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Twenty Two 매향초

by Hye Jang

수아가 서재를 나가고, 의자에 앉아 있던 라함의 머리

가 핑 돈다.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는다.

그때, 라함의 귓가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저녁인데, 새들이 지저귀네.’라고 생각하며, 창밖

을 보려고 눈을 뜬다. 눈앞에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보

인다. ‘여기가 어디지?’라고 생각하는데,


“라함 오빠.” 하는 소리가 멀리서 메아리 소리처럼 들

린다.


익숙하지만 오랫동안 듣지 못한 목소리다. 소리가 나

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비갈이 서 있다.


“너?"


라함의 나이, 열아홉 살 때쯤, 만난 그녀는 그보다 세

살이 어린, 작고, 평범하고, 소박하며 웃는 모습이 예쁜

소녀였다. 어떤 사람들도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

만, 그녀는 그를 '라함 오빠'라고 불렀다. 태어나면서

부터 모두들 그를 어려워하고, 조심히 대했지만, 그녀

는 그를 전혀 어려워하지 않았다. 어떨 때는 이것도

못하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고, 궂은일을 시키기도 했

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그런 모습과 행동이 오히려 정

감 있고 편안했다. 그래서 그녀와 보내는 시간을 좋아

했고 그녀와 그렇게 3년을 만났었다. 라함은 그녀를

만나면서, 그녀와 함께, 이렇게 산속에 살면서, 밥도 함

께 지어먹고, 집 앞에 농작물도 키우면서, 그녀가 해주

는 우거지 국을 먹으며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면 편안

하고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가 처음으로 함

께 하고 싶었던 그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소녀였다. 하지만 지파끼리 혼담이 오가

던 여인과 혼인해야 했고, 그는 그녀와 헤어져야 했다.

언젠가, 그녀에게 헤어져야 한다고 어렵게 말하는 그

에게, 그녀는 알았다며, 이해한다며, 이미 다 알고 있

는 것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는, 여전히 예쁜 미

소를 지어 보이고는 그를 떠났다. 지금까지 살면서 우

연이라도 마주치고 싶었던 여인이다. 그런데 지금 그

녀가 그 앞에 서있다.


“오빠는 무슨 낮잠을 그리 오래 자요? 이제 그만 일어

나 식사하세요. 우거짓국 다 식어요.”


“우거짓국?”


그녀가 만들어 주던 그녀와 함께 먹던,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어버린 국이다.


“식사하시고, 나무도 해 와야 돼요. 안 그러면 오늘밤

춥게 자야 할 거예요.”


그렇게 그에게 또 궂은일을 시키고는 그녀는 소리까지

내어 웃는다. 그녀의 웃는 얼굴과 웃음소리가 주변에

맴돈다. 라함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이 꿈에서 깨어

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조금만 더 잠시, 이 꿈속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라함과 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하갈도 머리가 무

겁고 몸이 늘어지는 기분이다. 할머니 집사에게 쉬겠

다는 말을 하고는 방으로 올라가 이불 위에 누우니 천

장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어지럽다. 눈을 감는다. 한참

을 자고 일어난 기분이다.


“엄마.”


“어?”


밧세가 무슨 일로 방에 왔지라고 생각 하며 눈을 뜨니

놀이방이다. 하갈은 ‘내가 언제 여길 내려왔지?’라고

생각하며 방 안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의자에 둘러앉

아 있는 것이 보인다. ‘애들이 왔나? 언제들 온 거지?’

하며 그들 쪽으로 다가가니 밧세의 얼굴이 보이고,

누군가 밧세 머리 뒤로 얼굴을 내밀며 말한다.


“당신도 어서 와요.”


“그래. 너까지 와야 시작해. 빨리 와.”


그녀를 너라고 부르는 이는 이 세상에 그녀의 오빠들

단 둘 밖에 없다. 희미하던 앞이 뚜렷해지면서, 둘러앉

아 있는 이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오빠들과, 남

편 브올, 그리고 밧세가 모여 앉아 있다. 그가 커 가면

서, 그가 친구들을 데리고 놀이방에 와서 노는 모습을 보면서, 오빠들이 살아 있었다면, 브올이 살아있었다

면, 저렇게 밧세와 있었겠지 하며, 늘 꿈꾸고 상상하던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은 꿈이라고 하기엔 서로 이야

기를 하는 소리와 웃는 모습이 실제처럼 너무나 선명

하다.


“엄마 빨리 오세요.” 밧세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

다. 언제나 밝고 씩씩한 아들이 그들 사이에서, 유난히

더 밝아 보인다. 그런 밧세의 어깨를 감싸고 토닥이는

브올의 인자한 모습이 보인다. 밧세에게 얼마나 다정

하고, 든든한 아빠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장

난기가 가득한 두 오빠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들은 밧

세랑 얼마나 재미나고 신나게 놀아주었을까 하는 생

각이 든다.


그들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이 흐른다.


“수장님. 수장님.”


할머니 집사가 하갈을 흔들어 깨우며 부른다. 여전히

몽롱한 정신인 하갈이 으음 하며 신음 소리를 낸다.

할머니 집사가 하갈을 일으켜 앉히고는 가지고 온 해

독초물을 하갈의 입에 조심히 흘려 넣는다. 하갈이 조

금씩 흘려 들어오는 물을 마시고는 캐액 기침을 한다.


하갈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조금만 더 드세요.” 조금 더 마신 하갈이 머리를 좌우

로 흔들고는 천천히 눈을 뜬다. 그녀의 방이고, 할머니

집사가 보인다.


“무슨 일이 있었어?”


“매향초를 드신 거 같아요.”


“매향초?”


“네. 환각을 일으키는 독초예요. 그것을 어떻게, 어디

서 드신 거예요?”


“모르겠어. 제사장님 댁에 가서 모임 하고, 거기서 먹

고 마신 게 다야. 머리가 너무 아파.”


“해독초물을 드셨으니 곧 나아지실 거예요.”


“밧세는?”


“방에 계세요.”


“가보자. 밧세도, 모임에 같이 있었잖아.”


하갈과 할머니 집사가 서둘러 밧세 방으로 간다.


수아랑 밖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온 밧세

는 이층으로 올라가면서, 현기증을 느낀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몸의 증상이 당황스럽지만, 조금 피곤

해서 그런가 보다 하면서, 층계를 다시 내려가 부얶으

로 가서 물 한잔을 마신다. 그때, 할머니 집사가 와서

식사를 하겠냐고 물었지만, 괜찮다고 하고는 다시 방

으로 올라 가 이불 위에 눕는다.


다시 현기증이 난다. 눈을 감는다.


“밧세야.” 누군가 그의 몸을 흔들어 깨운다.


이 집에서 들어 보지 못한 어른 남자 목소리다.


“밧세야.”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다.


눈을 뜨니, 희미하게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누구지?’

그를 내려다보는 낯선 남자의 얼굴이 보인자, 밧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묻는다. “누구세요?”


“아직 잠이 덜 깼나 보구나. 아빠지 누구긴 누구야.

내려가서 어서 저녁 먹자. 삼촌들도 다 오셨어.”


‘삼촌? 아빠?’ 꿈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감고 고

개를 좌우로 여러 번 흔들고는 감았던 눈을 다시 뜬다.


식당이다.


엄마가 반갑게 웃으며 말한다. “밧세야 어서 와. 당신

도 빨리 와요.”


“밧세가 낮잠을 아주 푹 잤나 봐요. 아직도 덜 깬 것도

같고.” 누군가 그의 손을 잡고 의자로 이끌며 말한다.

방금 전 방에서 그를 내려 다 보던 그 남자이다.


엄마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 둘의 웃음소리도 들린다.

“오빠. 오빠도 저 나이 때 낮잠 많이 자지 않았어요?”


“그렇지. 하루 종일 뛰어 노니 피곤 하지. 밧세는 네가

아니라 날 닮았나 보다.”


“형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밧세는 날 닮았지요.”


“제 아들이 제가 아니라, 형님들을 닮았습니까?”


“내 아들 같고 다들 왜 그러세요? 날 제일 많이 닮았겠

죠. 그렇지 밧세야?”


“너보다는 브올이 낫다.”


“뭐라고요?”


엄마의 밝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아빠는 저렇

게 생겼구나, 엄마의 두 오빠들, 그에겐 삼촌인 분들은

저렇게 생기셨구나라고 생각하며, 접시에 담긴 음식을

수저로 뜬다. 너무나 작은 수저와 그 수저를 뜨는 작은

손이 보인다. ‘뭐지?’라고 밧세는 생각한다. 아빠라는

사람이 수저에 반찬을 올려 주며 말한다.


“우리 밧세 많이 먹어. 그래야 키가 이 만큼 크고, 튼튼

해지지.”


그가 꼬마였을 때, 엄마가 수저에 반찬을 올려 주며 해

주던 말이다. 아빠라는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엄마처

럼 이렇게 해 주었을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옆에 앉

은 엄마를 올려다본다. 어릴 적 꼬마 일 때, 옆에 앉아

늘 올려다보던 엄마의 얼굴이다. 앞에 앉은 두 남자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가 보인다. 가끔 그를 내

려다보며, 웃음을 짓고, 옆에 앉은 그에겐 아빠, 그녀에

겐 남편이라는 사람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언제나 밝

고 씩씩한 엄마 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이들 사이에서

행복해 보인다.


“밧세야.”


또 누가 부르지라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숲 속

사이로 수아가 서 있는다.


“빨리 와. 애들이 기다려.”라고 말하며 수아가 앞장서

서 뛴다.


기억난다. 이 숲 속. 수아와 뛰어가다가 넘어진 적이

있다. ‘그런데 왜 넘어졌었지?’ 하고 생각한 순간,

발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 중심을 잡는데,

앞서 달리던 수아가 뒤돌아 보며 웃음을 짓는다. 그의

웃는 모습에 갑자기 숨이 막히며, 밧세는 몸의 중심을

잃고 넘어진다.


수아가 넘어진 그를 보고 달려온다. “괜찮아?”


밧세는 “응. 괜찮아.”라고 말하며 일어나려 하는데,

발목이 접질려지면서 넘어졌는지, 통증이 느껴지며

그대로 다시 주저앉는다.


“봐봐.” 수아가 그의 발목을 잡고 만져 본다


“아.”


“아파?”


“응.”


“발목이 접질려졌네. 잠깐만.” 수아는 주머니에서 수건

을 꺼내 그의 발목에 묶어 주며 말한다.


“이거라도 일단 묶으면, 지탱이 될 거야.” 수아가 발목

을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만져 본다.


‘수아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라고 밧세는 생각하며,

수아를 가만히 응시한다.


“넌 잘 뛰어 오다가 넘어지고 그러냐. 사엘이도 그렇게

잘 넘어지더니만, 하여간 너네는 왜 그러는 거야.”


‘그렇지. 잔소리가 나와야 수아지.’라고 밧세는 속으로

생각한다.


“나 붙잡고 일어날 수 있겠어?” 수아가 어깨동무를 하

며 일으켜 세워준다.


수아는 “걸어라. 업어 주지는 못한다.” 라는 말도 덧붙인다.


밧세는, “그렇지, 수아가 다정할리가 없지.‘ 라고 생각

하며, 그는 수아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의지 하며 천천

히 걸음을 옮긴다. 밧세는 ‘우리 둘이 이렇게 가까이 붙

어서 걸어 본 적이 있었나.’라고 또 생각을 하며 수아의

옆모습을 쳐다본다. 수아는 오뚝한 콧날에, 쌍꺼풀이

없는 길고 큰 눈, 그리고 기품이 넘치는 얼굴이다.


밧세는 갑지가 숨이 막혀, 걸음을 멈추자 수아가 그를

쳐다보며 묻는다. “ 왜? 아파?” 그를 바라보며 말하는 수아의 입술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인다. 밧세는 한 손

을 들어 그의 입술에 손을 가져가 본다.


잊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때부터였을 거라고 밧세는

생각한다.


“밧세야. 밧세야. 밧세야 일어나 봐.”


하갈과 할머니 집사가 밧세를 일으켜 앉히고는 천천히

해독초물을 입으로 흘려 넣는다. 약초물을 받아 마시

던 그가 기침을 여러 번 하고는 눈을 뜬다.


“엄마?”


“어. 그래. 괜찮아?”


“네. 그런데?”


“매향초라는 독초를 드셨어요. “ 할머니 집사가 말하자

하갈이 말을 잇는다.


“오늘 모임 때 우리가 이 독초를 마신 거 같아. 나도 할

머니 집사가 해독초물을 주셔서 방금 깨어났어.”


“그럼? 다른 수장님들도?”


“아마 그럴 거야. 우리가 가봐야 해.”


“지금 밖으로 나가시진 못해요.” 할머니 집사의 말에

하갈과 밧세가 쳐다보자 그녀가 말을 잇는다. “밖에 연

기로 자욱해요. 냄새가 나진 않지만, 이건 필시 매향초

가 타는 연기예요.”


하갈과 밧세는 위험을 직감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엄마. 여람이네가 가까우니 거기로 먼저 가요.”


“그래. 혹시 모르니, 너도 무장 단단히 하고, 집사님은

해독초물을 좀 더 만들어 주세요. 시간이 없어요.”


칼과, 화살로 무장한 하갈과 밧세바 해독초물을 가지

고, 놀이방에 숨겨진 문을 통해 비밀 통로로 들어가 마

하살 수장집으로 향한다.


“아버지? 좀 괜찮으세요?” 여람이 마하살을 침대에

눕히며 묻는다.


“좀 쉬면 낫겠지. 요즘 좀 무리했나 보다.”


레이가 방으로 들어오며 말한다. “무슨 일 있어요?”


“모임 끝나고 오는데, 아버지께서 머리가 좀 아프다고

하셔서요.”


“그래요? 약 좀 드릴까요?”


“괜찮아요. 좀 자면 괜찮아질 거예요.”


“여람아 아버진 내가 모실게. 넌 밥은 먹었니?”


“모임 끝나고 다과를 먹었더니, 배는 고프지 않아요. ”


“그래. 그럼 너도 가서 쉬렴.”


여람은, “아버지, 그럼 쉬세요.”라고 말하고는 방을

나선다.


방으로 돌아온 여람도 오늘따라 유독 피곤하게 느껴진

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머리를 젖히자, 눈이 스르르

감긴다. ‘이불에 가서 누울걸.’ 하고 생각한다.


여러 명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꿈인가?’라고 생각하며

눈을 뜨니 리만투어이다.


‘여긴 왜 왔지? 재들은 또 무엇 때문에 저러고 있는 거

야?’


그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돌리니

사엘이 그의 옆에 앉아 있다.


그녀가 그의 팔짱을 끼며 말한다. “내 말 들었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녀는 그에게 더 바짝 다가오며 말한다.


처음이다. 사엘이 그의 팔짱을 끼는 것도, 이렇게 옆에

가까이 다가와 앉아 있는 것도.


사엘은 끼고 있던 그녀의 팔짱을 풀어, 그의 팔을 그녀

의 어깨로 가져가며 말한다. “그래도, 난 너와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좋다.”


모래사장에서 뛰던 수아와 밧세가 모닥불 가로 다가와

앉는다.


밧세는 그들을 보며, ”너넨 또 그렇게 붙어 앉아 있는 거야? 사엘이 너? 너무 너무 너무 여람이만 좋아하는

거 아니니?“ 라며 놀리듯이 말하자, 사엘은 여람이에게 더 바짝 다가 앉으며 말한다. “ 그래서 질투해?”


“질투하기는. 그래 둘이 그렇게 좋아해. 그게 낫다.

사엘이가 날 좋아한다고 해봐.” 수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장난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밧세가 그런 수아를 보며 말한다. “걱정 마. 그럴 일은

없으니까.”


“그래. 그럴 일은 없지.” 사엘이 웃으며 말한다.


사엘의 어깨에 걸쳐진 팔에 힘을 주며 그녀를 좀 더 가

까이 끌어안아 본다. 라단 대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그녀, 그리고 그를 좋아한다는 그녀, 이 모든것이 처음이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도 그를 마주

보며 이가 드러날 만큼 환하게 웃는다. 그녀의 뺨에

손을 대본다.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바닷가의 파도소리

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주변을 돌아보니, 그의 방안이고 이불위에 누워 있다. 여람은 ‘언제 누웠지?’ 라고

생각하며 옆으로 몸을 돌리니, 사엘이 그의 팔을 베고

누워 바라보고 있다. 조금 전 그녀의 뺨에 가져간 손으

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늘 바라보던 얼굴인

데, 손끝으로 만져지는 그녀의 눈, 코 입술의 감촉이 부

드럽다.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대 본다. 그녀도 기다렸

다는 듯 그의 입술에 입맙춤을 한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 하잖아.’ 라고 여람은 생각

한다.


얼굴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다시 쳐다본다. 여전히 미

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별처럼 반짝 거리

며 아름답다.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손끝이

목선을 따라 내려가며, 봉긋하게 솟은 그녀의 가슴에

닿는다. 여람은 그동안 이런 상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

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질 만큼 상상을 해 본 적은

없고, 상상이라도 그녀의 몸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손

에 느껴지는 그녀의 감촉은 손끝이 미끄러질 만큼 부

드럽다.


여람은 ‘내가 이래도 되나? 그녀는 나의 친구이고, 제사장인데, 내가 이래도 되나?’라는 마음이 들지만, 그

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돌리고 싶지 않고, 그녀의

몸을 쓰다듬는 손을 멈추고 싶지 않다. 그때, 그를 바라

보던 그녀가, 그녀의 길고 하얀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쓰

다듬더니 입맞춤을 한다. 여람은 꿈이라도 상상이라도

깨어나고 싶지 않고, 멈추고 싶지 않다. 고 생각한다.


레이는 마하살을 방에 데려다주고, 물과 약을 챙기러

부엌으로 와서, 마하살이 먹던 약을 찾아보지만 보이

지 않아, 그의 서재에 있나 해서, 그의 방으로 가, 책상

위의 서랍들을 열어 본다. 그때 책상 아래에서 덜컹덜

컹 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 레이가 깜짝 놀라 방 밖으

로 달려 나가려다가 문득 남편 마하살이 말했던 서재

책상 아래의 비밀 통로가 생각난다. 1지파, 2지파, 3지

파 수장과 자녀들만 아는 통로라 했다. 그런데 지금껏

조용하던 저 아래가 덜그럭 시끄럽다는 것은 누군가

저 아래 있다는 것이다. 전직 무사 출신에 군 통솔자였

던 그녀는 재빠르게 생각한다. 저 통로로 누군가 왔다

면 위험한 상황이라 사용했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통

로를 한번 사용해 보기 위해 왔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레이는 주변의 칼을 챙긴 후, 책상을 밀고, 나무 바닥의

나뭇결을 찬찬히 살펴본다. 분명히 문처럼 열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나뭇결로 된 마루가

눈으로는 영 찾을 수가 없다. 손으로 더듬어 보자, 딱

딱한 나무 바닥에 어느 한 곳이 말랑 말랑 하다. 손으로

눌러보니, 손이 쑥 빠지면서 고리처럼 잡힌다. 그대로

잡아당기니 위로는 당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손을 더

넣어 아래로 누르니, 책상 넓이만큼 마루 바닥이 가운

데로 갈라지며, 문이 양옆으로 열리듯 아래로 열린다.

놀라서 뒤로 주저앉다가, 곧 책상 위의 초에 불을 켜고,

칼도 챙겨서 바닥 아래로 열린 곳을 들여다보며 말한

다. “누구야?”


인기척 소리가 들린다. 레이는 재빠르게 일어나, 칼을

빼든다.


아는 이가 아니라면 칼로 당장 베어 버리려는 것이다.

남자 사람 하나가 올라온다.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묻는다. “누구야?”


“저예요. 밧세.”


“밧세?” 레이가 칼을 치우자, 뒤이어 또 한 사람이 올

라오며 말한다.


“저예요. 하갈.”


“하갈 수장님?”


“레이 님이 여기 계셔서 다행이에요. 우린 오면서도 문

이 안 열리면 어떡하나 했는데.”


“아니. 그런데 무슨 일이신데, 이 통로로 오셨어요?”


“위험한 상황이 생겼어요. 일단 나중에 말씀드리고,

지금 마하셀 수장님과 여람이는 어디 있어요?”


“수장님은 머리가 아프시다고 해서 방에 계시고, 여람

이도 자기 방으로 갔어요.”


“그럼 레이 님은 저랑 마하셀 수장님에게 가요. 밧세야

넌 이 병들고 여람이에게 가봐. 일으켜 앉혀서 조금씩

흘려 먹여. 여람이 깨어나면 다시 이리로 데려와 알았

지?”


“네 엄마.” 밧세는 병을 받아 들고 여람의 방으로 향한

다.


“가세요. 레이님.”


“네. 이쪽이에요.”


“모임 때, 매향초라는 독을 마셨어요. 저도 몰랐는데,

할머니 집사님이 알아내시고는 저에게 해독초물을 주

셔서 저는 괜찮아졌어요. 마을에 연기가 자욱한데, 매

향초가 타는 거라고 해서, 나갈 수가 없어 비밀 통로로

온 거예요.”


“매향초요? 마음에 연기라니요? 그럼 마을에도 가봐야

하지 않나요? 병사들을 부를까요?”


“지금 매향초 연기에 모두 노출됐을 거예요. 모임에 같

이 있었다면, 다른 수장님과 아이들도 독초를 마셨을

것이니, 일단 먼저 해독초물을 이들에게 주고, 다 같이

의논해 봐요.”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수장님은 머리가 아프시다고

이불 위에 눕혀 드렸는데, 그 매향초라는 독초를 마시

면 어떻게 된대요?”


하갈과 레이가 서둘러 마하살이 있는 방으로 가, 방문

을 열자, 마하살이 이불 위에 걸터앉아 허허허 웃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웃고 있다.


레이가 마하살에게 다가가 말한다. “여보? 언제 일어

나셨어요? 하갈님, 이분은 독초를 마시지 않으셨나 봐

요?”


하갈도 마하살에게 다가가며 말한다. “수장님? 마하살

수장님?”


긴 직사각형의 넓은 방에 양쪽에는 문양이 새겨진 둥

근기둥이 마주 보는 문까지 세워져 있다. 그 앞에 수장

들과 자녀들 그리고 몇 명의 사람들이 마주 보고 나란

히 서 있다. 높은 단상 위 의자에 앉아 있는 아들 여람

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의자에는 그

가 앉아 있다. 마하살은 왕이 된 아들, 그리고 그 아들

위에 앉아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내려다보니 마음이

흡족하다.


여람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

게 할 것을 명하자, 아래에 서 있는 이들이 허리를 굽힌

다.


그가 소리를 내어 웃자, 서 있던 이들도 함께 웃는다.


“수장님. 마하셀 수장님.”


‘왕의 아버지를 수장이라 부르다니?’라고 마하살은 생

각한다.


“여보? 여보.” 레이가 마하살을 흔들며 부른다.


“으으음.” 마하셀이 짧은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뜬다.


“제가 해독초물을 입에 넣어 드릴게요.”.


레이가 마하살을 부축하고, 하갈이 해독초 물을 마하

셀의 입에 조금씩 흘려 넣자, 마하살이 해독초물을 한

번 삼키고는, 크허헉 하며 기침을 한다.


“여보. 조금만 더 드세요."


조금 더 마신 마하셀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는, "아이

고 머리야."라고 말하자, 레이가 그의 등을 살살 쓸어내

리며,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라고 말한다.


잠시 후,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마하살이 하갈을 보더

니 놀라 묻는다. “아니 하갈 수장께서 여길 왜?”


“수장님, 걸으실 수 있겠어요? 일단 서재로 가면서 말

씀드릴게요. 밧세와 여람이도 곧 올 거예요.”


하갈은 서재로 가면서 마하살에게 짧은 시간 동안 벌

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밧세가 준 해독초물을 마신 여람도 환각에서 깨어나

함께 서재로 향하며, 그 에게 묻는다. “그러니까, 우리

모임에 있던 모두가 지금 독초를 마셨다는 거지?”


“그럴 거야.”


“그런데, 그 독초가 사람을 죽게 하는 건 아니고 환각

을 일으켜?”


“응. 지금 마을은 매항차 연기로 가득 하대. 그래서 사

람들이 환각 상태에 있을 거야. 죽진 않겠지만 그래도

빨리 마을로 가서 사람들도 구해야 해.”


여람과 밧세가 서둘러 앞장서서 서재로 향한다.


“밧세야. 여람아”


서재로 들어오자 먼저 와 있던 하갈이 그 둘의 이름을

부른다.


“여람아? 괜찮니?” 레이가 묻자, 여람은, “네. 엄마.“

라고 말하고는 마하살을 보며 묻는다. “아버지는요?”


“나도 괜찮다. 하갈 수장님 아니었으면, 못 깨어날 뻔

했어.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비밀 통로를 통해, 라함 수장님 댁으로 가요.” 라고

하갈이 말한다.


여람이 말한다. “사엘은요? 사엘에게도 가봐야 해요.”


마하살이 말한다. “그런데 제사장님 댁은 위치가 바뀌

어 길을 알 수가 없다고 라함 수장님이 그러시지 않았

으냐.“


하갈이 말한다. “네. 그래서 먼저 라함 수장님 댁으로

가요. 그리고 뭔가 서둘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러고 나서 다 같이 제사장님 댁 비밀 통로 문을 찾아봐요.”


하갈은 혹시 수아가 왕으로 부름 받은 일로 이 모든 일

들이 벌어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짐작한다.


그때 레이가 여러 무기들을 가져와서 말한다. “집에 있

는대로 가져왔어요. 혹시 모르니 다들 든든히 챙기세

요.”


모두들 무장을 하고 비밀 통로로 들어가, 라함 수장 집

으로 서둘러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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