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야는 모두 떠난 것을 확인하고 신전으로 들어온다.
모임 후, 늘 그렇듯 사엘은 제단 앞에 앉아 있고, 사환
들과 하인들이 뒷정리를 하고 있다.
카야가 사엘 옆에 앉으며 말한다. “수장님들은 모두
가셨습니다.”
“사울진 수장님 댁 좀 다녀와.”
“지금 말씀입니까?”
“라단이 혼자 보낸 것이 마음에 걸려, 혹시 도움이 필
요할 수도 있으니, 카야가 가서 살펴봐줘.”
“그럼 최측근 무사들을 보내겠습니다.”
“라단에게 필요한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가봐. 그리
고 사울진 수장님도, 무사들이 가면 뭔가 확인하러 온
기분이 들 수도 있잖아. 몸이 안 좋으시다고 해서 걱정
해서 가보는 건데. 카야 올 때까지 난 신전 안에서 문
닫고 좀 더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카야는 사엘을 홀로 남겨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
지만, 또 금방 돌아오며 되고, 사울진도 그가 가서 안
부를 묻는 것이 좋다는 사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
도 든다.
“그럼, 신전에 계시지 말고, 방으로 가셔서 좀 쉬고 계
시는 게 어떠세요? 제사장님도 피곤해 보이세요.”
“나는 오늘 회의한 것들을 좀 정리해야 하고, 생각해
야 할 것도 좀 있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다녀와.”
카야는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일어나며 말한다.
“그럼 서둘러 다녀오겠습니다.”
사엘이 카야를 한번 쳐다보고는 제단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카야가 신전을 나오자, 문이 닫힌다. 카야는 마
당으로 나와 정예무사들에게, 잠시 다녀 올 곳이 있고,
제사장이 신전 안에 있다는 수 신호를 보내고는 병사
세명과 함께 말을 몰아 사울진 집을 향해 달려간다.
5지파를 향해 달려가던 중, 멀리 마을 쪽에 연기인지,
안개인지 뿌옇게 보인다.
카야가 달리던 말을 잠시 멈추고 같이 온 병사들에게
손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저기 뿌연 것이 보이는가?”
“네?”
“저기 말이야?”
“네 보입니다. 이 밤에 안개가 낀 것입니까?”
잠시 바라보던 카야는, “불이 난 것이라면 불꽃이 보여야 할 텐데, 불꽃 없이 저리 자욱하다니. 밤안개 치고는
너무 뿌예. 아무래도 연기만 피운 것 같은데.“ 라고 말하고는 무언가 직감했는지, 말을 돌리며 말한다. “집으
로 돌아가야겠다. 다들 얼굴에 두건을 둘러.”
이들은 몸에 늘 지니고 다니는 두건을 꺼내 얼굴을 감
싸고는, 서둘러 말을 몰아 집으로 향한다. 제사장 집
주변에는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 카야는 다행이다 라
고 생각하며, 신전으로 향한다. 신전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카야가 마당에 나가자, 정예무사들이 카야에게 온다.
“신전 주변은?”
“별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제사장님도 아직 신전에서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제사장님은 아직 신전 안에 계신 거군. 주변 경
계를 강화해.”
“알겠습니다.”
정예무사들이 자리로 돌야 가고, 카야는 신전 건물 안
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향해 서서는 조용히 경전의 신
에게 기도 한다. “경전의 신이여, 이 아이를 지켜 주세
요.”
그때, 카야의 최측근 무사가 달려와 말한다. “온 마을
에 연기가 자욱합니다. “
“온 마을?”
“네. 온 지파 마을에 연기가 가득합니다.”
“수장님들은?”
“모임 후, 집으로 가신 것까지만 확인하고 그 뒤로는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연기가 너무 자욱해 마을 안으
로 접근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연기란 말인가? “
“알아보고 있지만, 아직은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곳은 마을과 떨어져 있어 연기에 휩싸이지 않은 거
같습니다. 게다가.”
“게다가?”
“연기가 나는 것은 보이는데, 냄새는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괴이한 행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괴이한 행동?”
“어떤 이들은 웃고, 어떤 이들은 울고, 어떤 이들은 소
리를 지르고, 어떤 이들은 죽은 듯이 누워 있고, 말로
설명하지 못할 만큼 다양한 행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병사들을 모두 무장하고 집합시켜. 그리고 혹시 모르
니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을 주변들을 계속 살펴봐. 이 연기가 어디서
누구에 의해 생긴 것인지 신속히 알아내야 해.”
“네.”
최측근 무사가 떠나고, 카야는 신전 앞에 서서 곰곰이
이 모든 상황들을 생각한다. 신전 안에 있는 사엘이 이
문을 열고 나와야 모든 것을 알리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신전 안에 있는 사엘도 어
떤지 알 수가 없다. 이상하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가는 모든 상황들이 불안하다.
제단 앞에 앉은 사엘은 오늘따라 머리가 깨질 듯이 아
프다. 카야도 올 시간이 됐는지, 아니면 지났는지 알 수
가 없다. 카야 말대로, 방에 가서 쉬고 있을걸 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어, 밖에 카야가 왔는지,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있으면, 방에 데려다 달라 할 참으로 신전 문
을 열렸는데, 열리지가 않는다. 여러 번 해 보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걸어가서 손으로 문을 열 생각으로 제
단 앞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사엘은 그대
로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잠시 후, 눈을 떠보니, 방안이다.
‘내가 언제 방으로 왔지?’라고 생각하는데, 여자 목소
리가 들린다.
“사엘아 일어났어?”
‘누구지?’ 하디도 아니고 유모의 목소리도 아닌 목소
리가 사엘은 낯설지만, 또 그렇게 낯설게만 들리지만
은 않다.
“또 리만투어에 가서는, 바다에 빠지고, 기절하고 엄마
가 걱정했잖아.”
‘리만투어? 내가 빠졌다고? 기절을 해? 그리고 누구라
고?’
“라단아. 사엘이 눈 떴어. 이젠 걱정 안 해도 돼.”
‘라단이? 라단이 도 여기 있다고?’
엄마 하란과 라단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엄마?” 사엘이 목소리를 내어 그녀를 불러 본다.
“그래. 엄마야. 괜찮아?”
“엄마.”
“응. 그래. 어디 불편해?”
“엄마. 엄마가 여기 어떻게?”
“어머 얘 좀 봐. 어떻게 라니. 사엘아 너 괜찮아?”
“사엘아. 나야 라단이. 보여?” 걱정스러운 얼굴의 라단
도 보인다.
“무리해서 일어나지 말고 조금 더 자. 그러면 괜찮아질
거야.”
‘일어나야 해. 일어나서 문을 열고 여길 나가야 해.’라
고 사엘은 생각하지만, 하란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
게 쓰다듬어 주자, 그녀는 포근하고 편안해 눈이 스르
르 감긴다.
다시 눈을 떠보니, 리만투어 바닷가이다.
“사엘아.” 멀리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다.
“여기 앉아만 있을 실 거예요?”
“어?”
카야가 그녀의 손을 잡고 해안가로 달린다. 시원한 바
닷바람이 얼굴에 닿는다. 사엘이 고개를 돌려 카야의
얼굴을 보니, 그가 환하게 웃고 있다. 사엘이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카야의 이가 드러날 만큼, 눈도 반달
모양이 될 만큼, 눈가에 주름이 질 만큼 밝은 얼굴이다.
하란이 밀려오는 파도에 발을 담그고, 첨벙 거리며 말
한다.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내가 이렇게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네가 뱃속에서 움직이고 그랬는
데.”
카야가 엄마 옆으로 가 바다에 발을 담그며 말한다.
“뱃속에 있던 아기가 지금은 저렇게 크셨어요.”
엄마와 카야가 웃으며 서로 물장난을 한다. 햇살에 반
짝이는 바다에 반사된 엄마의 얼굴이 환하다. 그리고
카야가 신발을 벗고,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도
처음 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래를 돌리자, 어느덧 어두운 밤
이다. 라단이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뒤적이고 있다.
“나는 너와 늘 함께 하기로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
“어?”
“그러니 넌 네가 해야 하는 걸 해. 나는 그런 너의 곁에
늘 이렇게 있을 테니까.”
라단의 눈 속에 그녀가 보인다.
‘이상하다. 이 말 언젠가 들었던 말인데, 그런데 왜 또?
라고 생각하는데, 라단이 그녀를 안으며 말한다. “이
제, 우리가 친구인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응?”
“내일부터 넌 내 부인이니까.”
사엘은 안고 있는 그를 밀며 말한다. “부인?”
“왜? 싫어? 그럼 혼인하고도 사엘아 그래? 부인. 부인
이렇게 불러야지.”.
라단이 웃으며 그녀를 다시 안는다. ‘혼인? 라단의 부
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뺨에 솔솔 부는 바람이 느껴진
다. 멀리 수양 버들이 바람에 산들 거리는 것도 보인다.
그 사이로 하란이 걸어온다.
“엄마?”
사엘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잡는다.
포근하고 보드라운 엄마 손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진
다. 수양버들 사이를 함께 걸어가자, 카야와 라단이 손
짓을 하며, 환한 미소로 반기는 것이 보인다. 웃음소리
가 귓가에 메아리처럼 들린다.
이제는 정말 깨어나고 싶지 않은 행복한 꿈이라고
사엘은 생각한다.
얼마가 지났을까, 라단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허겁지
겁 신전 건물 안으로 달려오며 소리친다. “사엘이는?”
그는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허리를
구부리고는 가쁘게 숨을 몰아 쉰다.
신전 문 앞에 서있던 카야가 라단을 보며 놀라 묻는다.
“라단 님. 무슨 일이세요? 사울진 수장님께 무슨 일이
라도 생기셨어요?”
카야는 몸이 좋지 않아 모임에 오지 않은 사울진의 안
부를 묻는 것이다.
숨이 좀 고르게 쉬어 지자, 라단은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며 말한다. “사엘은? 사엘은 어디 있어? 아직도 신전
안에 있는 거야?”
“네.”
“신전 안으로 들어가야 해.”
“네?”
“매향초를 마셨어. 지금 환각 상태에 있을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버지야. 이 모든 것이 아버지가 하신 일이야. 수아
가 왕으로 지명받은 것을 아시고는 마을에 있는 연기
도, 사람들이 모두 매향초 연기 때문에 환각 상태에 있
는 것도 모두 다. 오늘 모임에서 다과상에 매향초를 넣
으셨대. 모임에 있던 수장님들도 모두 지금 환각 상태
에 있으실 거야. 지금 아버지는 라함 수장님 댁으로 가
셨어. 그다음엔 이곳으로 오시겠지.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사엘을, 사엘을 환각상태에서 깨워야 돼. 여기 해
독초도 가져왔어.”
라단은 마음이 급한지 두서없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
고는 신전 문을 두드리고,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문을
열려고 하지만, 열리지 않는다.
“문이 왜 이리 안 열려? 안에서 잠긴 거야? 열쇠는? 열
쇠는 있어?”.
라단의 말을 모두 들은 카야는, 오늘 무엇인가 직감적
으로 이상하게 돌아가던 하루가, 이제는 알았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는다.
“카야,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문부터 빨리 열
어봐.”
카야는 문을 두드리는 라단의 팔목을 그만하라는 듯
잡으며 말한다. “이 문은 제사장님이 열고 닫으시는
문이에요.”
“뭐?”
“제사장님이 열어 주시지 않으면 열 수가 없어요. 제사
장님 주변에, 왕으로 지명받은 이를 아는 자가 있었던
거예요.”
“사환 중 하나일 거야. 그래 오늘 새로운 다과상을 내
왔던 그 자야.”
카야가 이마에 손을 얹으며 깊은 한숨을 내 쉰다. 지난
번, 사엘이 수아와 라함 수장만 따로 만나던 때, 신전
근처에 있던 그 사환이다. 오늘 그 사환이 다과상도 준
비했었다. 사환들을 경계하며 지켜봐 왔는데, 오늘 일
어날 일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한 것
이다.
카야는 여러 번 숨을 고르게 쉬며, 침착하게, 생각해 내
야 한다고 되뇐다.
“여기 말고 다른 문은 없어?”
“언젠가, 혹시 일어날 일을 위하여 생각해 본 것이 있
긴 합니다.”
라단이 다시 다급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게 뭔데? 뭐
라도 괜찮으니 말해봐.”
“이곳 신전은 사방이 막혀 있고, 이 문 하나만 있습니
다. 그런데, 신전 지붕 위에 작은 창문이 하나 나 있어
요. 그 아래가 제단이고. 사엘 님은 늘 그 창문 아래에
서 계세요.”
“그래서?”
“창문을 부수어서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워
낙 작은 창문이라. ”
“그래도 일단 그거 라도 부시고, 어떻게든 들어가보는
게 어때?”
그렇게 서로 말했지만, 머릿속에 여러 걱정과 고민들
이 스친다. 창문을 깨는 것도 그렇고, 그 좁은 창문을
비집고 들어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또한 뛰어내릴
만한 높이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 아래 사엘이 앉아 있
다면 깨지며 떨어지는 유리 조각에 다칠 수도 있다.
카야가 입을 연다. “ 리만투어 바닷물도 같이 써 보면
어떨까요? 예전에도 심장이 아프실 때마다 리만투어
에 다녀오시면 괜찮으셨으니, 어쩌면 그 물이 사엘 님
의 정신을 돌아오게 할지도 몰라요. “
“그래? 그럼 해보자. 지금은 뭐든 해 봐야해.“
둘은 서둘러 지붕 위로 올라가고, 카야는 무사들을 시
켜 리만투어로 가 바닷물을 떠 오라 지시한다.
잠시 후, 무사들이 항아리에, 리만투어 바닷물을 담아
지붕 위를 달려온다. 물 항아리를 받아 든 카야와 라단
이 서로 마주 본다.
“제가 창문을 깨겠습니다.”
“나는 창문이 깨짐과 동시에 바로 물을 부을게. 사엘이
보이지?”
“네.”
“어서 하자. 아버지가 곧 이곳으로 오실 거야.”
“제가 하나, 둘, 셋에 창문을 내리 칠게요.”
“유리보다 물이 먼저 사엘에게 떨어져야 할 텐데.”
‘경전의 신이여. 오늘도 이 아이를 지켜 주세요.’ 카야
가 속으로 기도를 하고는, “하나, 둘, 셋.” 하며 돌로 힘
껏 창문을 내리 친다.
라단은 캬야 가 외친 셋과 동시에 들고 있던 항아리의
물을 붓는다. 창문이 깨지면서 물이 아래로 떨어져 사
엘에게 쏟아지는 것이 보인다.
사엘의 머리 위로 물이 떨어진다. 갑자기 시간이 멈춘
듯, 깨진 창문의 유리가 허공에 떠서, 재단의 불빛에 반
사되어 반짝인다. 사엘의 머릿속에 섬광이 일듯 떠오
르는 장면이 스친다. 리만투에서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라단과 함께 바라보던 그 떠오르는 태양빛이다.
라단의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늘 이곳을 기억했으
면 좋겠어. 우리가 함께 밤을 지새우고, 바라보는 해돋
이 말이야. ”
유리들이 사엘의 옆, 신전 마루 바닥에 쨍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것을 본 라단이 두 번째 자루의 물을 붓자
사엘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사엘의 눈에 보이던 빛이 사라지고, 그녀는 머리를 좌
우로 세차게 흔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사엘아.”
“사엘 님.”
소리가 나는 곳으로 얼굴을 들으니, 카야와 라단이 보
인다.
“사엘 님. 신전 문을 여세요.”
“사엘아. 사엘아. 정신 차리고 어서 문을 열어.”
사엘이 눈을 감고, 숨을 내쉬자, 신전 안에 거센 바람이
일더니, 등불 6개와 제단의 불이 모두 사라지면서 신
전 문이 열린다.
이를 본 카야와 여람이 지붕 위에서 재빨리 내려와 신
전으로 달려들어간다.
바닥에 다시 주저앉아 있는 사엘이 보인다.
라단이 달려가 사엘을 안으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라단아. 나 봤어.” 사엘은 꿈같았던 일 들 그리고 방금
전 보았던, 떠오르던 태양빛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만, 건조해진 목에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결국은. 아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이것부터 먼저 마셔. 그리고 지금은 여
길 빠져나가야 해. 아버지가 이리로 오고 계셔.”
라단이 사엘의 입에 해독초를 부어 주고는 그녀가 삼
키는 것을 보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일으켜 세
운다.
그때, 제단 위, 경전의 신의 불이 머물던 곳에서 덜거덕
덜거덕 소리가 난다.
카야와 무사들이 재빠르게 칼을 빼들고, 카야는 라단
을 보며 말한다. “라단 님. 제사장님과 먼저 나가세요
신전 앞에 정예무사들과 말이 있어요.”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들이 제단 아래에서 들려온다.
“여기가 어디인 거 같아요?”
“글쎄요. 천창을 보니, 신전 안인 거 같기도 하고요.”
카야가 제단 위로 올라가 경전의 신의 불이 머물던 커
다란 그릇을 밀자, 그곳이 놓여 있던 곳에 커다란 구멍
이 있다. 그곳으로 사람의 머리가 나온다. 카야가 다시
칼을 들자, 라단도 한 손에는 사엘의 손을 잡고, 한 손
에는 칼을 뽑아 든다.
하갈이다. 그 뒤로, 마하살과 레이까지 올라온다. 서
로들 놀란 얼굴로 바라본다.
하갈이 먼저 나와서 사엘에게 다가가 말한다. “사엘
아? 넌 언제 정신이 든 거야? 아니면? 넌 매향 초를 안
마신 거니? 라단이 넌 여기 어떻게 있는 거야?”
하갈의 말에 라단이 말한다. “서재에 갔다가 아버지께
서 하시는 말씀을 엿듣게 됐어요. 그리고 이곳으로 먼
저 달려왔어요. 그런데 다들 괜찮으신 거예요? 아버지
말씀으로는 다들 매향초를 드셔서 환각 상태에 있으실
거라고 하며, 라함 수장님 댁으로 가셨어요.”
하갈이 말한다. “할머니 집사님께서 어떻게 아시고는
해독초물을 만드셨어. 그래서 내가 먹고, 밧세도 먹이
고, 비밀 통로로 여람이네 갔다가, 수아네에서 오는 길
이야.”
라단이 묻는다. “비밀 통로요?”
사엘이 라단을 보며 말한다. “나도 모르는 길이야. 이
게 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나는 아무것도 이해가 안
돼.”
마하살이 말한다. “몇 년 전 라함 수장님께서, 하라셀
선조님 때부터 만들어진 1, 2, 3지파가 연결되어 있는
비밀 통로라며, 우리에게 보여 주셨어. 제사장님 집까
지는 위치가 바뀌어 통로와 입구가 달라졌을 거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이렇게 용케 잘 찾아왔네. 여람이랑,
수아, 밧세는 저 아래 비밀통로에 있어. 제사장님을 모
시러 온 거야. 마침 여기 다들 있으니. 서둘러 가자. 가
면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꾸나.”
하갈과 마하살의 말에 라단이 그나마 안도의 숨을 내
쉬며 말한다. “다들 이렇게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
요. 전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듣고, 누구 한분이라도
잘못되셨을 까봐. 가슴이.”
라단의 말에 하갈, 레이, 마하살은 수아가 눈과 목소리
를 잃은 것, 그리고 라함과 레첼이 사울진에게 잡혀간
것을 생각하며, 안색이 어두워 졌지만, 여기를 모두 빠
져나가는 것이 먼저 이기에 그들의 대한 이야기는 잠
시 미루고, 사엘과 라단에게 빨리 가자는 손짓을 하며
다가온다.
라단은 사엘의 팔을 잡고 돌려, 그를 마주 보게 하고는
말한다. “사엘아.”
사엘의 시선이 라단에게 머문다.
“사엘아. 너 먼저가. 나는 여기 남아서 정리를 좀 해야
할거 같아.”
사엘이 라단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무언가를말하려고 하자, 라단이 다시 말한다. “알아.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아.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해야
해. 아니해야만 해. 내가 여기 남아서, 아버지를 막아야우리 모두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이번만 내 말대로 해
줘. 응?”
사엘은 싫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다시 세차게 흔든다.
“우리 금방 다시 만날 거야. 내가 다 해결하고 찾으러
갈게. 그러니까 지금은.”
라단의 말에 사엘의 눈에서 눈물이 고인다. 그런 사엘
을 보자, 라단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사실 라
단의 마음에도 사엘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만난다면
언제 만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그래서 더 이상 말
없이, 그저 사엘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준
다.
그때, 하갈이 사엘의 한 손을 잡으며 말한다. “사엘아.
라단이 말이 맞을 수도 있어. 라단까지 간다면, 사울진
수장을 더 노엽게 할 거야. 라단이 사울진 수장님을 잘
설득할 테니, 믿고 가자. 우리가 여기 이렇게 있는 건,
모두에게 더 위험할 수 있어. 라단아. 너에게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해서 미안해.“
“제가 당연히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가 하신 일
은 제가.”
하갈이 잡고 있던 사엘의 손을 놓고, 대신 라단의 어깨
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너의 마음 알아. 너도 얼마나
놀라고, 걱정했겠니. 이건 너 잘못이야 아니야. 그러니
너의 아버지 일로 네가 미안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
어. 응?”
“네. 하갈 수장님. 그래도 제가 아버지 대신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조금만 잠시 피해 계시면, 제가 모두 해
결하고, 곧 찾으러 갈게요. 그러니 제발 무사히만 계세
요.”
마하살도 다가와 라단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너의 잘못도 아닌데, 네가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너도 같이 가도 된다.
여기 남아서 네가 꼭 해결하지 않아도 돼.”
“아니에요. 이 일은 제가 남아서 아버지와 함께 해결해
야 해요. 그러니 다들 무사히 빠져나가서 계세요. 그것
만 해 주시면 돼요.”
라단은 잡고 잇는 사엘의 손을 하갈 에게 넘겨주며 말
을 잇는다. “다들 어서 가세요.”
“라단아.” 그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사엘이 겨우 입을
열어 라단을 부른다.
라단의 시선이 사엘이 그를 바라봤던 것처럼 그녀에게
머문다.
“라단아.” 사엘이 라단의 이름을 부르고는 입고 있는
예복의 맨 윗단추를 손으로 뜯어 떼서는 라단의 손에
쥐어 주며 말한다. “이 단추가 너와 나를 찾게 해 줄 거
야. 그러니까 나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빨리” 사엘
이 다시 목이 메어 잠시 멈추고는 말을 잇는다. “나 찾
아와.”
라단이 단추를 손에 꼭 쥐며 말한다. “알았어. 금방 해
결하고 찾으러 갈게.”
하디와 유모를 데려온 카야와 정예무사들이 신전 안
으로 들어온다.
유모가 사엘에게 다가와 묻는다.
“사엘 님. 괜찮으세요?”
카야가 말한다. “어서 서둘러 가세요. 그리고 사엘 님.
저도 여기 라단 님과 남겠습니다.”
카야의 말에 사엘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카야
가 말을 잇는다. “병사들을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제가
없으면, 병사들이 남아서 어떻게 될지 몰라요. 남아서
병사들을 챙기고, 저도 금방 뒤따라 가겠습니다. 그러
니.”
카야의 말에 사엘이 눈을 감자, 카야가 하던 말을 멈춘
다.
잠시 후, 사엘이 그를 부른다. “카야.”
“네.”
“병사들을 데리고 리만투어로 가. 카야와 병사들을 지
켜 줄 거야.” 사엘은 예복의 두 번째 단추를 떼서는 카
야의 손에 쥐어 주며 말을 잇는다. “이 단추가 내가 있
는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
카야도 단추를 손에 받아 쥐고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
덕이며 대답한다. “네. 말씀하신 대로 병사들을 데리고
리만투어로 가겠습니다. 여기 정예무사들과 함께 가세
요. 이들이 지켜 드릴 거예요” 카야가 10명의 정예 무
사들에게 고개 짓을 하자, 그들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마하살이 앞장서서 걸으며 말한다. “다들 어서 가요.
통로 아래에 있는 아이들도 기다릴 거예요. 서둘러야
합니다.”
하나둘씩 비밀 통로로 들어가고, 마지막에 하디와 유
모 사엘이 남았다. 사엘이 남은 두 사람 카야와 라단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왠지 작별 인사가 될
거 같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라단과 카야도 사엘
을 바라보며 사엘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비밀 통로 아래서 하갈과 마하살이 내려 오라며 손짓
을 하자, 하디가 사엘에게 말한다. “이제 가셔야 해요.”
사엘은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통로로 내려간다. 하디
와 유모까지 가는 것을 지켜본 라단과 카야가 서로 통
했는지, 서둘러 제단의 항아리를 깨서 입구를 막는다.
예전과 다름없이 그저 모임 후,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인
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앞으로 일어날 그들의 여정이 이 깜깜한 통로 안 보다
더 어둡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