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학위 과정이 끝났다. 좋지 않은 끝맺음이었지만, 어쨌든 끝이 났다.
25살에 시작한 학위과정이 35살이 돼서야 끝났으니, 정말이지 내 인생의 가장 황금기를 실험실과 연구실에서 보낸 것은 틀림없다. 요즘은 내 인생에 훼방 놓은 교수에 대한 분노보다는 오히려 지나간 내 시간에 대한 아까움이 더 속상하게 느껴진다.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은 많은 것들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교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내 성격을 죽여야 했고, 기분이나 생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리고 정말 최저 임금만 받으며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항상 돈이 부족했다. 결국 한마디로 지난 10년간 돈 없고 생각 없는 인생을 살았다.
대학원에서 벗어나 갑자기 '자아'를 찾으려니 쉽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 삶을 즐겁게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등등 그 어떤 것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대학원생인 '나'가 아닌 보통의 어른인 '나'로 살려니 해야 할 것이 많았다.
일례로 늘 운동복에 펑퍼짐한 티셔츠를 입고 맨 얼굴로만 다녀서 내 스타일(?)이라는 것이 일절 없었다. 옷 자체가 없음은 물론이었다. 겨울용 운동복 2개, 여름용 운동복 반바지 2개, 그리고 그냥 여름엔 흰색 or 검은색 무지 티셔츠 4~5개, 겨울엔 검은색 후드티 3개가 전부였다. 화장품도 전부 10년은 족히 된 대학교 때 쓰던 그대로였다. 이걸 어디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
유튜브를 한참 찾아보았다. 체형 별로 어울리는 옷이 있단다. 그런데 도대체 내 체형이 뭐지? 계절별 티셔츠, 블라우스, 치마, 바지, 액세서리, 가방 등등 살건 왜 이렇게 많고 나는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비상금으로 모아 둔 100만 원을 가지고 백화점에 갔다. 평소 많이 들어본 브랜드 매장에 들어갔다. 옷을 아무리 구경해도 무슨 옷을 사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였다. 그러자 직원들이 와서 도와주려 했지만 그 관심이 부담스러워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했다.
다음은 spa 매장에 갔다. 직원들의 관심은 없었지만, 너무 많은 옷들에 압도되어 옷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긴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성들을 봤을 땐 하늘하늘하고 너무 예뻐 보였는데, 내가 입으니 왠 펑퍼짐한 아줌마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결국 기본 청바지에 또 무지 반팔 티셔츠만 사서 집에 왔다. 10만 원도 못썼다. '내가 100만 원을 다 써서 아주 예뻐지리라' 굳은 마음으로 백화점에 갔는데 옷도 결국 사 본 사람이 사고, 돈도 쓰던 사람이 쓰는 건지 돈이 있어도 쓰지 못하는 내게 또 자괴감이 들었다.
과거의 나는 성공한 뒤에 모든 걸 하리라(옷을 잘 입는 것, 그럴듯한 취미를 갖는 것 등등) 생각하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뒤로 미뤄두자고 마음을 다잡았었다. 하지만 체형에 맞는 옷을 입고, 때에 맞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꾸미고 하는 것조차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현재를 인내하고 참아내는 것이 미래의 나에게 다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제부터 현재를 한번 충실하게 살아보려 한다. 미래를 위해 너무 아끼지도 않고, 인내하지도 않고 그때 그때 하고 싶은 것, 마음에 드는 것 등등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고, 사고, 행동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대학원생인 '나'가 아닌 인간'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