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갈을 만나러 온 라함이 넋이 나간 얼굴로 걸어오는
아비갈을 보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면서 걸어와?”
라고 말하며 다가가 묻자,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라함
을 본 아비갈은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오셨어
요? 하갈님 만나러 오셨죠? 저도 오전 내내 못 뵈었어
요. 어디 계시지? 제가 찾아볼게요”라고 말하며 바삐
가려 하자, 라함은 아비갈의 팔을 잡는다.
“조금 있다가, 그렇게 분주히 움직이지 않아도 돼.”
라함의 말에 아비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려던 발
걸음을 멈춘다.
“무슨 일이 라도 있어?””
라함의 물음에 아비갈이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낸다.
“왜 그래? 이리 와봐.”
라함은 그녀를 데리고, 부얶 뒤의 문으로 나와 뒷마당
에 있는 의자에 그녀를 앉히며, “그래. 울고 싶을 땐 좀
울어도 괜찮아.” 라고 말한다.
라함도 아비갈 옆에 말없이 앉는다. 잠시 후, 아비갈이
코를 훌쩍이자, 라함은 바지와 윗옷 주머니를 뒤적이
며 손수건을 찾지만 없다. 늘 빳빳하게 다림질된 수건
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그 였지만, 언제부터 손수건
을 가지고 다니지 않은 것을 잊어버릴 만큼 시간과 환
경이 바뀌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라함은 순간
그의 현재의 모습을 보며, 아비갈 처럼 울고 싶다는 마
음이 든다. 그때, 늘 옷 속에 있던 수건이 소중하고 감
사했었구나 라는 마음도 든다.
라함도 한숨을 내쉬자, 아비갈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괜찮으세요?” 라고 라함에게
묻는다.
“나?”
“네.”
“나? 나는 괜찮지. 그런데 내가 괜찮냐고 묻는 거야?”
“네. 지금 손수건 찾으시다가 없으셔서, 한숨 쉬셨잖아
요.”
“아. 그걸 어떻게?”
“그때도 그러셨어요. 그리고 전 그게 참 신기 했어요.
어떻게 저렇게 깨끗하고 빳빳하게 다림질된 손수건을
늘 챙기고 다니실까 그것도 그 어린 10대에. 제 손이나
얼굴을 닦아 주시려고 할 때면 너무 민망했어요. 깨끗
한 수건이 더러워질까 봐요. 그래도, 늘 괜찮다며, 손
수건을 저에게 주셨어요. 이 손수건도, 그때 쓰시던 거
예요.”
아비갈이 낡고 헤어진 손수건을 라함에게 보여 준다.
“내가 쓰던 거라고?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던 거야?”
“버리면 아깝잖아요.”
아비갈이 손수건을 만지작 거린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게 아니다. 그날 떠날 때, 라함이 읽고 놓고 갔던
책, 놓고 갔던 손수건, 그녀와 차를 마시려고 가지고 왔
던, 찻잔과, 주전자, 지나가다 상점에서 사 왔다는 옷가
지들 그리고 건네던 반지를 챙겨 떠났었다. 그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었고, 그녀의 삶에서 늘 기억하고 싶었
던 순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전, 좋았어요.”
“응?”
“그때 절 많이 아껴주시고, 좋아해 주셨던 거 알아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늘 마음이 따스해요.”
“내가 끝까지 함께 해 주지도 못했는데. 뭘 그렇게 좋
게 기억하며 간직하고 있어."
라함이 고개를 떨군다. 그녀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아
꼈고, 그가 가진걸 모두 내려놓고, 그녀와 함께 어디든
가서 살고 싶었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요.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건 당신이 아니라, 저였어요. 제
가 감당할 수 없어 떠난 거예요. 그래도 당신이 주었던
마음으로 늘 따스하게 살 수 있었어요.”
라함과 아비갈은 다시 만났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가,
이제는 함께 하며 살자고 할 수 없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르게 살아온 시간이 많이 흘렀고, 또 그때와 다른 각
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감이 있기 때문이다.
아비갈은 정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라함도
무슨 일이 있냐고 묻지 않는다. 서로 나란히 의자에 앉
아, 지나간 과거나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
고, 잠시 숨을 쉬는 이 시간에 머물러 본다.
다음날 해가 지기 전, 하늘이 보라색, 분홍색으로 물들
었을 때, 놀이방 앞마당에 수아, 라함, 사엘, 밧세와 하
갈 그리고 아비갈과 여람의 부모가 모여 있다. 주변에
유모와 하디 그리고 카야도 와 있다.
여람과 정하는 라함이 진행하는 가운데, 혼인 서약을
한다. 모두에게 여람의 혼인이 놀라웠지만, 다들 왜 그
런지, 묻지 않는다. 여람도 이렇게 빨리 혼인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하를 저렇게 혼자 놔둘 수 없
었고, 또 사엘에게 뭔지 모르지만 보여 주고 싶었다. 그
가 항상 그녀 옆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
고 싶다는 한심한 생각을 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
상 사람들 앞에 정하와 서 있으니, 며칠 동안 일어난 모
든 일들에 다시 후회가 밀려온다.
여람은 라함 옆에 서서, 그들의 혼인의 증인인 제사장
으로 서 있는 사엘을 바라본다. 사랑하는 여인이자, 오
랜 친구인 그녀가 조금은 아쉬워하며, 이 결정에 후회
하진 않겠냐고 묻지 않을 줄 알았지만, 친구도, 고백을
받았던 이의 모습도 아닌 그녀는 제사장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한 모습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여람의 마음
에 찬 바람이 분 듯 휑하게 느껴진다.
그날 사엘이 있던 방에서 나온 날부터 모든 것이 바뀌
고 엉망이 돼 버려, 이제 와서 시간이 되돌려지지 않는
이상 돌릴 수 없는 이 상황을 만들어 버린 여람은 스스
로를 원망하며 서 있다.
정하는 여람을 바라본다. 그녀와 혼인하는 이 남자의
시선은 줄곧 사엘을 향해 있다. 슬픔이 밀려 오지만, 괜
찮아 나는 여람의 아내야 라며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
인다. 그래야 아비갈도 그런 그녀를 보며 안심을 할 것
이다.
혼인 서약을 마치고, 오랜만에 다 같이 앉아 저녁 식사
를 한다. 남아 있던 이들은 떠난 이들이 걱정이 되어 잘
먹지 못했고, 떠난 이들은 남아 있는 이들이 그리워 잘
먹지 못했었다.
오랜만에 얼굴에 미소를 띈 마하살이,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라함도 오랜만에 편안한 얼굴로, "그러게요. 이런 날이
그래도 다시 왔습니다." 라고 말한다.
레이는 옆에 앉은 정하에게 음식을 건네며, "이것도 좀 먹어봐.“ 라고 따뜻하게 말한다.
레이는 여람이 사엘을 오랫동안 좋아 하고 있는 것을
안다. 그런데 레이는 사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여람
이의 부인으로는 사엘 보다는 정하가 마음에 든다. 이
런 전쟁이 있지 않았다면, 어쩌면 가문 좋은 집 딸을 며
느리로 맞이 했을 수도 있다. 사돈을 맺자고, 몇명 집안
이 청해 오기도 했었다. 그런데 레이는 그런 집 딸 보다
정하가 마음에 든다. 이 아이가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
게서 태어나고 자랐는지는 레이에게 중요 하지 않다.
정하는 당차고, 곧고, 그리고 성품이 맑고 밝다. 게다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고 따스하다. 아들도 곧 정
하의 그런 마음을 알아주고, 그도 정하를 좋아하며, 둘
이 서로 재미나게 행복하게 살기를 바래 본다.
레이가 정하의 손을 잡으며, 앞에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아비갈을 보며, "이렇게 귀한 딸이 제 아들과 혼인 하
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비갈은 그동안 이들과 전쟁도 같이 했고, 모여서 회
의도 했지만, 오늘 무사의 옷이 아닌, 신부의 어머니로,
여자 옷을 입고, 그저 말로만 듣던 높고 높은 지파의 수
장들과 그들의 자녀들 속에 둘러 앉아 있으니, 이 자리
가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전쟁중이라지만 하갈도, 레이도 모두 고운 모습이고,
마하살과 라함도 안정되고 편안해 보인다. 그들의 자
녀들도, 그동안 여러 힘든 일들을 겪었다고 하지만, 구
김없이 넉넉해 보인다. 살아 남기 위해 숨 가쁘게 살아
온, 그녀와 딸의 모습과는 전혀 달라 보인다.
레이가 투박하고 거친 아비갈의 손도 잡으며,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좋은 집도 해 줄게요."
마하살 집은 지난번 전쟁으로 일부가 타고, 망가져 머
물수가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다 같이 모여 있어야 안
전하고 안심이 되기 때문에 하갈 집에 모여 있는 것이
다.
아비갈은 그녀의 거친 손이 레이의 보드라운 손을 찌
르기라도 할 것 같아 손을 빼고 싶지만, 레이는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마주잡고는, 정말 맘에 드는 며느리를
맞이 한 것처럼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아비갈과 정하
를 번갈아 보며 이야기를 한다.
한참 후, 마하살이 일어나며, "오늘 다들 축하 해 주셔
서 감사합니다. 이런 상황에 그래도 이렇게 즐거운 날
도 있으니, 견딜만 합니다."
마하살의 말에 다들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수아와, 밧세, 카야와 라함, 마하살은 병사들을 둘러 보
러 간다.
레이는 아비갈이 내내 어색해 하는 것을 알았고, 앞으
로는 가족으로 만날 날도 많은데, 좀더 친해지고 싶어,
하갈과 아비갈의 손을 잡으며 좀더 이야기를 하자고
해서, 이들은 하갈의 방으로 간다.
정하와 여람은, 정하의 방으로 간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혼인식도 제대로 하고, 네 집
과 방도 해 줄게.”
“네.“
“그래. 피곤할 테니 자.” 라고 말한 여람이 방을 나서려
하자, 정하가, "다른 분들과 병사들을 보러 가시려구요
?" 라고 묻자, 여람은 별 대답없이 방을 나선다.
여람은 방을 나와, 놀이방으로 향한다. 다른 이들을 따
라 병사들을 보러 가면, 오늘은 안 그래도 된다며 돌려
보낼 것이다. 마당에 나가 있으면 사람들 눈에 띌 것이
다.
사엘은 놀이방에서 비밀통로의 문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다. 제단 아래 통로로 가면 마치 라단이 와 있을
것만 같다. 아니면, 라단이 있는 곳 까지 비밀통로가 연
결 되어 있는지, 찾아가 보고 싶다.
여람이 사엘에게 다가가 앉으며, “여기서 뭐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여람을 보자 놀라, “너야 말
로 여기 왜 있어?”
“그럼 내가 어디 있어야 하는데?”
“무슨 말이야? 어디 있어야 한다니?”
“넌 내가 안 보여?”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지금도 널 보는 나는 안 보이냐고?”
“오늘 혼인한 사람이 그게 무슨 말이야?”
“혼인? 내가 왜 혼인을 하게 됐는데? 알아? 넌 그 이유
를 알아? 아니 알고 싶기는 해?”
“무슨 이유를 알아햐 하는데? 오늘 나의 오랜 친구는
혼인을 했어. 그런데 내가 뭘 더 알아야 하는데?”
“친구? 오랜 친구? 그 친구라는 소리 지겨워.”
“친구가 지겨워?”
“응. 이젠 지치고 힘들어. 나는? 언제나 너의 곁에 너만
바라보며 이렇게 있었어. 나는? 나는 네가 날 사랑 하
지 않는 것, 그래 그것도 좋아. 그런데 왜 내가 널 사랑
하는 것도 못하게 하는데? 내가 왜 니 옆에 있는 것도
못하게 하는데?”
“그래서 너에게 늘 고마워.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이 맞
는지 모르겠지만, 너의 마음을 그러니까. 내가 혹시 네
가 오해하게 한 거였다면 미안해.”
“오해? 미안해? 널 사랑한다는데 오해라고? 그래서 미
안하다고? 그리고 도대체 뭐가 고마운 건데? 이렇게
있는 나? 아니면 네 곁을 떠난 나? 네가 얼마나 잔인한
줄 알아?”
순간 여람의 머리에 그가 정하한테 한 행동과 말, 그리
고 정하가 한 말이 떠오른다.
“이래서 잔인한 거구나. 너는 나에게 잔인하고, 나는
누군가에게 잔인하고.”
“정하는 좋은 사람이야. 지금까지 함께 하면서 우리 다
알잖아? 정하에게 잘해줘.”
“네가 상관 할바 아니야. 아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너니까 상관이 있나?”
“여람아. 나도 힘들어. 이런 전쟁도 힘들고, 이 모든 것
들이 힘들어. 그래도 우리 여기까지 왔고, 이제 모든 것
이 끝날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힘드니까 나랑 있자는 거잖아. 내가 너의
곁에 있겠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친구로, 우리가 지금까지 지냈던
것처럼, 그렇게 지내면 안 돼?”
“너는 나를 놓아주지도, 멀리 하지도 않아. 거기 친구
라는 경계를 만들고는, 그 경계에서 이러고 있으래. 난
너만 보면, 이렇게 미칠 거 같은데, 내 마음 하고는 상
관없이, 그 경계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이렇게 철
저하게 막으면서, 멀리 가지도 못하게 해. 도대체 나보
고 어쩌라는 거야?”
“여기 있지 말고, 방으로 돌아가. 너와 내가 나누는 이
런 모든 이야기는 의미가 없어.”
“왜? 왜 의미가 없어?”
“넌 내 친구야.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언제나 내 친
구야.”
“너는 정말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
야? 우정이라고 해 버리면 네 마음이 편해서 그래?”
여람의 말에 그녀는 말이 없다.
둘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여람아. 너도 내 마음을 알잖아?”
그 둘 사이에 라단이 있다. 여람은 라단이 있어도 있지
않아도 늘 사엘 옆에 그가 있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그
렇다.
“당분간 여기에 있을 거야. 내 방에 가는 것도 그렇고,
정하랑 있기도 그래. 그냥 지금은 여기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알아 두라고.”
“알았어.”
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놀이방을 나간다. 부얶뒤에
난 문으로 나가, 뒷마당을 거닐며, 까만 밤하늘을 바라
본다.
별이 빛난다.
리만투어 모래 위에 라단과 누워 밤하늘의 저 별을 함
께 바라보고 싶다. 다리에 화살을 맞고, 사울진이 데려
갔다는데, 그 뒤로 아무런 소식이 없다. 달려가 괜찮냐
고 묻고 싶지만, 그녀가 저곳으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디부터, 언제부
터 이렇게 서로 적이 되어 마주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사엘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능력 중에 하나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걸고 서라도 되돌
리고 싶다. 그런데 언제로 돌아 가 바로 잡아야 하는지
도 모르겠다.
친구들을 만나기 전으로?
라단을 처음 만나던 날로?
리만투어에서 그녀가 경전의 신의 음성을 들은 날로?
수아가 경전의 신의 음성을 듣던 날로?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걸.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다면 엄마는 살아 있었을까.
사엘은 가슴을 쥐며, 소리를 참으며 운다.
병사들을 둘러보고 온 카야는 사엘을 찾아 다니다, 뒷
마당으로 나가는 그녀를 보고는 사엘이 앉아서 흐느껴
울자, 그녀 옆에 앉아 그녀의 등을 쓸어내린다. 그녀
의 엄마처럼 느껴지지는 않겠지만, 카야는 하란의 이
름을 조용히 부르며 기도 한다. 당신의 딸의 마음을 위로해 주세요.”
정하는 여람이 나가고, 그녀도 그와 함께 가서 병사들
을 둘러 보려고 나갔는데, 여람이 놀이방으로 가는 것
이다. 정하는, 저도 같이 가려고 나왔어요 라고 말하며
방으로 따라 들어 가려는데, 사엘이 보였다. 그 옆에 그
녀의 남편이 앉는다. 정하는 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만다.
정하는 사엘이 나오는 것을 보고, 어둠 속으로 피한다.
그녀가 가는 것을 보고, 정하도 그녀의 방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같이 쓸 방인데 혼자 지내야 한다는 것을 안
다. 그들이 함께 있는 놀이방으로 들어가, 여기서 뭐 하
냐고 방으로 가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자격이 있
는 그의 아내지만, 여람은 정하가 넘지 못하는 경계를
더 높이 만들었다.
사울진이 다녀갔던 그 시간 라단도 긴 꿈을 꾼다.
“할아버지.”
멀리서 6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달려온다. 라단
은 처음에 자신인가 하며 보지만, 아니다. 그러면 그의
아들이 그를 향해 달려오나 봤지만 아니다. 그의 손을
보니 쭈글쭈글 주름이 가득하다.
“할아버지 하며 달려오는데 좀 달려가 안아 주지 그래
요.”
옆을 보니, 하얀 머리에, 주름이 곱게 잡힌 여인이 쳐다
보며 말한다. “자기 아들 키울 때는 그렇게 벌떡 벌떡
일어나 안아주시더니, 손주 안아주기엔 당신도 늙으셨
네요.”
그렇게 말하고는 달려오는 아이를 안고는 다시 옆에
앉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그마한 손을 만지작
만지작 하며, “코도 아빠 닮아 이쁘고, 눈도 아빠 닮아
이쁘고, 손도 아빠 닮아 이쁘고.” 라고 말하는 모습이
행복해 보이는 여인이다.
그때 훨친하게 키가 큰 남자 어른이 오며 말한다. 라단
은 그를 보며, 사엘과 아들을 낳는다면 저런 모습일까
라며 생각한다.
“식사 다 차려 놨어요.”
“누가 했어?”
“당연히 제가 했지요.”
“그래, 둘째 임신 해서 힘든데, 네가 밥도 하고, 부인도
돌보고, 애도 키우고.”
“엄마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이라고 하시더니.“
“제일은 제일이고, 네가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거고.”
“네네. 아버지도 가세요.”
훨친한 성인 남자가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워준다. 자세
히 얼굴을 보니, 정말 그의 얼굴 반 사엘의 얼굴반을 닮
은 거 같기도 하다.
“이리 와.”
성인 남자가 아이도 받아 안자, 곱게 늙은 여인이 팔짱
을 끼며 말한다.
“내가 평생 당신 팔짱을 끼며 사네요.”
평생 그의 팔짱을 끼며 살았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하
다. 아이를 목에 앉히고, 앞장서 걸어가는 성인 남자의
뒷모습이 아버지 사울진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 처럼
도 보인다. 아이와 아들이라는 성인 남자가 뒤돌아 보
며 환하게 웃는다. 옆을 보니 팔짱을 낀 여인이 웃는다.
라단은 사엘이 늙는 다면 저런 얼굴이겠구나 라고 생각한다.
아들과 손자라는 이들을 향해, 그리고 사엘을 보며 미
소를 짓는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모습들이
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그의 미소진 얼굴
에, 눈물도 함께 흐른다
일어난 라단이 보연당으로 가 의자에 앉아 있다. 이를
들은 사울진이 보연당으로 들어온다. 사울진은 보연당
의 긴 마루 바닥을 천천히 걸으며, 왕의 의자에 앉아 있
는 라단을 바라본다. 며칠 누워 있어 홸쓱 해진 얼굴이
지만, 눈빛은 오히려 더 날카롭고 강인해진 거 같다. 라
단 뒤로 크게 그려진 원이 빛을 내어 그를 비추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사울진은, ‘그래 내 아들, 라단이 앉아 있을 곳은 저곳
이지. 이 나라 원. 원의 왕.” 이라고 생각한다.
사울진이 라단 앞에 다다르자, 아버지가 아닌, 왕에 대
한 경의로, 가볍게 목례를 한다.
사울진 뒤를 뒤어, 웃날의 자리를 대신한 윤다와, 넬이
들어온다. 그들이 모두 모이자, 라단이 입을 연다.
“날이 밝았으니, 전쟁을 하러 가야지요. 병사들을 준비
시키세요.”
“전쟁이요?”
사울진은 라단이 일어나자마자 전쟁을 하러 간다는 말
에 놀란다. 물론 그 에게 와서 그만하라고, 말할 줄 알
았던 라단이 보연당에 있다는 것도 놀랍긴 했지만, 전
쟁이라니.
“네. 전쟁을 끝내야지요. 이번 전쟁은 다시 시작이 아
니라, 끝내는 전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들 병사들 준비를 충분히 하세요.”
라단이 말을 마치고, 예전처럼, 싸늘한 얼굴로, 탁자
위로 시선을 떨구며, “그만 나가서 준비하세요.” 예전
처럼 건조하고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다.
사울진, 윤다, 넬이 보연당을 나선다. 윤다는 서둘러 병
사들을 준비하러 가고, 넬이 사울진을 보며, “왕께서
예전으로 돌아오신 겁니까? 무슨 전쟁이냐고 하시더
니, 깨시자마자 전쟁하러 가신다니요.”
사울진이 대답 대신, 넬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자리
를 뜬다.
사울진은 라단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건지 짐작할
수 없다. 그리고 짐작하고 싶지 않다. 사울진도 이 전쟁
을 끝내고, 지금 모습처럼 라단이 저 자리에 앉아, 이
나라를 다스리면 된다는 생각만 하고 싶다.
모두 보연당을 나가자, 잠시 후, 라단이 보연당의 긴 마
룻바닥 복도를 느릿느릿 걸어 문을 열고 나가, 밤하늘
을 바라본다.
별이 빛난다.
눈을 감자, 리만투어 모래 위에 누워 함께 바라보던 밤
하늘이 떠오른다.
사엘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린다.
전쟁과 죽음으로 얼룩진 서로의 슬픈 얼굴들도 떠오른
다.
목에 걸은 반지를 만지작 거리며, 눈을 뜨고 밤하늘을
바라본다.
예전처럼 달려가면 바로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있지
만, 달려갈 수 없고, 달려 간다면, 전쟁이 시작 될것이
라 마음이 아프다.
며칠 동안 내리던 비가 그쳤다. 그들이 그동안 현실인
지 환상인지 혹은 꿈같은 시간도 지나고, 모두들 서로
에게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리만투어 앞에 수북이 늘어져 있던 죽은 자들
의 시신도 모두 사라졌다.
빗속에 흘러, 리만투어 바닷속에 장사되어진 것이다.