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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inee Oct 18. 2021

친밀함의 공간, 혼자만의 공간

Part 2. 스물 ~ 스물아홉: 노잼 라이프 청산기 3

- 난 스물다섯에 결혼할 거야. 아니, 못해도 스물여덟 전에는 꼭 할 거야.


대학생 시절, 나는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지금 생각하니 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어찌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는지, 친구들은 내 결혼 타령을 들을 때마다 궁금해했다.


- 도대체 왜 결혼을 빨리 하고 싶은 거야?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 그냥. 내가 선택한 사람과 나의 공간을 빨리 꾸리고 싶어. 나는 지금 조용히 짱 박힐 방도 없거든.




딸 둘, 아들 하나. 다둥이 우리 집은 늘 시끌시끌하다. 우리 가족은 나누고 싶은 말이 유난히 많다. 소아과 간호사인 엄마는 천진난만한 아기 손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여기에 유치원 교사인 여동생은 좌충우돌 유치원생 이야기를 더한다. 회사에서 얼마나 분통 터지는 일이 있었는지 내가 씩씩대면 직장 생활 27년 차 아빠의 공감과 '그래도 돈 벌어서 좋겠다'는 대학생 남동생의 부러움이 저녁 반찬이 된다. 심지어 내(가 아닌) 친구의 취업 소식에 온 가족이 기뻐한다. 남동생이 알바를 하며 만난 진상 손님 얘기에 모두가 분노한다. 젓가락이 오가는 저녁 자리에서도, 주말 예능을 보는 거실에서도, 할머니 댁에 가는 아빠 차 안에서도 늘 얘기가 오간다.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은지, 여기저기 오디오가 물리는 건 다반사. 그때마다 여동생은 꼭 자기 반 유치원생 같다며 놀려댄다. 유아기의 집단적 독백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성숙 인간들이라나 뭐라나. 우리는 그게 또 웃겨서 깔깔거린다.


우리 집은 친밀함의 공간이다. 우리 집에서는 서로 비밀이 없다. 내 친구가 엄마 친구가 되고, 여동생 친구가 내 친구가 된다. 우리 집은 열린 공간이다. 특별히 금지된 공간도, 닫힌 공간도 없다. 초등학생 시절, 남동생은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거실을 차지한 누나들 등쌀에 밀려 안방에서 놀곤 했다. 삼 남매 중 소수성별인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부터 나와 여동생은 한 방을 나눠 썼다. 한 침대를 공유하며 수다 떠는 밤이 쌓여갔다. '내 방'이 아닌 '우리 방'이었기에 나도 여동생도 특별히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 아니, 가족 모두 잘 때에 방문을 닫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안방은 부모님 외에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인 집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적어도 닫고) 잔다는 집이 있다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우리 집은 친밀함의 공간이다. 다른 말로, 우리 집에는 나 혼자만의 공간이 없다. 여동생과 함께하는 '우리 방'은 절대 '내 방'이 될 수 없었다. 우리 방에는 적당히 공용의 물건과, 내 물건과, 여동생의 물건이 혼재되어 있다.


- 너는 동생이랑 안 싸워? 아씨, 나 오늘도 립스틱 바르려고 하는데 없어서 보니까 언니 화장대에 가 있더라. 왜 맨날 말도 없이 가져가는 거야? 짜증 나 죽겠어!!


오늘도 언니와 한 바탕 싸웠다는 친구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우리 방을 떠올린다. 화장대에는 내 립스틱과 동생의 립스틱이, 옷장에는 내 옷과 여동생 옷이 뒤섞여 있는 방. 옷도 신발도 가방도 화장품도 같이 쓰는 우리에게는 내 화장대, 네 화장대가 따로 없었다. 우리 옷장, 우리 침대, 우리 책상이 있는 방. 둘 다 같은 옷을 입고 싶거나, 같은 립스틱을 바르고 싶은 날에는 구입한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할 뿐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한 번도 싸운 적 없는 나와 여동생은 친밀함의 공간을 친밀하게 유지하기 위한 생존법칙을 본능적으로 체득해왔다.


혼자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 나에게 온 택배는 내가 뜯기 전에는 절대 열지 말라고 화를 내는 것. 집에 돌아와서 마음에 들지 않는 새파란 페인트로 칠해진 내 방 벽지를 보는 것. 남자 친구와 통화하려고 화장실에서 거실로, 다시 우리 방에서 안방 화장실로 피신하는 것. 퇴근길 전화로 연인과 말싸움이라도 붙는 날이면 영화 10도 추위에도 집 밖에서 통화를 마치고 들어가야 하는 것. 퇴근하고 넷플릭스를 볼 계획이 예정에 없던 빨래를 널고 걔는 것으로 바뀌는 것.


혼자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은 물리적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혼자만의 공간이 없다는 . 나에게 그것은 타인과 독립된 인간으로서 경계를 마련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다시 친구들과의 대화



- 신기하다. 그러면 보통 결혼보다 독립을 하고 싶어 하지 않나?


- 음... 그러네. 그 생각은 못해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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