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스물~스물아홉: 노잼 라이프 청산기 4
좋은 기회가 생겨 옮기게 된 두 번째 직장은 첫 직장과는 딴판이었다. 내 또래 20대 동료가 많던 첫 회사와 달리 두 번째 회사에서 나는 '막내 of 막내'다. 주변 환경이 바뀌니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도 바뀌었다. 주말을 보낸 월요일 아침, 소개팅 얘기로 한창 꽃피우던 20대의 대화가 끝났다. 그 빈자리는 부모님 칠순 잔치 장소 추천, 아이와 함께 하는 피크닉 필수품 추천, 결혼 후 첫 다툼 해결에 대한 각자의 노하우가 대신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린 느낌이었다. 주제의 우열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전혀 다른 공간으로 들어간 느낌. 내가 모르는 진짜 어른들의 공간을 살짝 엿본 느낌이었다.
물론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고 아이를 길러야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족 공동체를 이루는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름의 가치관과 신념이 있다. '나'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생각들. 세상에 절대적인 정답은 없다지만 그럼에도 내가 정답이라고 규정한 것들. 그리고 그 규정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다짐들. 그 속에 가맘ㄴ히 앉아 있노라면 애늙은이인 척 살았던 내 모습이 좀 우스워진다. 하굣길에 동생을 데리고 집에 왔다고 어른인 척했다니? 수행평가를 알아서 했다고, 수능을 마치고 엄마 차를 타지 않고 혼자 집에 왔다고 그렇게 독립적인 사람처럼 굴었단 말이야?
인생의 크고 작은 결정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이루었다고 생각한 나의 교만이 부끄러웠다. 엄마의, 선생님의, 옆집 아줌마의 "혜인이는 참 어른스러워. 혼자서도 어찌나 잘하는지!" 마법 주문에 취했던 정신이 번쩍 깼다. 소신껏, 주체적으로 이루고 선택했다고 여겼던 것들은 엄마가, 아빠가, 선생님이, 주변 사람들이 바라는 책임감 있는 큰 딸로, 선생님이 바라는 말 잘 듣는 학생으로 지내온 시간들. 주변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 내가 먼저 선택했던 크고 작은 결정들. 경첩에 달려 90도로 왔다 갔다 하면서 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고 자신만만한 문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 빈 방에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지? 진짜 화가 났을 때는? 너무 슬프면? 진짜 행복한 일이 생기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에는? 정해진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할 자신이 있는데......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내가 만든 규칙이 없다. 빈 방에 멍하니 혼자 누워 있으면 누구라도 방에 들어와 정적을 깼고, 진짜 화가 나도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거나 쌍욕을 날릴 공간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은 "쉬는 날인데 방 좀 치우면 어디가 덧나니?"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날이 되었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척하던 나는 '나'라는 주체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씨. 큰일 났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이러다가 어영부영 또 주변의 규칙대로 등 떠밀려 결혼하는 것은 아닐까? 그 다음은? 아이를 낳으면? 지금의 가족 공동체를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를 꾸리면 나는 어떤 모습이 되는 거지? 아니, 내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는데 나와 잘 맞는 평생의 짝을 고를 수는 있는 걸까? 고민이 쌓였다. 불안하고 조바심 나고, 급기야 억울해졌다. 내 공간 한 번 갖지 못하고, 내 시간을 마음껏 쓰지도 못하고 독촉을 이기지 못해서 결혼해야 하는 거야?
말도 안 돼!
매일 고민을 모아서 폭탄을 빚고 있는데, 어느 날 옆자리 과장님이 불을 붙였다.
- 오! 최 대리님, 여기 집 나온 거 봐요. 이 동네 괜찮아요. 계약해!
폭탄이 터졌다.
그래. 집을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