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생텍쥐베리 #인간의 대지 #무경계)

by 혜인

별빛과 등불을 벗 삼아 숙소로 돌아왔다. 서늘한 밤공기 속에 있다가 숙소 문을 여니 이렇게 안락할 수가 없다. 하루 만에 이곳이 나의 집이 된 기분이었다. 생텍쥐 베리는 내게 줄 것이 있다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처럼 접은 종이를 꺼냈다. 펼쳐보니 노란 머리에 연둣빛 옷을 입은 어린 왕자가 철새들과 함께 날아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직접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스케치도 색채도 그림 속 인물과 상황도, 그림을 그린 작가도 모두 마음에 들어 고맙다는 말을 여러 차례 전했다. 그림이 아직 조금 젖어 있어서 숙소 한편에 펼쳐서 말릴 겸 전시하니 근사했다. 그림 덕분에 숙소가 더 포근한 느낌이라는 나의 말에 그는 끄덕였다. 자신은 추억이 깃든 물건이 집의 온기와 의미를 더해준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그사이 하늘빛이 조금 옅어진 기분이 들었다. 몇몇 집들은 일찍 일어났는지 등불을 하나씩 켜고 있었다. 그는 내게 비행사의 눈으로 집마다 켠 불빛들을 보면 '모두 열심히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비행하며 고독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집집마다 켜진 불빛들을 내려다보며 사람들에게 연대감을 느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인간의 대지』중 한 구절을 낭송했다.

“살아 있는 별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창문이 닫혀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별이 꺼져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잠들어 있었을까…. 우리는 서로 다시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들판에서 드문드문 타오르는 저 불빛과 소통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에게 등불을 켠 집들은 만난 적 없는 사이일지라도 그에게 모든 이를 친근하게 느끼게 하는 원천이자 땅 위의 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편지를 읽기 위해, 누군가는 집안일을 하기 위해, 누군가는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켜두었을 등불. 그 등불 사이를 잇는 항로를 개척하고 먼 거리를 비행하여 편지를 배달했던 생텍쥐 베리. 그의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연대의식 덕분에 숙소의 등불도 더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그를 만난 후로 나는 등불 켠 집을 볼 때마다 그 가정에 평화와 행복을 비는 기도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내 의견을 물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어서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관심, 사랑, 소통, 연대 등의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가고 있을 때쯤 나는 그가 생각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무엇인지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영혼'이라고. 그는 영혼 없는 인간은 진흙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영혼의 뜻을 따르는 정신, 그리고 그 정신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정신의 뜻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가 존경하는 직업에 대한 사명감, 타인에 대한 책임감과 연대의식이 모두 정신의 뜻에 해당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잘 이해했다고 말했다.

다시 그는 내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마치 난센스 퀴즈의 답처럼 '사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대답에 살을 붙였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사이'는 우리의 시각과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고. 한자로 '사람 인'자를 보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댄 모양이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나와 네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넓은 시야에서 보면 분리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생명의 숨결이 깃든 하나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도 함께. 이러한 생각이 있는 한 우리가 서로에게 책임감 있는 사이임이 자명해지고 역지사지의 마음이 당연해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우리는 서로 도우려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생텍쥐 베리는 상호 경계를 허문 하나라는 마음이 휴머니즘의 정수 같다며 자신의 우문에 현답을 해주었다고 했다. 또 자신이 생명을 잃어가는 삶의 끝에서 느낀 바(우리들은 모두 같은 별에 사는 이웃이고 한 배를 탄 선원이다.)를 비슷하게 느끼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아서 기쁘다고 말했다. 진정한 의미의 부란 인간관계라고 생각하는 그였기에 그는 새로운 삶의 출발선에서 나를 만나서 부유하게 시작할 수 있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느새 바다는 아침 햇빛에 의해 깨어나듯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변했다. 파도 그림자가 빛의 춤을 추며 무한한 심연을 넘어선 신비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와 나는 그냥 이 장면을 고요히 바라보며 자연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우리가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발견했다. 하나뿐인 진정한 우리의 행성, 익숙한 풍경과 친구들의 집, 애틋함을 품고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발견하며 스스로를 넓혀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고 이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번쩍 하는 섬광 속으로 그는 다시 먼 길을 떠났지만 나는 다른 이들과 연결되고,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며 자유롭게 자신만의 하늘을 향해 날고 있을 그를 상상하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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