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헤세가 준 힌트 중 '자유, 고독, 창작'이 남았다. 그리고 그는 친절하게도 내가 쓴 풍경 기록 밑에 또 다른 힌트가 될 만한 글귀를 적어주었다.
'태양도, 공기도, 호수도 발견했군요. 이젠 겨울나무들의 속삭임을 들어 봐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들을 바라본다. 겨울나무의 가지는 얇고 길게 뻗어있었다. 키 큰 나무는 눈과 얼음에 뒤덮여 햇빛에 의해 반짝이기까지 했다. 헤세는 살아생전에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이름과 자리를 기억했다고 한다. 나무들은 사계절 내내 같은 자리에 서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의 친구였던 헤세를 기억할까. 헤세가 아끼던 나무들이라 그런지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에 움츠러들어 더욱 내면으로 파고드는 듯한 나무의 형태가 퍽 헤세를 닮은 것 같았다. 가만히 나무를 보고 있으니 이보다 홀로 잘 있는 존재가 있을까 싶다. 순간 깨달았다. 헤세가 말한 고독을 겨울나무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걸.
헤세는 살아생전에 베토벤, 니체처럼 내면을 파고든 사람들을 위대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 역시 고독 안으로 파고들어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을 성공했다. 이곳의 나무들은 헤세가 떠난 후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성장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나무들로부터 강력한 정신적 힘을 느꼈고 철학적 탐구의 원천이 이 고독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헤세도 나무에게서 배운 고독으로 자신과의 연결을 강화하며 자아를 발견해 간 것이었으리라.
겸허한 마음으로 일기장에 생각한 바를 적기 시작했다.
'사심 없이 겨울바람 속에서도 우아하게 자신의 형태를 지켜내는 나무처럼, 우리도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다가오더라도 주변에 휩쓸려 뿌리 뽑혀서는 안 된다. 고독이란 홀로 있음을 연습하는 시간이며, 외부 세계의 잡음에서 벗어나 내면의 명상과 생각에 전념하는 것이다. 나는 나만의 세계를 탐험할 준비가 되어있을까.'
그리고 몇 분 뒤 헤세는 마치 두려움으로 길을 잃은 손녀에게 격려하듯 따뜻한 답장을 줬다.
'고독은 삶의 일부입니다. 고독이 때로는 우리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강함과 내면의 성장을 위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고독한 시간은 자신과 조용한 대화를 나누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기억하세요, 모두가 당신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고난과 고독을 함께 견디며, 당신이 힘들 때에도 당신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헤세의 글과 풍경이 내 마음 안에서 어우러졌다. 고요한 숲에서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찬 바람이 지나갔지만 나무들은 자신의 속도대로 흔들흔들 부드러운 춤을 출 뿐이었다. 나무들은 마치 아름다운 숲의 리듬을 즐기는 듯했다. 이 아름다운 겨울 풍경 속에서 나는 고독이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고독과 고요함이 서로를 품어 그 어떤 말보다 나은 침묵의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 이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정확한 단어보다는 이 마음을 담을만한 그릇을 찾고 싶었다. 단어를 고르고 골라서 적고 싶었다. 마치 예쁜 찻잔에 정성껏 우린 차처럼. 그렇게 나는 일기장에 서툰 독일어로 시를 적어 나갔다.
<나무와 헤세>
한 나무가 앙상하게 서 있었어
친구라곤
가끔 심심한 듯 가지를 흔들고 두드려대던 바람과 비뿐
이곳의 시간은 고요히 흘렀어
아침의 햇살, 밤의 어둠, 수십 번의 계절의 지나가는 동안
나무는 더듬더듬 뿌리를 내리고
해마다 새로운 나이테를 두르고
하늘을 향해 뻗기를 멈추지 않았어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로 생기고 변하고 사라졌음에도
나무는 늘 제자리
눈감은 듯, 한 겨울 같은 존재였지
어느 날 나무는 무척 놀랐어
자신을 고요히 응시하는, 고독을 아는 게 분명한 존재를 만났거든
그는 헤세
둘 사이 아무 말도 없었지만
서로의 고독이 얽혀 아름다운 선율이 되었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내면의 세계
그들이 각자의 성부를 지키며 만든 화음의 파도는
지난여름과 다가올 봄을 넘어서 앞과 뒤로 퍼져나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