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의 본질(#헤르만헤세 #유리알유희 #창작)

by 혜인

루가노 호수의 풍경을 뒤로한 채 헤세가 남긴 '자유'와 '창작'을 찾으러 헤세 기념관에 왔다. 까사 카무치(Casa Camuzzi)를 개조하여 만든 곳이라고 한다. 기념관 입구에 있는 작은 테이블 근처에서 독일인으로 보이는 한 젊은 여인이 건물 외벽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빨간색 아치 형태의 창문과, 서로 다른 크기의 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벽, 외벽에 그려진 헤세의 초상화까지... 그림이 꽤 세밀하고 전문적으로 보였다. 스케치가 근사하다는 칭찬과 함께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화가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그분은 웃으며 자신은 건축 디자이너라고 말했다. 최근 문학 전문 출판사의 건물 디자인을 요청받아서 헤세의 정신을 참고하기 위해 헤세 기념관을 살피러 왔다고 했다. 그 사이 건물 오른쪽에 길쭉하게 서있는 배수관까지 그림 속에 그려낸 그녀는 이제 그림이 완성되었다며 혹시 괜찮으면 자신과 함께 전시실을 둘러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또 다른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느끼고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전시 공간에는 헤세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녀와 난 말없이 서로에게 발 속도를 맞추며 전시실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이곳에는 어릴 적 세종문화회관에서 보았던 헤세의 자필 원고를 비롯하여 그가 그린 수채화 작품, 그의 사진과 타자기와 편지 등의 유품들, 전 세계에 번역된 헤세의 책들이 있었다. 전시의 끝자락에서 헤세가 트레이드마크인 동그란 안경을 끼고 수수한 옷을 입은 그가 손녀딸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사진들을 보니 마치 그가 돌아가신 친할아버지같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나는 헤세와 관련된 엽서 하나를 사서 같이 전시 공간을 둘러본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대부분의 판매용 엽서에는 헤세의 수채화 그림이나 자필 원고가 가득히 인쇄되어 있었지만 내가 그녀에게 준 엽서는 헤세의 산문집 속 한 구절 외에는 흰 여백인 텅 빈 엽서였다. 그림을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스스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아내고 싶어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 선물에 기뻐하며 자신도 같은 엽서를 사서 내게 주며 서로 빈 여백을 채워서 교환하자고 했다.

다시 그녀를 처음 만났던 헤세 기념관 앞 테이블에서 우리는 서로 선물해 준 엽서에 마음을 담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준다는 기쁜 마음과 함께 어린 시절 친구들과 교환 일기 쓰며 놀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나 나도 모르게 콧노래도 흥얼거렸다. 그녀 역시 업무 차 온 현장 답사에서 펜팔 친구를 만난 듯 상기된 표정이었다. 나는 엽서 안에 그녀를 만난 후 느낀 그녀의 모습들을 형용사들과 그 형용사에 걸맞은 간단한 캐릭터들로 나타냈다. 그리고 그 뒤에 그녀를 만난 소감을 간단히 적었다.

"'프로페셔널한', '세련된', '침착한', '사려 깊은', '평온한' 당신을 만나서 이 하루가 더 진하게 기억될 거예요."라고.

우리는 비슷한 시각에 엽서를 완성했다. 그녀는 내게 오래간만에 일을 떠나 엽서 안에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려서 재밌고 행복했다고 했다. 그녀가 내게 건넨 엽서에는 헤세 기념관 건물 앞에서 엽서 그리기에 몰두한 나의 모습과 헤세의 타자기, 동그란 안경이 그려져 있었고 간결하지만 진솔한 문구도 적혀있었다. '한바탕 유희에 고마워요. 나의 벗'이라는. 이 문구를 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유희의 본질이 바로 창작이라는 것을. 외압 없이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하고 싶어서 하는 모든 자기표현들이 바로 진정한 유희이자 끝없이 샘솟는 창작 활동임을. 이제야 엽서에 이미 적혀있던 헤세의 글귀가 실감이 났다.

'돈, 건강, 자유, 삶은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획득하고 소유한 정신적 자산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 식사하러 갔다. 그녀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일기장을 꺼내 헤세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창작은 이 땅에 태어나 벌이는 한바탕의 유희입니다. 창작을 통해 우리는 빼앗길 걱정 없는 정신적 자산을 얻습니다. 또 누군가를 위해 사랑을 담아 선물하고 싶은 마음으로 창작을 할 때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내면에서 창작의 재료도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헤세의 인간미 넘치는 답변에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래요! 창작도 삶도 결국 고통이 아니라 유희예요. 저도 살아있을 때 누군가를 위해 창작하는 기쁨을 깨달았더라면 '싯다르타'를 집필할 때 1부에서 막혀서 괴로워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소풍 같은 삶 속에서 좋은 것들 마음껏 창작하고 신나게 놀다 오시길 바랍니다. 좋은 벗과 식사 든든히 하시고 '자유'도 얼른 찾아 자유를 얻으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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