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하루키)

by 혜인

하루키와 함께 달리기를 약속한 날이 왔다. 그래서 오늘 그는 눈인사로 날 지나치지 않고 내가 묵는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기다리며 운동화 끈을 제대로 조이고 있었다. 평소에 샌들과 슬리퍼만 신었는데 오늘은 한 켤레 있던, 한 달간의 여행에서 한 번도 착용한 적 없는 운동화를 꺼내 신으니 발이 포근해서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어른이 되어서는 한 번도 달려보지 않았다는 나의 말에 땅을 너무 사랑하나 보다고 말했다. 의아한 표정인 나를 보고 그는 걷기는 결코 양발이 동시에 공중에 뜨는 경우가 없으나 조깅에서는 반드시 몸이 공중에 뜬다고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그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난 오늘 달리기 대신 경보를 할 뻔했다.

그는 소설가를 직업으로 삼은 후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렸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가 낸 소설만 90여 종에 달한다고 했다. 그는 창작이 치열해서 무너져버릴 것 같은 순간들마다 달리기의 힘으로 극복해 왔다고 말했다. 스스로 선택한 고통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연마해 갔던 것이다. 오늘 하루라도 달리기를 완주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내게 그는 빠르게 달리려 하지 말고 걷지만 않도록 몸을 달래 가며 자신만의 템포를 찾으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걷지 않으려 나만의 달리기 속도를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중력을 거슬러 깡충깡충 떠오르는 몸의 탄성에 기뻤다. 숲도 아름답고 새소리, 곤충소리도 조화로웠다. 그러나 그 기쁨도 얼마 가지 않아서 나는 중력의 위대함 앞에서 압도되기 시작했다. 내 몸, 특히 숨이 차 헐떡이며 점차 까끌까끌해지는 나의 코, 입, 기관지, 폐는 내게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중력의 뜻을 존중하라며 아우성이었다. 나는 하루키가 들려준 '적어도 걷지 않는다.'는 신념 하나로 경보보다는 느린 속도지만 제자리 뛰기는 아닌 정도로 엉금엉금 뛰었다. 저 멀리 반환점에 미리 도착한 하루키가 보였다. 그는 잘했다는 엄지 표시를 들며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한 달 동안 지켜본 결과 하루키는 겉으로는 담백하고 무덤덤해 보이는데도 알고 보면 누구보다 친절하다. 겉바속촉,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달까. 그렇게 나는 누가 보면 마라톤이라도 완주한듯한 표정으로 반환점에 도착했다.

하루키는 내게 생에 처음 먼 거리를 달려본 소감을 물었다. 나는 겸손함이 무엇인지 신체를 통해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동감하며 자신도 달리기를 통해 생각을 비우고 몸과 조화를 이루는 법뿐 아니라 겸허함도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그 후 내게 조심스럽게 나이를 물으며 말했다. 자신이 달리기를 시작한 나이가 서른셋이었고 그때가 소설가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고 확신한 인생의 분기점 같은 해였다고. 신기했다. 내 나이도 서른셋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한 달의 여행이 내 인생의 새로운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는 다음 해에도 세계의 어딘가에서 또 한 번 마라톤 풀코스 레이스를 할 것이라고 했다. 또 죽는 날까지 손 끝에 힘이 있는 한 글도 꾸준히 쓸 거라고 했다. 계절이 순환하고 해가 바뀌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는 삶의 루틴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그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인생의 분기점이었던 서른세 살,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도 변치 않을 나의 루틴은 무엇이 될까. 달리기를 떠올리면 하루키가 생각나듯이 언젠가 그 루틴 자체를 떠올리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생각하는 그런 때가 올까. 그렇게 되면 기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꾸준하게, 성실하게 했다는 증거일 테니까.


반환점에서 하루키의 배려로 충분히 쉬며 이야기도 나누고 목도 축였고, 이미 알고 있던 길로 돌아왔기에 돌아올 때는 아까만큼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이를 통해 쉼의 중요성을 배웠다. 또 때로는 목표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목표로 가는 길이 한결 편안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실 오늘의 달리기에서 가장 어려웠던 지점은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운동화를 꺼내 신었던 때였다. 낯설기도 하고 긴장도 되던 그때. 우리는 우연한 외부 요인으로도 쉽게 첫 마음을 먹는다. 그렇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마음먹은 것을 몸을 움직여 첫 발을 떼는 것이다. 첫 발을 떼는 순간 두 번째, 세 번째 발은 알아서 나아간다. 지속하기란 쉽지 않지만 첫 발을 떼었던 용기만 잘 기억한다면 우리는 계속 달려갈 수 있다. 또 그 끝에는 결코 걷지는 않았던 뿌듯한 내 인생이 있을 것이다. 그가 말했다. 모든 인생은 여행이며 여행을 끝내는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것을 시작한 우리라고.

누군가 나에게 인생의 분기점을 묻는다면 나는 하루키를 만났던, 아니 생에 첫 달리기를 완주해 낸 오늘로 삼을 것이다. 익숙한 것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였던 바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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