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모임 후, 라함의 집에서 저녁 식사까지 하고, 집으로 돌아온 사울진은 그의 서재 안에서 차를 한잔 마시며
사엘이 제단의 불을 밝힌 그날 밤, 리만투어에서 첫 의식을 드린 날, 그리고 오늘까지의 모든 상황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전설처럼 내려오던 이야기가 이루어졌고, 제단에 불이 돌아온 것과 첫 의식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경이로웠다. 게다가 20대의 여자 제사장이라니, 이 또한 놀라운데, 그녀는 제사장으로서 흠없이 완벽하고 성스러운 신의 부르심을 받은 자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생각이나 말은 논리와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고, 모임에서 의견들을 자유롭게 스스럼없이 나누던 여람이나, 수아, 밧세, 그리고 아들 라단까지 지금까지 그는 상상조차도 해 보지도 못한 상황이었으며, 그 곳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그도 늘 꿈꾸어 왔던 세상이긴 했다. 또한, 라함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 웃고 떠드는 모습들은 마치 이 세상은 어떠한 갈등이나 불평들, 소외된 곳은 없는 듯, 평화롭고 즐겁게만 보였다. 실제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보이는 것이 그런것인지 혹은 그들의 세상만이 그건 것인지하는 생
각들로, 마음도 어수선하다. 그리고 과연 이들과 오늘
처럼 앞으로도 함께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사울진은 한 손은 입으로 손가락을 물어뜯으며 다른
한 손의 손가락들은 탁자를 탁탁 두드린다. 생각이
많거나 고민이 많을 때 하는 그의 행동이다.
웃날이 사울진의 서재의 문을 조심히 두어 번 두드리
더니 서재 안으로 들어 온다.
그를 보자 사울진이 묻는다.
“그래 알아보라고 한 것은?”
“카야대장은 제사장 가문의 병사들에다가 그가 개인적으로 사병들까지 훈련시켜 놓았던 거 같습니다. 게다
가 사병들은 곳곳에 위장하고 숨겨 놓아서, 그의 총병
력은 얼마 정도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울진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
다. “카야가 언제 그렇게 사병들을 늘려 놓았단 말인
가.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했을까? 마을에
있던 카야의 병사들은 물러갔는가?”
“네. 보이는 병사들은 물러갔지만, 그가 어디에 위장
병사들을 숨겨놓았는지는 여전히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병사들 지휘와 통솔에 있어서는 그 지략을 당할자가
없으니.”
“아무래도 저희도 위장 병사들을 좀 더 늘려야 하지
않을까요?”
“위장 병사뿐만 아니라, 무예에 아주 뛰어난 병사들을
모아서 따로 훈련을 시켜. 숫자는 많지 않아도 돼. 적
절할 때 쓸모 있게 쓸 수 있는 놈들로 말이야. 그리고
입이 무겁고 충직하고, 성실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젊은 여자, 남자들을 은밀히 알아봐.
빠른 시일에”
“알겠습니다.”
“제사장이랑 그 지파들 아들들하고 오래전부터 만난다
고 하더니, 아직도 따로 만나는가? 리단이는 아직도
사엘을 만나? 라단은 지금까지 이 모은 일들에 대해
들은 말이 없었던 것이야? 아니면, 알고도 전하지 않은
게야?”
“제가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주시하며 알아봤어
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
“누가 지금까지의 일들을 예상이나 했겠나. 다만, 사엘
과 다른 지파 수장들 그리고 그 아들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거라는 거지. 그리고 라단은 그들 사이에서
중요한 순간에는 배척당한 게 틀림없어. 오늘 모임도
같이하는 척하면서, 정작 중요한 순간엔 또 우리 지파
4지파 그리고 작은 지파들은 배척하겠지.”
사울진의 마음에 분노가 일며, 복잡한 것은 이 때문이
다. 기존세력들의 힘, 권력, 물질, 말은 함께 한다고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장벽, 그들만의 세계, 언제 배척
당할지 모르는 상황들, 어쩌면 함께라는 명분아래,
다른 지파들을 서서히 없애 버릴지도 모른다. 특히
제단의 불이 돌아온 날, 4지파와 5지파, 그리고 다른
작은 지파들이 제사장 가문의 병사들에게 제어를
받았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모든 지파 위에
그리고 지파를 넘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과연 제사
장은 누구의 편이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기존의 지파들이 제사장 가문의 힘까지
얻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신흥지파를 자신들의 지파로 흡수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달려와도 늘 외면당하는 이 세상의
구조에 화가 난다. 그래서 밤낮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벌
고 사람을 모아 지파를 세웠지만, 지파의 수장이 되어
도 누구 하나 지파라고 인정 해 주지 않고, 지파를 만들어, 세상의 평화를 깨트리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며,
오히려 더 배척 당하기도 했다. 사울진에게는 도대체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들은
무슨 평화를 지키고 있으며, 그가 무슨 평화를 깨트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기존의 지파들이 역사
와 전통을 지킨다는 이유로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욕망과 욕심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제단에 불을 다시 밝힌 자, 그리고 그 제사장에
게 지명받은 자가 왕이 될 것이다라는 말은 이 땅 위에
몇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진짜 인지, 아니면, 그들의 기득권을 더 탄탄히 유지하
려고 꾸며낸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전해 내려오는 대로, 제단의 불은 다시 밝혀졌고, 밝힌 자는 제사
장 가문, 그리고 저들이 친구라 부르는 사엘이다. 제사장은 곧 누군가를 왕으로 지명하여 부를 것이다.
도대체 왕이라는 자는 무엇이며, 무엇을 하려는 자
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제단의 불은 돌아왔고,
제사장은 지명을 받았고, 곧 제사장은 왕이라는 자를
지명 할 것이다. 신, 제사장, 왕, 이 구조는 마치 신,
제사장, 1지파처럼 이미 만들어진 권력과 힘의 구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 자식들 까지도 서로
친구라고 하지만, 과연 이 세계에서 우정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와는 다른 세상 속에서
살라고 지금까지 죽기 살기로 여기까지 왔는데, 아들
도 그와 같은 세상에서 그 처럼 살고 있으니, 그것도
속상하고 화가 난다.
5지파 수장 사울진은 훨친한 키에, 시원하게 잘 생긴
용모이다. 누구든 그를 한번 보면, 그의 호감가는 외모
와, 자신감 있고 위엄 있는 모습에 경이를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모습과는 달리 그는 날 때부터 버림
받은 자, 미움받은 자, 저주받은 자였다.
사울진의 모친은 그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며, 저주받
은 아이 보셋이라 외치고 숨을 거두었다. 사울진의
아비는 아내를 잃은 슬픔과 죽어가는 아내의 입에서
나온 저주받은 아이의 아비라는 충격과 고통을 견디
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채 안된 아이는 그렇게 부모 를 잃고, 그의 부모 옆에서시중들던 어린 하녀가 그를 거두어, 개의 젖을 먹이며
키웠다.
아이는 사람들이 말하는, “버림받은 것, 미움받은 것
그게 다 저주 때문이지. 기분 나쁜 아이야.”
라는 말들을 들으며, 이유 없는 폭력과 학대를 당하고
미움을 받으며 자랐다. 하루하루 숨은 쉬지만, 왜 살아
야 하는지, 도대체 왜 살아있는지 살아 있는 그를 원망
했다. 그래도, 그를 거두어준 하녀와, 어미개가 그에게
는 유일한 가족이고, 안식처였기에, 하루 하루 살아
갈수 있었다. 그가 10살쯤 됐을 때, 하녀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에 걸린 거 같은데, 어린 그는 아무것
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집 저 집 다니며, 도움을 구했지
만, 저주받은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돌봐준 하녀를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이유 없이 며칠을
앓던 하녀는 죽었다. 유일하게 그의 곁에 있던 사람이
라는 이를 떠나보낸 그는 슬픔을 감당 할수 없는데다
죽은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 죽은 하녀를
안고 며칠을 울었다.
며칠 후, 마을 사람들이 집이라고 만든 그들의 작은
은신처인 움막으로 들이닥쳤다.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 죽었는데, 전염병에 걸려 죽은 거라며, 마을에
병을 옮긴다고, 하녀의 시신을 가져가 불에 태운다고
했다. 그녀의 시신을 뺏기지 않으려고 마을 사람들을
밀어냈지만, 역부족이었고, 어미개가 어린 그를 지키
기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들자, 마을 사람들은
개를 잡아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어미개는
끝까지 저항하고, 어린 그를 지키기 위해 바둥거렸지만, 대여섯 명의 남자 장정들에 의해 사정없이 맞아
죽어 갔다.피를 흘리며, 어린 그를 바라보며 죽어 가던
어미개의 눈을 그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재수 없다고, 저주받은 집과 이들을 모두 불태운다며
움막에 불을 붙였다. 어린 그는 죽은 하녀와 어미개와
함께 연기 속에 있었다.
이대로 같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 하녀가
늘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왜 살아야 하냐며 원망이
가득한 그 에게, 그녀는 태어난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어떻게든 살으라는 말이 떠올랐다. 죽은 하녀의 몸을
한번 더 안은 후,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어미개도 한번
더 끌어안고는 감지도 못하고 죽은 어미개의 눈을
감겨 주었다. 어린 그에게 젖을 준 엄마 와도 같은 생명
체였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몰래 불이 난 집을 빠져나왔다. 숨어서 타들어 가는 그들이 그나마 머물며 집
이라고 부르던 곳과, 가족 같은 이들이 타들어 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사람들은 불꽃에 휩싸여 타는 움막
을 바라보며, 저주의 말을 퍼붓고, 낄낄 대고 웃고 있었
다. 어린 그는, 그들의 모습 한 명 한 명을 눈에 담고
마음에 새겼다.
어느 정도 불꽃이 사그러 들고, 저녁이 돼서야 그들이
그곳을 떠났다. 숨어 있던 그는 제야 소리 내어 울었다.다음날 동이 틀 때가 돼서야 태울 때로 태운 불이 꺼졌
다. 꺼진 자리에 가니, 재만 남아 있었다. 그는 모을 수
있을 만큼 재를 거두어 입고 있던 겉옷에 담았다.
그리고 그는 그곳을 떠났다. 가야 하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걸을 수 있을 만큼 그 마을로부터 멀리멀리
몇날, 며칠, 몆주를 걸으면서 다짐했다. 이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고, 살아갈 이유가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이유를 만들어 살아갈 것이라고. 그는 보셋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사울진 이라는 새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그는 더 이상 저주받은 자,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자가 되었다. 더 이상 약해서
짓밟히고, 뺏기고, 미움받지 않는, 사람들이 두려워하
는 힘 있는 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흔하지 않은 약초를 캐다가 팔며, 돈을 벌고,
사람들을 모아, 5지파라는 새로운 지파를 만들고 수장
이되었다. 수장이 된 며칠 후, 그를 보셋이라 부르며
저주하고 미워하던 사람들, 그의 유일한 가족과 같은
하녀의 시신까지 능멸하고, 어미개를 무참히 때려죽였
던 사람들이 있는 마을로 가서, 눈과 마음에 새긴
이들을 찾아, 그들을 가족이 보는 앞에서, 한 명씩 목부
터 다리까지 천천히 반으로 가르며 죽였다. 그들이
죽어 가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사랑하는 이가, 가족이옆에서 죽어가며 지르는 비명이 얼마나 비통한지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죽이고, 마을
을 모두 불에 태우며, 타들어 가는 마을을 끝까지 지켜
보았다.
하지만 승리했다, 이루어 냈다 하며 기쁘지 않았다.
어린 보셋 이라는 아이, 그리고 사울진이라는 어른
모두타들어 가는 불꽃 속에서 울부짖으며, 다시 한번
또 다짐했다. 수장이라는 자리를 지키며, 그의 지파와
마을을 지키겠다고, 다시는 마을이 불타는 일도, 사람을 갈라 죽이는 일도,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반드시
지키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마을로 돌아온 사울진은 수장이 되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열심히 일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 풍족히 살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만든 지파 안에서는 그 누구도 굶는 사람,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 멸시받거나 저주받는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마을 안에서, 그를 돌봐주던 하녀와 비슷하게
생긴 여인을 만났고, 부인으로 맞이했다. 하녀에게
못 다해 준 것을 다해 주고 싶어서, 사울진은 그 여인을
위해서 더 열심히 일했다. 자식도 얻었다. 사랑하는 부인, 그리고 아들, 함께 하는 지파 사람들 속에서 사울진
의 마음에 그제야 행복이라는 감정이 느껴졌다.
라단이 두 살 때쯤 부인이 그때 그 하녀처럼,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보셋이라
는 아이였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사울진은 여기저기
알아보며 부인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부인을 잃고 사울진은 그가
여전히 버림받은 자, 미움받은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 해도, 지파는 늘 힘이 없고 가난했다.
기존의 지파들을 보니, 대대 손손 가진 것이 많은지
늘 풍족해 보였다. 그가 저 지파 사람 이었다면,
힘이 더 많고, 가진 것이 더 많았다면, 부인의 병을
낫게 해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보셋처
럼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를 보면서, 힘을
더 가져야 겠다고 생각했다. 한 지파의 수장이 아닌
모든 지파의 우두머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더 잘 지킬 것이라
생각했고, 그리고 이제 그가 지켜야 할 아들 라단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들 라단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앉혀 그를 지켜 낼 것이며, 그의 아들은 사랑하는 이들
을 잃지 않고, 모두 지키며 헹복하게 살게 해 주리라
다시 한번 결심했다.
그런데, 그 결심을 이루어 내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일
이 생긴 것이다. 제단의 불이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 불은 돌아왔다 해도 앞으로 누군가가 왕이라는
자로 지명받아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세상은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저 왕으로 부름을 받아
모든 것을 가지고, 누군가는 그러지 못해 차별을 받고
시도도 해보기 전에, 결론이 나버린, 태어난 대로 살아
가야 하는 세상에서 가진 자는 가진 대로, 못 가진
자는 못 가진 대로 그렇게 계속 살아가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울화가 치민다. 사울진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대신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친다.
웃날은 그런 사울진이 걱정되어 바라본다. 웃날은
외국에서 들어온 노예였고 사울진은 그를 노예 시장에
서 사 왔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그는 거의 죽어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상인들이 그랬다. 어찌나 거칠고
난폭한지, 데리고 오는 내내 말썽을 피워 죽지 않을
만큼만 때리면서 데리고 왔는데 데려오니, 쓸모가
없어졌다며 그냥 저렇게 죽게 내버려 둔다고 했다.
사울진은 철창 속에 피 투성이로 드러누워있는 그를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많이 본 눈빛이었다.
어린 그의 옆에서 얻어맞고 죽어 가던 어미개와 닮은
눈빛이었다. 어린 그는 죽어 가는 어미개에게 아무것
도 해줄 수 없이 그저 죽는 것을 바라보았지만, 사울진
은 죽어 가는 노예를 살리고 싶어졌다. 사울진이 가격
을 묻자 상인이 저렇게 된 노예 데려갔다가 어디다
쓰겠냐며 그냥죽게 내버려 두라고 하면서도 가격을
흥정해, 사울진은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털어 그 노예
를 사서 집으로 데려 왔다.
사울진도 약초나 캐고, 그것을 팔면서 겨우 사는 넉넉
지 않은 형편이었던 때라 노예라는 것도 필요 없었지
만, 그는 직접 만든 약초로 노예의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해주고 밥을 끓여 먹여 주었다. 노예의 상처
난 몸은 점점 회복되어 갔고, 어느 날부터 사울진을
따라다니며 말없이 묵묵히 약초 캐는 것을 도왔다.
하루는 약초를 캐다가 둘 다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는
데, 그 노예가 사울진을 그의 몸으로 덮어 안고 미끄러
지는 바람에 사울진은 다치지 않았다. 미끄러져
굴러내려가던 둘이 멈추자 노예는 사울진의 몸을
살피며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내놈이 사내놈을 끌어안고 웃는 게 당황스
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사울진도 웃었다.
그리고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너는 이제부터 웃날이야. 웃는 날 만 되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웃날. 알았지?”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고, 무엇이든 금방 배우는 영특
한 웃날은 그 뒤로 사울진 옆에서 큰 힘이 되었고, 둘은
그렇게 약초를 캐고, 돈을 벌어 사람을 모아 함께 지파
를 만들었다. 노예로 팔려와 철장 안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던 그는 웃날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5지파 군사
를 통솔하는 총지휘관이며, 사울진 수장의 오른팔이
자 책사이며, 사울진을 위해 죽음까지 각오한 그의
심복이고, 형제가 된 것이다.
사울진의 옆과 뒤에는 늘 웃날이 있다. 웃날은 사울진
이 지어준 웃음대로 사울진 때문에 웃고, 그를 위해
산다.
며칠째 웃날의 눈에 사울진이 평상시 보다 상당히
초조하고, 불안하고, 화가 나 보여 걱정이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웃날은 사울진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수장님. 괜찮으세요?”
사울진은 웃날의 물음에 대답 없이 그저 손톱을 깨물
며 여전히 다른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그때, 넬 이 사울진의 서재의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사울진의 집을 드나드는
4지파 수장이다.
“수장님 오셨습니까.”
웃날이 인사를 하자, 그는 웃날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사울진 앞의 탁자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말한다.
“아니. 도대체 며칠 동안 돌아가는 이 일들이 다 무엇
이란 말인가. 허어 참.”
넬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두 손의 손가락들이 각각
입술과 탁자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울진을
보고는, 탁자를 탁탁 치며 말한다.
“이봐. 사울진. 또 불안하고 생각이 많군. 이렇게 책상
만 친다고 답이 나오나? 내가 계책을 좀 가져왔는데.”
그제야 사울진은 넬을 바라보며 말한다.
“무슨 말인가? 계책? 이 상황에서 무슨 계책?”
웃날도 자리에 앉으며 넬을 바라본다. 넬이 계락을
꾸밀 때 나오는 특유하게 가늘어지는 눈과 심하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보인다. 같은 얼굴이지만 때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비열하게도 혹은 온화하게도
보이는 참 신기 하다 못해 기이한 넬의 얼굴이다.
넬은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까지
지으며 말한다. “제단에 불이 돌아오지 않았는가?
게다가 오늘 지파들이 다 모인 모임까지 하고. 이것이 기회 일수도 있으니 우리가 역으로 이용해야지.”
넬의 말에 사울진이 의아해하며 말한다.
“기회 라니? 무엇이 기회 하는 말이야?”
넬은 그의 등을 의자에 더 깊이 기대며 말한다.
“에헤. 이봐. 사울진. 자네 요즘 너무 느긋해지고, 감
떨어진 거 아닌가? 우리가 언제 기회다 해서 하고, 좋은 때다 해서 했나? 위기를 이용해서 여기까지 왔지.”
넬의 말이 맞다. 지금까지 이룬 건 모두, 죽을 위기와
위험한 고비들을 넘겨서 해 낸 것이다.
4지파는 다른 세지파보다 가장 늦게 생성 됐고,
역사도 짧지만 그래도 5대째 내려오는 지파인데도,
다른 지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지파이다.
이때 사울진이라는 자가 지파를 만들고, 수장이 되는
것이 넬은 놀라 웠다. 하지만, 역시나, 5지파도,
전통 없이 조상 없이 세워졌다고 다른 지파들로부터
차별과 무시를 당하고 있어, 넬은 그의 처지가 그와
같은 거 같지만, 또 사울진이라면, 무엇이라도 해 낼
인물 같았다. 넬도 사울진처럼 다른 지파들에서
대대 손손 내려오는 부와 명예를 폐하고, 이 세상을
새로운 세계로 만들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이었다.
두 딸인 보와 부니아는, 그들이 당하고 있는 이런 부당
한 것들 특히 딸들이라서 더 겪어야하는 차별, 그 어떤
차별이든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주고도 싶다.
사울진의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과는 달리 넬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지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지파 사람들은 넬이 사람들과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어울리고 들어주는 그가
수장으로서 품위가 없고 경박하고 가볍다고 생각하며
무시하기도 하지만, 사울진은 그런 그의 성격을 좋아
한다.
그리고, 그의 그런 성격으로, 여기저기 지파와 상관없
이 가가 호호 듣고 오는 이야기들은 돌아가는 세상과
다른 지파들의 상황을 아는데 꽤 도움이 된다.
그렇게 두 지파는 서로 넉넉치 못한 물질도 도우며,
뜻이 같은 친구이자 동지가 된것이다.
사울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한 선반에 놓인 하얀
색 두 항아리를 쳐다본다. 엄마 같았던 하녀와 엄마
같았던 어미개의 재가 담겨 있다. 사울진은 어렵고
힘들고, 지치고,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이 항아리를
쳐다 보며 마음을 다 잡곤 했다.
선반아래에 놓인 찻잔을 가져와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찻잔에 차를 따라, 넬과 웃날에게 건네며 말한다.
“그래 그 기회라는 것이 무엇일까?”
넬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몸을 의자 뒤로 기대앉으며 말한다.
“무슨 기회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제부터 찾아보자
는 거지. 그런데 잘 된 것은 예전에는 다른 지파나, 제사장 가문의 소식들을 알아내기가 어렵지 않았는가?
사람들을 통해 듣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하지만 앞으
로 이렇게 모임도 하고, 제사장도 자주 보고, 오늘처럼
라함 수장집도 드나들다 보면, 뭐라도 알아낼 것이
많아지고, 그런 게 다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사울진이 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두서없는
계획처럼 들리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사울진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한다. “일단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더 두고 보세. 제사장이 말한 대로
정말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지
말이야.”
이렇게 각자의 아픔과 고통을 가진 세 사람은 신분과
상관없이 동지가 되었고, 이 세상에서, 소외받은 자들
이지만,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오늘 하루도
살아 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