려오는 잡념을 막을 길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건의 디테일한 부분들을 조금씩 잊을 수 있게 되었다. 억지로 잊어버리려 하거나 나를 일부러 파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두었다.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생각나지 않으면 그냥 그런대로. 특별히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이제는 매일 매 순간 하던 잡념을 매일 가끔 한다.


평생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잡념들과 함께 영원히 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잡념이 불안으로 넘어가지 않게 나를 다독여주고 인정해 주며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하루를 단순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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