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신에서의 숨바꼭질(#헤르만헤세 #글쓰기 #일기)

by 혜인

신은 누구에게나 한두 가지 능력을 선물로 준다고 믿는다. 신기하게도 이 능력은 아주 어릴 적부터 소소하게 윤곽을 드러내기도 한다. 내게 신이 선물한 달란트가 있다면 하나는 책을 좋아하는 것, 둘은 글쓰기였다. 애쓰지 않아도 뒤처지지 않고 공을 들이면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정도. 나를 이 스위스의 작은 마을로 오게 한 것은 어릴 적 부모님께서 나의 글쓰기를 응원하며 사주신 노트의 신묘한 능력 때문이었다. 이 노트를 만난 시점은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4학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크게 열렸던 헤르만 헤세 전시회에서 나는 그의 신비로운 작품명들에 끌렸다. 어린이 전용 출판사에서 각색한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작품을 읽고 참여했던 헤세 전시회는 나를 어른 대상의 책에 입문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가 나 대신 글로 풀어준 성장 스토리에 나는 사춘기 시절을 따로 겪지 않고 바로 애어른이자 어른아이로 건너뛰게 되었다. 이 추억은 초등학교 1학년 첫 번째 그림일기장부터 시작하여 4학년까지 이어진 열세 번째 일기장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때 부모님께서 사주셨던 헤세 노트는 당시에 쓰기 너무 아까워서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얻고 독립하는 시점에서야 일기장과 함께 발견되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노트였다. 앞면에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라고 적혀있고 뒷면에는 헤르만 헤세가 직접 그린 싱싱하고 목가적인 풍경이 있는 노트였다. 자취방 책꽂이에 어린 시절의 일기장과 함께 꽂힌 이 노트를 보며 다시 일기를 써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소설도, 수필도 첫 문장에 공을 들이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정성껏 고른 일기의 첫 문장은 노트와 가장 어울리는 문장.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내가 살아보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 문장을 적고 나서 아차 싶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질문이라서 뒤에 이을 문장이 바로 생각나지 않은 까닭이었다. 이삿짐 정리하랴, 인터넷 연결하랴, 이사를 도운 친구들에게 저녁도 대접하느라 바빴던 까닭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첫 일기는 한 문장으로 끝내고 그 답은 내일의 나에게 맡긴 채 잠들었다. 다음날 같은 시각 일기장을 편 나는 그 사이 누가 다녀간 것 아닌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이유는 어제 쓴 한 줄 일기 아래 독일어로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스위스 테신으로 가봐.'


친구 하나는 내 일기장에 자신이 문장을 써놓고 갔다고 농담을 했고, 다른 친구는 원래 인쇄되어 있던 문구를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우연을 사랑하는 나는, 노트의 진실을 밝히려는 생각보다 스위스 테신으로 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앞섰다. 그리고 긴 겨울 휴가를 끌어모아 테신에 왔다.

스위스의 작은 마을 테신은 울창한 숲 속에 숨은 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 가운데서도 나는 헤세의 흔적을 좇아서 천혜 자연과 아름다운 호수를 가진 몬타뇰라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헤세 노트를 꺼내어 두 번째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혹시나 헤세가 또 답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혼잣말 같은 질문으로.

'도착했으니 이제 무언가 발견할 수 있겠지?'

역시 헤세였다. 십 분 정도가 지나자 노트에는 분명히 헤세가 남긴 것일 한 문장이 더 생겼다.

'힌트: 자유, 공기, 태양, 고독, 창작'

헤세의 힌트를 벗 삼아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내가 살아보려 하는 것을 찾기 위한 테신에서의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우선 나는 가장 찾기 쉬울 것 같았던 태양의 의미부터 찾아 나섰다. 이렇게 하루동안 해를 많이 쳐다본 날은 생에 처음이었다. 오늘 하루 동안 호수 위에 뜬 태양, 초록 나무 위에 걸친 태양, 지붕 너머 반쯤 걸친 태양, 하늘 아래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태양까지 휴대폰 사진으로 찍은 태양 사진만 해도 백 장이 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매일 우리를 비춰주고 있었지만 일상 속에서 존재를 잊고 살던 태양이 하루에도 이렇게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모든 풍경에 색을 더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 느낌을 바로 일기장에 적어 내려갔다.

'태양, 언제나 곁에 있었지만 서른 넘은 이제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밤의 별들은 사랑하면서도 왜 낮의 별인 태양을 이제야 보았을까.'

헤세는 역시 십 분 뒤에 답장을 주었다.

'자연의 모든 색깔이 해의 축복 덕분이라는 걸 느낀 것을 축하합니다. 이 정도 열정이면 공기는 더 쉽게 찾겠는걸요?'

숨을 크게 들이쉬고 크게 내뱉어보았다. 폐가 얼어붙을듯한 찬 공기. 그렇지만 대도시의 공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했다. 호수와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의 공기는 청명하고 맑아서 내면을 씻겨주는 느낌이었다. 이제 나는 일기가 아닌 헤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쓰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자연의 귀한 선물을 머리로 피상적으로만 알고 살아갔을지도 몰라요. 고마워요.'

이번에는 헤세의 답장이 더 빨랐다.

'맞아요. 우리는 곁을 지켜주는 자연에게 감사하고 존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우리 자신도 더욱 풍부해질 것이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다음 숨바꼭질을 나서기 전에 내 속에서 솟아 나오는 첫 번째 깨달음,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싶었다. 눈앞에 보이는 주변 풍경을 일기장에 빠르게 적어내려 갔다.

'얼어붙은 숲을 감싸 안은 신선한 겨울 공기는 마치 생명의 숨결 같다. 겨울 태양은 생각보다 변화무쌍하고 그 빛은 호수와 산 끝에서 반짝이며 신비로움을 더한다. 호수의 살얼음은 윤기 있게 반짝여서 마치 밤하늘 은하수와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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