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을 한 여람, 밧세, 하갈, 마하살 그리고 레이는 비
밀 통로를 통해 해독초 물을 가지고 라함의 집으로 향
한다. 이들에게 비밀통로는 평소에 익숙해질 만큼 다
니던 길이었지만, 다들 매향초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아프고, 마음까지 불안하고 조급해져, 좁고 미로처럼
여기저기 복잡하게 난 길에서 벽에 붙은 길잡이 돌도
쉽게 찾아지지 않고, 통로도 더욱 어둡게 느껴진다.
앞서서 걷던 하갈이 말한다. “거의 다 온 거 같아요.”
조금 더 걷자, 라함의 서재와 연결된 문이 보인다.
하갈이 마하셀을 보며 말하다. “마하셀 수장님. 여기
어디쯤 문 여는 손잡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어요.”
마하셀이 하갈 앞 쪽으로 걸어가 벽을 더듬거리더니
벽에 붙은 나무로 된 손잡이를 발견한다. “찾았어요.
이거예요. 제가 잡아당길게요.”
“잠시만요.”
레이가 여람과 밧세를 그녀의 뒤로 보내고는 칼을 뽑
아 들며 말을 잇는다. “밖에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으
니, 당신이 문을 열고, 제가 문 앞에 설게요. 그럼 하나
둘셋에 문고리를 잡아당기시는 거예요. 준비하세요.”
한때 병사를 통솔하던 지휘관답게 레이는 이 상황에서
이들을 지휘하며 칼을 뽑아 들고 문 앞에 서고, 모두들
레이의 지시대로 선다.
“하나, 둘, 셋.” 레이가 말하자, 마하살이 문고리를 잡아
당기니 문이 열린다. 주변이 조용하다. 레이가 먼저 문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피니, 라함이 의자에 앉아 창가
를 응시하고 있다. 하갈, 마하셀, 여람과 밧세도 문 밖
으로 나와 그를 보며, 역시나 그도 매향초를 먹고, 환각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갈이 라함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흔들며 말한다.
“수장님. 라함 수장님. 나는 라함 수장님께 해독초를 드릴 테니, 너네들은 수아를 찾아봐.”
레이가 밧세와 여람을 따라 나서며 말한다. “저는 레첼
님을 모셔 올게요.”
이들이 나가자, 마하셀과 하갈이 라함의 입에 해독초
물을 흘려 넣자, 그는 두어 번 기침을 하고, 눈을 여러
번 깜박거리더니, 이들이 보이자 놀라 묻는다. “수장
님들?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괜찮으세요? 이것 좀 더 드세요.” 하갈이 해독초물이
담긴 병을 건네며 말한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리고 무슨 일로 여기에?”
“우리 모두 매향초라는 독초를 먹은 거 같다고 할머니 집사가 그러셨어요. 집사님께서 해독초를 만들어 저를
주셨고, 그 다음에 밧세, 그리고 우리 둘이 여람과 마하
살 수장님을 찾아갔고, 지금 다 같이 여기로 왔어요.”
라함이 놀라, “독초요? 그런게 있단 말입니까?" 하더니
열려 있는 비밀 통로 문도 보이자, "그리고? 왜 비밀 통
로로?” 라고 묻는다.
마하살이 말한다. “지금 마을에는 매향초 연기로 가득
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이 길로
온 것이구요.”
“매향초 연기요? 마을 전체에? 병사들은요? 마을사람
들은요? 가봐야겠어요. 아. 수아는요? 수아에게 먼저
가봐야겠어요. 방으로 간다고 하고 갔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라함을 하갈이 자리에 앉히며
말한다. “매향초 연기가 마을에 가득하다면 필시 마을
사람들도 환각 상태에 있을 거예요. 그리고 레이 님과 애들이 수아를 데리러 갔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
금은 누가, 어디서, 어떻게 이 일들을 만들어 냈는지 알
수 없으니, 다들 모이면 의논해 봐요. 제사장님은 어떠
신지 모르니, 그곳으로도 빨리 가봐야 해요.”
하갈의 말에 라함이 얼굴이 일그러지며, 오늘 하루를
되짚어 보며 곰곰이 생각한다. 환각을 일으키는 독초
그래서 아비갈과 함께 산속에 있었던 환각 속에 있었
던 것이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누가 했는지 짐작이 간다. 다른 날과 다른 다과상, 그
리고 모임에 있던 이들이 독초를 마셨다. 마을은 매향
초 연기로 가득하다. 오늘 모임에 오지 않은 한 사람,
그리고 환각을 일으키는 처음 들어보는 독초, 이것은
약초에 대해 잘 아는 자의 짓이다. 그렇다면 사울진이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무모한 짓을
그것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환각을 일으키는 독초를
먹이고, 온 마을에 연기를 피웠단 말인가.
여람과 밧세가 수아의 방문을 열자, 바닥에 쓰러져 있
는 수아가 보인다. 밧세는 수아를 부르며, 달려가 그를
일으켜 안고, 여람은 해독초 물을 그의 입으로 흘려 넣
어 주려 하지만, 수아가 거부 하는듯 발버둥을 친다.
밧세가 수아의 양팔을 잡으며 말한다. “수아야. 수아
야. 나야 밧세. 괜찮아. 괜찮아. 먼저 이것 부터 마셔.”
밧세의 목소리에 수아가 안심을 한 듯, 해독초물을 마
신다.
"좀 더 마셔. 괜찮아 질거야.“ 여람이 말하자, 수아는 해
독초을 더 마시고, 이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은 허공을 향해 있고, 팔을 휘저으며 무언가를 찾는
듯이 보이며, 입은 움직이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수아야. 나야. 나 여기 있어. 보여?” 밧세의 말에 수아
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손으로 목을 감싸며 고개
를 세차게 흔든다. 밧세와 여람이 놀라 서로 바라본다.
잠시후, 여람이 마음을 가다듬고, 수아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수아야. 나야 여람이. 우리가 왔으니까, 걱정
하지 마. 지금 내 말이 들리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어
봐.”
여람의 말에 수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잘했어. 그럼 우리가 보여? 보이면 고개를 위아래로.
안 보이면 좌, 우로 흔들어 봐 봐.”
수아가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든다.
밧세는 그런 수아의 모습에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하여 그의 손으로 입을 막는다. 여기서 소리를 지른다
면, 수아를 더 불안하게 만들 것 같아서이다.
여람도 놀랐지만, 애써 침착하게 수아에게 묻는다.
“말은 할 수 있어?”
여람의 말에, 수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밧세는 수아를 끌어안으며 말한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가 왔잖아. 라함 수장님 서재로 가자. 그 곳에 다
계서. 분명히 널 낫게 해줄 방법을 알고 계실 거야.”
수아가 밧세를 쳐다보는 듯 하지만 여전히 허공을 향
한 눈이다.
밧세와 여람이 수아를 일으켜 세우며 말한다. “서둘러
가자. 시간이 없어.”
밧세와 여람은 양쪽에서 수아를 부축하며 라함의 서재
로 걸으며, 잠시 동안 있었던 일을 수아에게 설명한다.
라함의 서재로 가니, 레이가 레첼을 데려 왔고, 라함도
정신이 들어 있다.
부축을 받고 들어 오는 수아를 보자 라함이 달려가 그
를 안으며 묻는다. “수아야. 괜찮으냐?”
“저기 수장님.” 여람이 무거운 어조로 라함을 부른다.
“수아는 해독초을 안 마신 것이냐? 아직 정신이 안 돌
아왔어?”
“그게. 아니라. 수아는 눈이 안 보이고, 말을 못 하는 것
같아요.”
“뭐라고? 눈이 안 보여? 수아야? 나다. 아버지.” 라함이
수아의 얼굴을 그의 손으로 감싼다.
수아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눈은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다. 레첼도 수아에게 다가가, 그
를 끌어안으며 말한다. “수아야. 엄마야. 엄마. 이게 어
찌 된 일이야? 여보. 어떻게 좀 해봐요.”
라함이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아들의 상태에 괴
로운 듯 신음한다.
하갈이 라함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수장님.
우리 여기서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제사장님께 가요.
수아의 상태를 도울 방법을 알고 계실 거예요.”
“포도입니다.” 라함이 말하자, 다들 그의 말에 놀란 얼
굴이다.
“경전의 신에게 부름 받은 자는 포도를 먹지 마라. 그
래서 제사장 집안은 포도를 먹지 않습니다.”
하갈이 무언가 눈치챈 듯 말하다. “그럼 수아도?”
“그래서, 얼마 전부터 집안에 포도가 들어간 음식을 모
두 없애고 금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이것을 알고, 수
아에게 포도를 먹인 것입니다.”
마하살이 더 놀란 얼굴로 말한다. “그렇다면?”
“네. 수아가 경전의 신에게 왕으로 지명받았어요. 그래
서, 누군가 수아에게는 매향초 대신 포도를 먹인 거예
요. 경전의 신에게 부름 받은 자가 포도를 먹으면, 죽거
나 몸이 찢어지거나, 눈이 멀거나, 일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이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어요.”
라함의 말에 수아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괴롭고 답
답한 듯 손으로 가슴을 친다.
밧세가 수아의 팔을 잡으며 말한다. “수아야. 그만해.
다쳐. 다 괜찮아질 거야. 제사장님께 빨리 가자."
여람과 밧세는 양쪽에서 수아를 부축하며 일어난다.
하갈은 수아의 상태로 정신이 나간 레첼을 부축해 준
다. 마하살도 이 모든 상황과, 왕으로 부름 받은 자의
이야기 모두 놀랍지만, 마음을 차분하게 갖고, 라함을
일으켜 세워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온 레이가 서재로 들어오며 말
한다. “밖에서 사람들 오는 소리가 들려요. 지금 밖은
매향초 연기로 가득하다고 하는데, 누가 오는 걸까요?
한두 명 소리는 아니에요.”
레이의 말에 라함이 숨을 크게 내쉬고는 말한다.
“올 것이 온 거 같습니다.”
“네?”
“오늘 이 모든 일을 꾸민 자가 오는 것이겠지요?” 라함
이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자 그가 말을 잇는다. “모두들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세요.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짐작은 가지만, 어떤 자가 이 일들을 꾸몄는지 알아내
고, 이곳을 지킬 테니, 여러분들은 서둘러 여길 나가세
요. 우리가 해독초 물을 마시고,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아
직은 모를 거예요.”
하갈이 말한다. “수장님 같이 가셔야지요. 여기 혼자
계시면 위험해요.”
“수장님. 수아를 부탁합니다. 이 아이를 지켜 주세요.”
수아가 부축하고 있는 여람과 밧세의 손을 뿌리치며,
라함을 잡으려, 팔을 허공에 대고 휘젓는다.
라함이 그런 수아의 팔을 잡으며 말한다. “수아야.”
수아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수아야.
넌 1지파 수장, 라함의 아들이다. 그리고, 경전의 신에
게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야. 경전의 신이 너를 왕이
란 자로 부르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너는 말했
고, 모두 다 함께, 해 나갈 것이라 했다. 그렇지?”
수아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그래. 아들아. 그러니, 네가 말한 대로 이들과 함께 하
거라. 그리고 제사장님께서 너의 눈도, 목소리도 고칠
방법을 알고 계실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이분들
과 함께 어서 제사장님께 가.”
라함의 말에 수아가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다시 흔들
자, 라함이 수아의 팔을 더욱 세게 잡으며 단호히 말한
다. “넌 할 수 있어. 아니해야만 한다. 나는 너를 믿는
다. 그리고 나도 믿거라. 나는 여기 이 자리에 남아, 나
의 자리와, 지파를 지켜 낼 것이야.”
레첼도 수아의 손을 잡고,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
한다. “수아야. 엄마가 네 아버지와 함께 여기 있을테
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 빨리 제사장님께 가서 고쳐 달라 해.”
수아가 보이지는 않지만, 그를 잡은 팔을 잡아당겨,
레첼과 라함을 끌어안는다.
셋이 부둥켜안고 흐느낀다.
레이가 말한다. “서두르세요. 소리가 더 가까워지고 있
어요.”
라함이 안고 있는 수아를 놓으며 말한다. “어서 가거라
당신도 수아와 같이 가요. 아이를 돌봐줘야 하지 않습
니까.”
레첼은 수아가 걱정 되지만, 라함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해, “스무 살이 넘은 애가 뭐가 아이라고 돌봐 줍
니까. 여기 친구들도 있고, 수장님들도 계시고, 이제 제
사장님도 만나면, 수아는 괜찮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
은요? 나라도 같이 있어야지요. 그러니 우리 같이 해
요. 나도 이 자리를 지키고, 지파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에요.” 라고 애써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하고는, 목에 걸은 여자 형상이 새겨진 목걸이를 수아의 목에 걸어주고, 그의 손을 한번 더 꼭 잡으며 말한다.
“하라셀 님이 새겨진 목걸이야. 엄마가 너의 아버지와
혼인하고 받은 것이다. 늘 몸에 지니고 다닌 것이야. 엄
마가 너와 늘 함께 있고, 널 위해 기도 할 거야.“
레첼은 수아의 손을 밧세와 여람에게 쥐어 주며 말한
다. “부탁해.”
여람과 밧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아의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며 그를 부축한다.
라함이 말한다. “다들 고맙습니다. 그동안 함께 해서도
고마웠습니다. 이길 끝에 세 갈래 길에서 가운데 길로
가시면, 템말산과 연결된 곳이 나와요. 제사장님 댁까
지의 길도 꼭 찾아서 그분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세
요.”
라함은 그의 목숨보다, 이들의 안전과 목숨을 더 생각
하며, 그가 수장으로서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한번 설
명해 준다. 그리고는 책 선반에 꽂혀 있는 낡은 책을 하
나 집어 들어 마하살에게 건네며 말한다. “무기제조와
병사 훈련에 관한 내용들이 적혀 있는 책이에요.”
마하살이 책을 받아 들자, 라함이 서 있는 이들을 밀며
말한다. “이제, 어서 가세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라함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하갈은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애써 씩씩하게 말한다.
“곧 봐요. 수장님.”
수아의 눈에도 눈물이 흐른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
며, 가지 않으려고 저항하지만, 밧세와 여람이 그를 억
지로 끌고 비밀 통로로 들어간다. 레첼과 라함이 수아
의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는 모든 이들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문을 닫는다.
그들이 가고, 라함은 하라셀 선조의 찻잔을 꺼내, 그의
책상에 올려놓고는, 찻장을 잡아당겨, 찻잔을 모두 바
닥에 떨어트려 깨 부수고, 선반에 놓인 책들도 모두 바
닥에 내동댕이 치고는, 책에 양초병에 담긴 기름을 붓
고 불을 붙인다. 비밀 통로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서이
다.
책이 타들어 가는 앞 책상에 라함과 레첼이 앉는다. 무
장한 병사가 들이닥치고, 불길을 보자 황급히 끈다. 그
뒤로 사울진이 들어오자, 한 병사가 달려와 그에게 말
한다. “샅샅이 찾아봤지만, 수아는 보이지 않습니다.”
병사의 말에 사울진의 얼굴이 일 그러 진다. 라함이 그
런 그를 보며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 않은 얼굴로 침
착하게 말한다. “내 집까지 온 손님 차라도 한잔 주고
싶은데, 보시다시피, 찻잔이 다 깨져서.”
“뭐야? 매향초를 마셨을 텐데?”
“그래서, 여길 이렇게 다 때려 부수었나 보지. 깨어나
보니 서재가 이렇게 되어 있었어. 그런데 여긴 왜 왔는
가?”
“수아는 어디 있지?”
“내 아들을 사울진 자네가 왜 찾지? 그 애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어?”
사울진이 웃날에게 말한다. “병사들에게 주변을 더 샅
샅이 뒤지라고 해. 그리고 집안에 비밀창고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문, 마루 바닥, 벽 할거 없이 확인해.
반드시 찾아야 한다.”
라함은 사울진을 응시하며 말한다. “사울진. 자네 왜
이러는 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러는 것이지?”
“지금 여기서, 나에게 명분을 묻는 것인가? 내가 이 모
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을 안다면, 목숨부터 먼저 구해
야지.”
“목숨? 목숨 중하지. 그런데 명분이라는 것이 목숨까
지도 걸고 하는 것이니, 여기서 내 목숨을 구하나, 자네
의 명분을 듣나 별반 다르지 않지 아니한가?”
라함의 말에 사울진이 껄껄 소리를 내며 웃고는 말을
잇는다. “대대로 내려오는 명망 있는 지파의 수장님답
습니다. 명분을 목숨처럼 내 세우시며, 끝까지 고귀함
과 품위를 잃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
의 그런 모습이 역겨워. 처음부터 모든 걸 가지고 있었
으니, 무엇 하나 잃어 본 적도, 없어 본 적도 없는 자의
어리석음과 교만으로 밖에 보이지 않거든.”
“내가 다 가졌다? 잃어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이 태어난 자는 그마저 갖고 있
는 것도 빼앗기고 짓밟히지. 그래도 살아 보려고 하지
만, 늘 그 자리야. 나아지는 것이 없어. 언제나 천대받
고, 언제나 부족하지. 그런데 당신을 보게. 처음부터 가
진 이 모든 것을. 그러니 세상 밖이 어떤지 모른 채, 명
분이라는 말이나 지껄이는 거야. 명분? 당신이 말하는
그 명분은 무엇인가? 더 잘 사는 것? 더 많이 가지는 것? 아니 그보다는 지금까지 가지고 누린 것들을 지켜 내
는 것 고작 그것이겠지.”
“그래서 자네도 가져 보려고 이러는 것인가?”
“왜?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
“방법이 잘 못 되지 않았을까?”
“방법? 내 방법은 잘못 됐고, 당신의 방법은 옳아?”
“내 방법이라니?”
“모든 지파가 함께 한다 하면서 지파를 하나로 만든
다음, 제사장과 한 뜻이 되어,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그 위에 앉아, 더 많은 권력과 힘을 가지려 하는 것 말
이야. 왜? 당신이 제사장의 힘까지 빌려, 경전의 신의
부름까지 앞세워 가며 가지려 하는 방법은 맞고, 내가
고작 매향초나 써서, 가져보려 하는 방법은 잘못됐는
가?”
“사울진. 자네가 잘못 알고 있네. 경전의 신의 부름은
나도, 수아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야. 그리고 왕이 있
다 하더라도 다 같이 함께 해 나가려고 하고 있었네.”
“함께? 그래 함께 할 것 이라면서, 왜 비밀을 만들었던
거지? 함께라는 것에 나는 없었던 것 아닌가? 그러니
나를 늘 경계하고, 배제했던 것이지. 아닌가?”
“자네를 배제하지 않았어. 이 일은 수아, 나, 그리고 제
사장만 알고 있었네. 우리도 놀란 건 사실이야. 그래서
좀 기다리고 있었던 거네.”
“기다려? 뭘? 너희들끼리 함께 하는 것?”
“너희가 아니라 우리지.”
“우리? 함께? 처음부터 함께라는 것은 없었어. 여전히
권력과 힘이 있어서 이끄는 자, 그리고 그저 따라가는
자. 그마저도 따라가지 않으면 배척당하고, 소외당하
고. 그렇게 불평등한 속에서 누구를 위해 함께 하는 것
이지?”
“그래서, 사울진 자네는 모두가 동등한 세상을 만들고,
함께 하려고 이러는 것인가? 그런 거라면, 우리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네.”
“아니. 나는 가진 자들의 위에 서서 그 가진 자들을 다
스리는 더 높은 자가 될 거야. 나 스스로가 그렇게 될
것이야. 경전의 신의 부름도 필요 없고, 대대로 내려오
는 가문 따위도 필요 없이, 나 스스로 가질 것이다.”
그때, 웃날이 서재로 들어오며 말한다. “아무리 찾아봐
도, 없습니다.”
“이 자를 데리고 가. 라함. 이제부터 그렇게 살아보거
라. 말은 하나, 목소리가 없는,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
는, 손이 움직이지 않으면, 물 한 모금도 얻어 낼 수 없
는, 그 마저도 얻을 수 없고, 자네가 누구 인지도 알 수
없는, 가장 낮고, 가장 없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널 데
려다 주지.”
“자네 눈엔, 쉽게 가진 듯 해 보이나, 지켜 낸다는 것도
쉽진 않아. 사울진 자네도 알게 될 것이다. 가지는 것
보다 지켜 내는 것이 얼마나 더 힘든 일인지. 차라리 가
지지 않고, 그래서 지켜낼 것도 없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할게 될 것이야. 그리고, 자네가 아무리 가져도,
역사는 갖지 못할 걸세. 지파와 함께라는 것도 얻지 못
할 거야. 언제나 그렇듯, 혼자서 고독하게, 쓸쓸하게,
뭐든 가져 보려고 아등바등 살겠지만, 그렇게 가진 것
들은 결국 자네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걸세.”
라함의 말에 사울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말한다. “끌
고 가.”
“자네의 목적이 나, 1지파, 그리고 수아라면, 마을에 있
는 매향초 연기는 거두게. 이 싸움에 마을 사람들이 해
를 입어선 안되지 않는가. 그리고 다른 지파와 수장들
도 해하지 말게.”
라함은 1지파 수장답게, 끝까지 지파와 마을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사울진이 라함의 말과 행동에 기분
이 더욱 언짢아져 얼굴이 일그러지며 소리친다. “당장
끌고 가라고”
병사들이 라함과 레첼을 끌고 나가고 미처 끄지 못한
불길이 번져, 서재 안이 불길로 휩싸인다.
비밀 통로 안에 있던 이들이, 라함과 사울진의 말을 모
두 듣고, 그들이 잡혀 가는 소리에 수아가 눈물을 쏟아
내고, 몸부림을 치며 통로 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밧세
와 여람이 이를 막는다.
하갈이 말한다. “서둘러, 제사장님 댁으로 가요. 사울
진이 먼저 도착하기 전에 가야 해요.”
사엘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하갈이 가던 길을 멈추고
말한다.
“밧세야. 너는 여람이랑 여기서 수아랑 있어. 우리가 한 시간 정도 지나도 오지 않으면, 너네들은 이 통로를
나가서 일단 템말산으로 피해 있어.“
밧세가 말한다. “엄마. 같이 가요.”
레이가 말한다. “하갈 수장님 말씀이 맞아. 수아가 같
이 가는 것도 무리고, 우리가 가서 제사장님도 꼭 모시
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밧세와 수아, 여람을 남기고, 하갈, 마하셀, 레이가 길
잡이 돌을 찾아, 벽을 더듬으며, 사엘집으로 향한다. 신
전의 위치가 바뀌어 그곳으로 향하는 길과 문을 잘 찾
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지만, 잘 찾을 수 있기를 바라
며, 길을 나선다. 어두운 통로만큼 앞으로 이들에게 일
어날 일들도 짙고 깊은 어둠으로 뒤덮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