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Seventeen 왕을 지명하고

by Hye Jang

신전에서 제사장과 수장들은 매달 한 번씩 만나, 한 달동안의 일들을 나누고, 계획들을 세우고, 역사서를

통해 역사를 배우고, 새로운 규범과 법도를 만들어 왔다. 5명으로 구성된 사환들도 임명이 되어, 매주 세 번

씩 사람들도 함께 드릴 수 있는 의식을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비도 적절히 내리고 해도 적절히

쏟아져, 농작물의 소출도 늘어났고, 각 지파로부터 십의 일을 거둔 것은 의식을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는

어려운 이들과 작은 지파들을 도운 결과, 사람들의 형편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젊은 여자 제사장을 낯설어 했지만, 풍요로 워진 세상속에서, 사엘이 다녀간 곳은 병도 낫는 다는 소문도 돌고, 그녀가 드리는

늘 경건한 의식속에서 제사장 집안과 경전의 신에 대한 믿음도 점점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사엘의 부친이자 전 제사장 요는 석 달 전 세상을 떠났고, 사엘은 그의 장례를 조촐하지만, 제사장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경건하게 치렀다.


그렇게 이들에게 2년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얼마 전, 4지파의 수장 첫째 딸 브니아가 수아와 혼인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다들 그녀의 당당함과 솔직

함에 놀랐고, 사울진은 라단을 4지파 수장 둘째 딸 보와 혼인시키고 싶다고 했지만 보는 갑자기, 뜬금없이

여람이 좋다고 했다.


사엘은 거의 2년 만에 밧세네를 방문한다.

문 앞에서 사엘을 기다리던 밧세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한다.

“제사장님 오셨습니까? 오늘 저의 집을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놀리기는.”

“진짜인데. 정말 영광인데. 도대체 얼마 만에 여길 온 거야.”

“진짜 오랜만이기는 해.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간 것 같아.”

“들어 가자. 애들은 아직 안 왔어.”


여전히 그대로인 밧세네 놀이방에 들어 서니 예전에 친구 들과 함께 하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여기저기 추억을 떠올리며 찬찬히 둘러보는 사엘에게 밧세가 묻는다. “그대로지?”

“응. 그대로야. 너무 좋다. 너네들은 자주 모였었어? 예전처럼?”

“우리도 그때처럼 매일 보지는 못했어. 엄마가 너네다 왔을 때, 같이 놀아 좋았다고 하시더니 우리들

다크고 힐 일 하느라 바빠져 못 온다고 얼마나 섭섭해하시던지.”

“그러게. 그런데 하갈 수장님은 어디 계셔? 인사해야 하는데?”

“마을에 잠깐 나가 셨어. 엄마도 바쁘시고, 시간도없으시면서 그냥 섭섭해서 그러시는 거지 뭐.”

“다들 많이 바쁘시구나.”

“네가 우리 모두 바쁘게 만들었잖아.”

“내가?”

“네. 제사장님께서 다 함께 살기 좋은 세상의 명분을 세우셔서, 지파 수장님들은 사람들 의견 들어야지,

둘러 봐야지, 가르쳐야지, 우리들도 거기 다 따라다니지. 바빠요. 바빠.”

“앗.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아니. 우리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지. 너 정말 잘하고 있어. 세상이 정말 많이 좋아졌어. 알지 너도?”


사엘이 그저 미소를 짓는다. 그녀 혼자였다면 해 내지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여람과, 수아가 들어오는지 밖이 소란스럽다.


“수아야. 나는 너 까지는 이해해. 그런데 갑자기 왜 나야?”

“나까지도 이해 안 되는 일이지.”


놀이방으로 들어선 여람이 사엘을 보고는 달려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한다.

“이게 얼마 만이야. 언제 왔어? 우리도 일찍 온다고 온 건데.”

뒤따라 오는 수아가 말한다. "얼굴은 지난주도 봤거든.”

여람이 수아를 보며 말한다. “그 말이 아니잖아. 사엘이 여기 놀이방에 온 건 꽤 오래됐잖아.”


서로 의자에 둘러 앉자, 사엘이 말한다.

“맞아. 여긴 정말 오랜만에 왔어. 너네 여기서 보니까 다들 열여섯 살 애들 같아. 아직도 태격 태격하고.”

밧세가 말한다. “쟤들은 할아버지 돼도 저럴 거야.”

사엘이 웃으며 말한다. “난 너무 좋은데.”

수아가 말한다. “제사장님 되시고, 마음도 너무 넓어지셨나 봐요. 예전에 나보고 맨날 생각 없다고 하더니.”

밧세가 수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마음이넓어진 게 아니라, 이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

하는 거지. 포기인가?“


이들이 수아가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실제로 그가 생각이 없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수아는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고, 아는 지식이 많고, 타고나기를 머리도 좋아 상황판단이 빠르고, 모든 일에 지혜

와 지략이 뛰어나다. 게다가 키가 크고, 골격이 좋은체격과, 귀품 있게 풍겨져 나오는 외모로 모든 지파의

소녀 들이 한 번쯤은 흠모했던 인물이기도 하다.그리고 사람을 이끌고 설득하는 언변에도 능해서,

지금까지 신전에 모여서 나눈 이야기들을 거의 주도해왔다. 하지만 가끔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고, 생색내

고 잘난 척하는 모습에 이들이 생각이 없다고 그를 놀리는 것이다.


사엘이 그들의 모습에 웃으며 말한다

“여기 오니까, 살 거 같아. 너네들도 여전하고.”

수아가 사엘에게 묻는다. “그런데 오늘은 왜 온 거야? 하기야 우리가 모이는데 무슨 일이 있어서 만난

건 아니 었지만, 요즘은 상황이 다르니까”

여람도 묻는다. “그러게. 너 온다고 해서 너무 기뻤는데, 아.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 걱정도 되더라고.”

사엘이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한다.

“미안. 내가 그동안 너희들에게 걱정을 많이 줬나봐.“

밧세는 사엘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한다.

“에이. 그런 말이 아니잖아. 한동안 못 오던 친구가 오니 당연히 기쁘고, 또 친구니까 당연히 걱정하는 건데, 뭐가 미안해.”

수아가 말한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건대?”

밧세와 여람이 수아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동시에 말한다. “에이.”

수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아니야? 이거 아니야?”

사엘이 수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한다. “아니야. 잘 물어봤어. 오늘은 딱히 일이 있어서 온건

아니고 오랜만에 나한테 주는 쉬는 날. 그래서 온 거야. 너네들이랑 수다도 떨고, 놀이도 하고, 나중에 저녁도

맛있게 얻어먹고 가려고. 예전처럼.”

여람이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래? 그건 거였어? 잘했어. 쉬는 날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

밧세가 사엘을 보며 묻는다."그런데 리단이는 안 와? 오라고 했는데, 아직 안 오네. 너는 알아?"


사엘이 모른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녀는어젯밤 리만투어에서 그를 만났지만, 그는 오늘 만남

에 온다 안 온다 별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 친구들한테 어젯밤 그를 만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사엘이 화제를 돌려 묻는다. “그런데. 아까 너네들 들어오면서 한 이야기 뭐야?”

웃고 있던 여람의 얼굴이 갑자기 시무룩 해 지자 밧세가 대답한다.

“수아랑 여람이 혼인할지도 모르겠어.”

수아랑 여람이 동시에 말한다. “아니거든.”

사엘이 말한다. “그런데 브니아는 수아를 원래 예전브터 좋아했었고, 보는 사울진 수장님 께서 라단이랑

혼인시키고 싶다고 하셨잖아.”


사엘과 라단이 어젯밤 리만투어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다. 사실, 오늘 라단은 아버지 사울진 때문에 보를

만나러 갔다. 어차피 둘이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니, 두 사람선에서 해결하자고 말하려고 만나러 간다고

했다.


밧세가 말한다. “그랬는데, 보는 여람이가 좋다고 했잖아.”

여람이 밧세를 보며 말한다. “신나 보인다?”

사엘이 말한다. “그렇구나."

여람이 사엘을 보며 묻는다. “보가 나랑 혼인하고 싶다는데, 괜찮아?”


사엘은 여람이 그녀에게 심각한 얼굴로 괜찮냐고 묻자 당황스러워, 잠시 침묵한다. 라단의 이야기는 괜찮지

않았다. 여람의 이야기는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둘 다 그녀가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없다. 그녀와 라단이 서로 좋아하고 있으니, 우리 둘이혼인하겠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오늘 보와 라단이

만나서 둘이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어른들의 입장과 의견을 반대 만은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잠시 생각하던 사엘이 입을 연다. “나는 괜찮다. 안 괜찮다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잖아.”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그녀도 답답하지만, 제사장인 그녀가 지파끼리 오가는 혼담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여람이 묻는다. “그럼, 마음은? 마음은 어떤데?”

사엘의 입에서, 싫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여람은 묻고 싶다.

사엘은 당연히 싫지라고 말하고 싶다. 혼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라단이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은 싫다.

묻는 사람의 의도와, 대답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이 서로 다르다.


수아가 말한다. "그런 질문이 어딨어? 넌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사엘이에게 물어? 지파 어른들끼리 말씀하

시는 혼담에 대해 사엘이가 자기 입장이든 마음이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사엘은 수아의 말이 정확하고, 이렇게 대신 말해 줘 고맙다. “수아 말이 맞아. 내가 뭐라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여람은 사엘에 대한 마음이 들킨 것 같아 쑥스럽기도 하고, 또 중간에 맞는 말이지만, 콕 집어 말한 수아에게

불만도 생겨, 뽀롱 통한 얼굴로 말한다. "친구니까 물어 본거지. 친구한테 혼인이야기 나오는데, 친구로서

그게 어떤 마음인지 물어본거야.“


다들 잠시 말이 없다.

갑자기 그들의 삶에 들어온, 혼인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다.

잠시 후, 사엘이 말한다. "내 마음이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뭐가 중요해. 너희들 마음이 중요하지. 다만.”

여람이 묻는다. “다만?”

사엘이 손으로 여람의 머리를 헝클어 뜨리며 말한다. “너네 어른이다. 혼인 이야기도 나오고. 많이 컸는데.”

여람이 머리를 빼며 말한다. “그전부터 컸거든.”

사엘이 말한다. “너네들은 언젠가는 수장도 돼야 하고 또 혼인도 해야 하겠지. 그게 언제가 됐든, 너네들은

좋은 수장,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거야.”


여람은 수장이 되는 것도 맞고, 앞으로 혼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물론 사엘을 좋아하

지만, 사엘과 혼인을 하여, 가정을 이루어 보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거

나,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저 밧세와 수아, 그리고 사엘이랑 같이 늘 이렇게 함께 하고 싶고,

함께 할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혼인이나 수장 이야기들이 현실화가 되어 가는 것 보니 사엘 말대로 이젠

정말 어른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수아가 말한다. “다들 심각해하지 마. 그냥 어른들끼리 주고받으시는 이야기야.”

여람이 수아의 말을 거들며 말한다. “맞아. 그냥 우리 주변에 혼인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어른들도 괜히

그러시는 거지. 나도 지금까지 보가 말 한 것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한 게 없어. 아버지도 넬 수장님에게 아무

말씀 안 하신 걸로 알고 있고. 수아 너는? 라함 수장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신 거 있어?”

수아가 말한다. “아버지도, 아무 말씀 안 하시던데."

밧세가 묻는다. ”그럼 이러다 다 말수도 있는 거야?“

수아가 말한다. “그럴 수도. 그리고 나도 아직 그렇게 누군가에게 매여서 살고 싶진 않아. 지금 혼인하면

너무 억울해. 난 한 최소한 5명 이상의 여자들을 만나 보고 싶어.”

수아가 손바닥을 쫙 펴서 보여 주며 다시 한번 말한다. “최소 요 손가락만큼, 5명.”

밧세와 여람은 수아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수아가 묻는다. “왜? 너넨 안 그래?”

밧세와 여람이 동시에 말한다. “응.”


그때 하갈이 놀이방으로 들어온다.

“제사장님께서 우리 집에 방문하셨다면서요. 이렇게나 귀한 분이 우리 집에 오시다니.”

“수장님.”


사엘이 의자에서 일어나, 하갈을 부르며 달려가 그녀에게 안긴다.


하갈은 사엘을 안아주며 말한다. “그래. 잘 왔어.”

“저도 오늘 여기 오니까 너무 좋아요. 오랜만에 편안하게 쉬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 일만 하지 말고, 여기 와서 놀고 쉬고 그래.”

“네. 이제부터는 자주 오도록 시간 내 볼게요.”

“저녁 먹고 갈 거지? 맛있는 거 해 줄게.”

“그럼요. 당연히 먹고 가야죠. 수장님과 할머니 집사님 음식이 얼마나 그리웠는데요.”

“그럼 우리 제사장님을 위한 특별식을 좀 만들어 봐야 겠는데.”


하갈이 사엘을 보며 웃고는 방을 나간다


밧세가 묻는다. “저녁 먹기 전에, 오랜만에 뭐라도 좀 하고 놀까?”


이들은 뒷마당으로 나가, 편을 먹고 통에 화살 넣기 놀이를 한다.

오랜만에 모인 이들의 웃음소리가 마당에 가득하다.

사엘은 밝게 웃는 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본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웃음소리를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어 본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또 있더라도, 지금처럼 이렇게 함께 한다면, 그 어떤 일도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또 반년이 흘렀다.


오늘 사엘은 한 달에 한번 있는 수장들 과의 모임후,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라함과 수아를 신전으로

따로 부른다. 라함은 더 필요한 역사서가 있어서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수아와 함께 신전으로

향한다.


신전 앞에 서 있던 카야는 이 둘이 오는 것을 보자, 가볍게 목례를 하며 말한다.

“수아님은 신전 안으로 들어가시고, 수장님께서는 잠시 손님방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제사장이 수아만 따로 만나려 하는 것에 둘은 잠시 의아해했지만, 라함이 수아를 보며 그렇게 하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수아는 혼자 신전 안으로 들어선다.


수아가 천천히 혼자, 닫히는 문을 보고 놀라며 사엘에게 묻는다.

“뭐야? 누가 닫은 거야? 카야는 방금 전에 간 거 같은데?”

“제가 닫은 것입니다. 놀라지 말고 이리로 오세요.”


높인 말을 하는 사엘에게 수아도 높인 말로 말하며 걸어간다.

“리만투어 바다 위를 걸어 다니시고, 이번에는 문을 손도 안 대고 닫으시고, 다른 거 뭐 또 있으세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신비한 능력이 있으신 거예요?”


사엘이 그런 수아에 말에 말없이 웃음을 짓는다.


사엘 앞에 마주 선 수아는 좀 전의 장난 끼 있는 얼굴에서 차분한 표정으로 묻는다.

“따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부르셨습니까?”

사엘도 미소를 거두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신 후, 천천히 입을 연다.

“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해야 할 말씀이 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들으셔야 할 말씀이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

따로 모셨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사엘이 수아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대신, 제단 쪽으로 몸을 돌려, 제단 앞에 앉는다.

그런 사엘의 모습을 보고, 수아도 사엘 뒤에 앉는다.


잠시 후, “당신의 부르심을 받은 자, 당신의 음성을 듣습니다.”라고 사엘이 말한다.


제단의 불이 조금 전 보다 더 활활 타오른다.

“당신의 부르심을 받은 자, 당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제단의 불이 타오르며 불꽃이 바람처럼 일더니, 벽에 걸려 있는 등불들의 불이 꺼지면서 신전 안이

깜깜해지고, 제단 앞의 불 만이 세상에는 없는 듯한 색깔로 영롱하게, 반짝이며 밝고 환하게 타오른다.

해처럼 눈이 부셔 쳐다볼 수도 없다. 이 모든 광경들이 수아는 너무 놀랍지만, 그저 숨 죽이고, 이 광경들을

경이롭게 듣고 바라본다.


“당신의 부르심을 받은 자, 당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듣고, 영이 있는 자는 느낄지니”


제단의 불빛이 조금 사그라들면서 다시 한번 불꽃들이 바람에 흩날리듯 신전 안 주변을 맴돌다, 수아의 주변

으로 모여 일렁인다. 수아는 흩날리는 불꽃을 바라본다. 마치 불꽃 속에 있는 것도 같고, 바람에 나부끼는

노란 꽃잎들 속에 있는 것도 같다. 그의 주변을 맴도는 불꽃이 점점 빠르게 움직인다. 수아는 정신이 혼미해

지는 것 같아,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쳐다보느라, 잘 들리지 않던 소리

가 눈을 감자, 불꽃이 맴도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어떠한 소리인지 더 자세히 듣고 싶어 수아는 최대한

소리에 집중해 본다.


잠시 후, 불꽃이 맴도는 소리 사이로 음성이 들린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고, 영이 있는 자는 느낄지니.”


수아는 잠시 사엘이 하는 말인가 하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엘의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소리이다.

게다가 인간이 냈다고 할 수 없는 공기 중에 떠도는 듯, 울려 퍼지는 이 음성? 생각난다. 리만투어 언덕에서

첫 의식을 드렸을 때 울려 퍼졌던 그 음성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고, 영이 있는 자는 느낄지니.”


“들을 귀가 있는 자, 영이 있는 자, 듣고 느끼겠습니다.” 라고 사엘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수아는 의지 인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인지 모르겠지만, 숨을 한번 내쉬고는 사엘의 말을 따라

한다. “들을 귀 있는 자, 영이 있는 자, 듣고 느끼겠습니다.”


불꽃이 맴도는 느낌이 사라지면서, 주위가 고요하다. 수아는 천천히 눈을 뜬다. 제단 앞에 여전히 몸을 구부

리고 앉아 있는 사엘과, 눈이 부셔 바라볼 수 없었던 제단의 불이 선명하고 밝은 빛으로 신전 안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것이 보인다.


불꽃 속에서 나오는 음성인지, 신전 안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인지 알 수 없지만, 공기 중에 또렷하

게 천천히 울려 퍼지는 음성이 들린다.

“들을 귀 있는 자, 영이 있는 자, 느끼고 들을지니. 제단에 불을 밝힌 자, 그 자와 있는 자, 왕으로 부르심

을 받았으니,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될지라.”


음성을 들은 수아가, 놀라서,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열려 하자, 제단의 불이 평상시처럼 타오르면

서 벽에 걸려 있는 6개의 등잔에도 불이 다시 밝혀진다.


어두웠던 신전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듯, 처음 들어 왔을 때와 같다.


수아가 꿈인가 하면서 고개를 세차게 한번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 나자 눈앞이 핑 돌 듯 어지럽다.

눈을 다시 감고 머리를 한번 좌우로 흔들고는 천천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본다. 앉아 있던 사엘도 자리에

서 일어난다. 주변을 둘러보던 수아의 눈과 사엘의 눈이 마주친다.


사엘은 수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한다.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 당신을 뵙습니다.”

사엘이 말하자, 수아가 사엘 앞에 앉으며, 묻는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들을 귀 있는 자, 영이 있는 자가 이미 보고 듣고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래? 무슨 일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말해봐.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수아님이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지금 생각하시는것 그것이 맞습니다. 제단의 불은 밝혀졌고, 또한 경전

의 신이 왕으로 지명한자, 그 자가 왕으로 부르심을 받아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지금 나라는 거야?”


사엘이 대답대신 수아를 가만히 쳐다본다. 수아가 쓰러지듯이 주저앉는다.

둘은 아무런 말 없이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는다.


사엘이 신전 문을 열자, 문 앞에 서있던 카야가 손님방에 가서 라함을 데려 온다. 신전으로 들어온 라함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수아를 보자, 조금 빠른걸음으로 걸어 들어와 수아 옆에 앉아, 그의 어깨를

감싸 쥐고 묻는다.

“괜찮으냐?”

“수아님은 괜찮으시니 걱정하지 마세요.”

라함이 사엘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저에게도 말씀해 주시면 제가 해결해 보겠습니다.”


라함의 말에 사엘이 수아를 한번 쳐다 보고는 말한다.

“제단에 불을 밝힌 자, 그리고 왕으로 지명받은 자.”


라함이 사엘의 말을 듣고 놀라 말을 잇지 못한다.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은 라함이 사엘에게 묻는다.

“그럼 제단의 불을 밝힌 자가, 왕으로 지명한 자가?”


라함이 다시 한번 말을 잇지 못하고, 수아를 쳐다본다.


사엘이 라함을 보며 말한다. “네. 그렇습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수아가 고개를 들어 사엘을 쳐다 보며 말한다. “왜 그게 저입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갑자기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저는, 저는 정말 왕인지 뭔지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사엘은 이 와중에 그동안 그녀가 보아온, 정말 수아다운 수아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친구로도 제사장으로도 그에게 아무 말도 해 줄 수가없다. 수아 혼자 스스로, 이 부르심에 대한 길과 해답을

찾아 가야 한다.


사엘이 수아를 보며 말한다. “수아님은 오늘 갑자기 들으신 말씀이지만, 저는 석달 전부터 알고 있었고,

또한 경전의 신이 말씀하신 대로 오늘 당신을 이 자리에 모신 것입니다 “

“저는 제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수아 처럼 사엘도 제사장이 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묻고 생각했던 질문들이다.

왜 나여야 하는가?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가? 무엇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모든 의문들 속에서 사엘은 어떤 것은 해답을 찾기도 했고, 어떤 것은 아직도 해답을 찾아가며, 제사장의

길을 걷고 있다.


“저도, 그저 부르심을 받은 대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이 이후로 생기는 모든 의문

들을 스스로 에게 질문해 보시고, 생각해 보시고, 또다시 드는 질문의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스스로 답을

얻으실 거예요.”

“내가 감당하지 못하겠다면? 아니 감당할 수 없다면?”

“경전의 신께서 당신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왕으로 지명받은 자를 감당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무엇을 하시든 저도 당신과 함께 할 거예요.”


사엘의 말에 수아는 대답도 질문도 없이 천장을 바라 본다.


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일어나세요. 오늘은 이만 집으로 가셔서 쉬시는 게 좋겠어요.”


신전 문 앞에 서 있던 카야가 사엘이 일어나자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주변에서 나는 인기척을 느껴

주변을 살피며, 벽 모퉁이를 돌자, 사환 한명이 서 있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환이 카야의 물음에 당황하며 말한다. “신전 앞 뜰을 지나가다가 불빛이 환하길래 주변 정리 할게 남았는지

잠시 들른 것인데, 아직도 모임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나머지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네.”


사환이 재빨리 자리를 뜬다. 정예무사들에게 늘 사엘의 주변과 신전 주변을 지키라고 하지만, 신전을 지키

는 사환들의 발걸음까지 막을 수는 없고, 카야는 그녀의 말과 행동이 꺼림칙 하지만, 사환이라 더 추궁할

수도 없다.


라함이 수아를 부축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를 본 카야가 달려와 수아를 잡고 앞서서 걸어가자,

사엘이 라함을 부르자, 라함이 걸음을 멈추고 사엘을 바라본다.

“지금은 많이 혼란스러우실 것이고, 부르심을 감당하고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하실 거예요. 그리고

당분간 이 일은 수장님과 수아님 저 이렇게만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저에게도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제사

장님 뜻을 잘 알겠습니다. 물론 경전의 신의 뜻이겠지만요”


라함이 경전의 신의 뜻이라는 말에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졌는지 그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네. 지금 두 분의 마음이 어떠신지 잘 압니다. 그러니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찾아오세요.”


라함이 대답대신 사엘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신잔을 떠나고, 카야는 라함과 수아를 배웅하고 신전으로

다시 돌아와, 제단의 불 앞에 앉아 있는 사엘에게 와서 말한다.

“호위무사들이 두 분을 모셔다 드리게 했습니다.”

“카야. 정예무사들 있지? 수아집 주변도 은밀히 돌아보라고 해. 당분간 수아 주변의 상황을 살펴 야겠어.”

“네.”

“그리고, 두 분이 원하시면, 언제든 나를 만나실 수 있게, 중간에서 연락도 잘 챙기고, 다른 수장님들과

사람들 이 아직은 알지 못하게 단속도 잘하고.”

“네.”

“그가 지금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문이 난다면,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수아도 힘들어지겠지만, 또

그가 위험해 질지도 몰라. 그러니 이제부터 카야는 수아도 잘 지켜야 돼.”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사엘은 다시 제단의 불을 바라보다, 눈을 감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도를 한다.


카야는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신전을 나오자, 문이 닫힌다. 카야는 오늘도 여전히 닫혀 있는

문 앞에 선다. 사엘, 그리고 사엘이 사랑하는 자, 그리고 왕으로 부르심을 받는 자까지 그가 지켜야 할 사람이

한명 더 생겼다. 그만큼 사엘이 감당해야 하는 일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경전의 신이여. 저 아이를 지켜 주세요. 그리고 저 아이가 사랑하는 자도, 당신이 지명하며 부른 자도

모두 지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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