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렇게 방언 터지듯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오랜만이라고 말했다. 그러다 문득 이제야 내가 궁금해졌는지 직업을 물었다. 동네의 어린아이들에게 글쓰기 가르친다는 나의 말에 그는 기뻐했다. 아마 내게 배우는 아이들이라면 신성으로 이미 완벽하게 태어난 꼴을 변질시키지 않고 지켜낼 수 있을 거라고 극찬했다. 그는 아이들이 악에 물들지 않기를 소망했다. 나는 그에게 그가 생각하는 악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자연 상태에는 없었던 인위적인 것들이 악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다면 자연상태의 육식 동물이나 해충은 선으로 볼 수 있는지, 자연상태에는 없었지만 인간이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것들은 모두 악인지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러시아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말에 비난을 위한 비난 말고는 진짜 질문을 제시하는 경우가 없어서 지금 이 질문이 너무 흥미롭다고 했다. 그리고 이 논의를 쭉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톨스토이는 서가로 가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초판본을 가져왔다. 그리고 책을 열자마자 등장한 내지에 '인간다움'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내지를 반으로 접더니 왼쪽에는 선, 오른쪽에는 악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본인이 의도한 선을 단어로 적어 갔다. '생명 존중, 친절, 용서, 배려, 겸손, 성실, 감사', 그리고 내게 이 소설 속 인물들의 마음 중 악한 것은 어떤 단어가 떠오르는지 물었다. 내가 악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자 그의 미간 주름이 위로 올라가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들, 술로 조금 있던 돈을 탕진한 남편, 잔소리를 퍼붓는 아내, 거만한 손님 등이 악이 아니면 무엇이냐며 다소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톨스토이가 하루동안 내게 들려주었던 돈에 예민하고 잔소리하는 아내 이야기부터 주색을 즐겼다고 고백한 일들을 이야기하며 본인조차 그렇게 하는데 당신이 악이라고 말한 속성도 지극히 인간다운 것 아닌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선악보다 더 나은 단어를 찾으려 고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선악에서 벗어나서 '인간다움'이라는 개념부터 다시 정의해 보자고 제안했다. 그가 말하는 '인간다움'은 그의 작품 속에서 오히려 신성의 표현이었다는 말과 함께. 그러자 톨스토이가 무릎을 탁 치더니 인간다움 앞에 '신성을 그대로 드러내는'을 추가했다. 그리고 '선'이라고 적었던 곳에 +기호를, '악'이라고 적었던 곳에 -기호를 적었다. 가운데 접힌 선 쪽에는 숫자 0을 적으니 이젠 책의 내지에 수직선이 생겼다. 그리고 그는 비상한 머리로 +기호 아래 신성이 드러나는 정도, -기호 아래 신성이 가려진 정도라고 적었다. 그러더니 다시 혼자 치열하게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인간에게서 신이 드러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 것 같은지 물었다. 나도 함께 고민에 빠졌다. 이곳이 러시아이고 정말 먼 길을 여행 왔다는 사실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지금 '악'을 대체할 용어를 고심한 지 1시간 째다. 나는 그사이 이야기를 끊기 어려워서 참았던 화장실도 다녀오고 그의 책장을 구경하느라 심심하진 않았다.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그는 작품 '바보이반' 속 악마가 머릿속에서 자신을 비웃으며 텀블링하는 기분이라며 다시 입을 떼었다. 제일 처음 내가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먼저 해보겠다고 했다. 그는 육식동물이나 해충은 그들 종에 걸맞은 신성의 기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그들 종에게 필요한 생존과 번식을 잘 해내는 정도만 해도 신성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렇다면 다른 생명을 해쳐야만 살 수 있는 육식동물이나 해충과 같은 동물들의 신성의 습성이 진화 과정 속에서 인간에게도 남아 신이 인간에게 기대했던 신성의 발현을 막는 게 아닌지 의견을 내보았다. 그는 마치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졸업장을 받은 것 마냥 홀가분한 표정으로 신성의 대립점이자 악을 대체할 용어를 찾았다고 했다. '동물성!'. 나는 그에게 신이 깃든 인간을 기대하는 이상주의가 이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들 것 같다는 칭찬을 했다. 그리고 내 배꼽시계가 알람을 계속 울려서 지금은 내가 '동물성!' 직전이라고 전했다. 그는 하하 웃으며 자신이 동물성을 유발했으니 귀한 고기를 대접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방금까지 그가 잔뜩 생각주머니를 풀어 적었던 귀한 초판본을 내게 선물로 줬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제자들에게 자랑해야지 하는 마음과 함께 허기를 조금은 미뤄줄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알게 된 큰 교훈: 배려 담긴 선물은 고귀한 신성, 톨스토이의 인간다움에 조금 더 가까워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